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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50화 (50/156)

50화.

방 안에 혼자 남은 드래곤 새끼, 아니 하양이는 제가 처음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왔을 때를 떠올렸다.

부화한 새끼는 저 혼자만이 아니었다. 알을 깨고 나온 색색 빛깔의 헤츨링들이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난 세계를 날아다닐 거야.”

“난 차원을 돌아다닐 거라구.”

모든 것이 낯설었다. 멍한 정신을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저를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올린 하양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블랙 드래곤을 발견했다.

드래곤은 하양이를 비롯한 헤츨링들을 내려다보았다. 애정이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충고 하나 하마.”

정말 매정한 목소리다아…, 하양이는 생각했다.

“삶에 너무 집착하지 말거라. 정도 주지 말고.”

블랙 드래곤이 자신의 날개를 펼쳤다.

“그게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과연 너희 중 한 마리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갓 부화한 헤츨링들을 남겨둔 채, 블랙 드래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블랙 드래곤이 남기고 간 충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와 한 대화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양이의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개체였다.

하양이는 그 말을 착실히 따랐다. 삶에 집착하기보다 죽을 때를 미리 정해두었고, 삶에 정을 주는 대신 매 순간 잠을 잤다. 그 결과 하양이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500살이 되는 순간 성체가 되기 위해 겪게 될 고통은 알고 있었다. 싫었다. 성체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되고 싶은 이유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이후, 마지막 1년은 의미 있게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뭘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며 살아남긴 했지만, 자신은 모르는 것도 너무 많았고 공허했다. 결국 하양이는 인간 세계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하지만 구경도 금방 지쳤다. 그냥 계속 자고 싶었다.

피곤한 몸 때문에 이끌려 간 탑에서 하양이는 로제를 만났다. 그러면서 그동안 살아왔고, 살아가려 했던 삶의 계획이 아주 많이 일그러졌다.

회색빛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조금씩 여러 빛깔로 물든다.

멈춰 있던 하양이의 시간이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

알버트를 만나고 돌아온 후, 나는 방에서 짐을 챙겼다. 침대 위를 뒹굴던 하양이가 쪼르르 내 곁으로 달려왔다. 품에 꼭 안아주니 하양이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갈래….”

목소리 끝이 늘어지는 건 여전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확고한 말투였다. 하양이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구나.

우리 둘은 시종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썼다.

성문 앞에 선 나는 슈버트를 마주했다. 나는 힘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남작님.”

“왔군.”

슈버트는 내 품 안에 안긴 하양이를 보며 웃다 흠칫 얼굴을 굳혔다. 평소 좋아하던 모습과 좀 달랐다. 그가 몸을 부들부들 떨다 넌지시 물었다.

“…드래곤이라 들었다.”

“네, 그렇습니다.”

슈버트가 얼굴을 부여잡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걸 왜 말 안…!”

“…예?”

“아니다. 이쪽이다.”

뭔가 억울한 듯, 평소와 전혀 다른 말투로 중얼거리는 얼굴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달려 있었다.

어? 잠깐, 눈물?

드래곤을 무서워하는 건가?

한숨을 내쉰 슈버트는 내게서 슬금슬금 멀어진 후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그가 눈보라 속을 헤치며 길을 안내했다. 호오, 숨을 내쉬니 뽀얀 김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왔군.”

슈버트와 똑같은 말투로, 리암이 우리를 반겼다. 생각해 보면 둘의 말투가 정말 판박이 같다.

리암은 마법진 한가운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짐가방 세 덩이도 보였다.

“딱 시간 맞춰 왔군.”

리암은 마법진 안에 서 있으라 말했다. 옷을 껴입었지만 눈보라 때문에 얼굴이 추웠다. 망토를 더 꽉 조여 매던 나는 알버트가 있을 성의 방 창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멀리 있어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의 방에 그림자가 언뜻 보인 것 같기도 했다.

처음으로 알버트와 헤어지는 순간이다. 비록 며칠뿐이지만.

그럼 잘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알버트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정확히 8시 반이 되는 순간, 마법진이 빛났다.

주위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속이 뒤집혔다. 토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한 기운이 치밀었다.

“욱….”

알버트가 마법을 쓸 때 얼마나 세심했는지 알 것 같다.

“도착했다.”

리암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며 마법진 밖으로 나왔다.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어두운 방은 무척 습했다. 돌로 이루어진 벽과 벽에 붙어 있는 희미한 등불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곳은 수도에 있는 베르젠 남작가 저택이다. 저택 안내는 주인이 할 테니 우선 나는 먼저 올라가 보지.”

리암은 능숙하게 가방을 들고 성큼 지하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갔다. 한두 번 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 진짜….”

리암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부여잡던 슈버트는 후 숨을 내쉬었다. 리암을 열심히 흘기는 게 좀 우스웠다.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던 리암은 나를 보며 애써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올라가서 네가 머물 방과 작전에 대해 알려주지.”

“제가 이 작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나요, 그런데?”

“뭐, 작전보다는 이번에 죽게 될 드래곤과 이야기를 나누고 타이밍을 잘 보는 것뿐이다.”

어깨를 으쓱인 슈버트가 팔짱을 꼈다.

“내가 직감은 꽤 좋은 편인데 그게 아마….”

그가 벽을 발로 툭툭 치더니 중얼거렸다.

“아마 늦어도 내일에는 죽을 거거든.”

하양이가 몸을 움찔 떨었다. 나는 하양이의 등을 토닥여 줬다. 슈버트가 내게 마법진에서 나오라 손짓했다.

나와 슈버트는 리암이 오른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지하는 부엌과 연결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 먼지가 푹푹 쌓여 있었지만.

“…유령 저택 같네.”

무엇보다 이 저택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이해될 법도 했다. 굳이 사람들을 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가 네 방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저택의 규모는 꽤 컸다. 2층으로 올라간 나는 슈버트와 계단 바로 옆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방은 청소가 좀 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는 내가 갈아입을 수 있는 바지와 블라우스가 있었다. 와, 바지 입는 게 얼마 만이야?

“언제 뛰어야 할지 모르니 드레스보다는 이쪽이 좋지. 물론 드레스가 아닌 게 싫겠지만….”

“아뇨, 좋습니다!”

드레스도 좋지만, 확실히 활동할 때는 바지가 좋다. 탑 안에 있는 옷은 전부 혼자 갈아입을 수 있는 드레스밖에 없어 아쉬웠던 참이다.

“그런데 저희 어떻게 가는 건가요? 작전에 대해 더 듣고 싶습니다.”

슈버트는 날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말을 이었다.

“예의 드래곤은 지금 작전이 일어날 곳에 머무는 중. 우리는 여기에서 마법사를 통해 움직인다.”

“마법사들이라면… 왕자님을 탑에 가둔 자들 아닌가요?”

슈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를 탑에 가둔 자들은 공작님에 의해 거의 다 붙잡힌 상태다. 저하를 탑에 가둔 후 마법사들 세력은 저하를 따르고 새 왕실을 원하는 진보파와, 전통과 현 왕실을 지지하는 보수파로 나뉘었다.”

로스투라투가 왕실 상황에 전혀 모르는 시민들은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마법사들을 포섭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진보파를 통해 자신이 숨겨온 마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드러내기 시작한 알버트가 상대라면 특히나.

리암 쪽에서 드래곤을 어떻게 찾았을까 궁금했는데 그 의문은 풀렸다.

드래곤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뿐이다. 이번에 죽을 위기에 처한 드래곤을 리암 쪽에서 알아낸 것도 모두 그를 따르는 진보파 마법사들이 도와준 거겠지.

“그럼 옷을 갈아입고 나와라. 마법사와 함께 드래곤이 있는 곳으로 갈 예정이니.”

“작전까지 시간이 빠듯한 모양이군요.”

“아니, 그건 아닌데… 공작님께서 네게 그 드래곤과 이야기할 시간을 주라고 했었다.”

…이 세심한 왕자님은 정말 내가 계약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바로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슈버트가 나가자마자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바지를 입고, 굽이 없는 부츠로 갈아신었다. 움직일 때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게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신기하다아아….”

“나 바지 입은 건 처음 보는구나, 하양아.”

하양이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반짝이는 게 귀여웠다.

“아직 못 본 내 모습이 훨씬 많을걸?”

장난스럽게 말한 나는 하양이를 품에 안았다.

“자, 그럼 만나러 가볼까.”

나는 슈버트와 함께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마법진이 있는 곳에 아까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람이 서 있었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상대방 쪽이 먼저 망토를 벗었다. 짧고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이 웃고 있었다.

슈버트가 먼저 그녀를 소개했다.

“그럼 인사하는 것이 좋겠다. 이쪽은 메르시, 우리 쪽 마법사들의 수장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와, 같은 성별의 사람을 보는 게 얼마 만이야! 나는 한껏 올라간 목소리로 그녀를 반겼다.

“여기는….”

“세상에! 언니, 설마 이거 화이트 드래곤?”

슈버트가 내 소개를 하기도 전에 메르시가 눈을 반짝이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슈버트가 그녀와 내 사이에서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지금은 작전 중이다.”

“알겠어. 그런데 그 말투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는 건가, 남작님? 나는 다른 쪽이 훨씬 나은 것 같거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군. 다른 쪽이 나은 게 아니라 이쪽이 소름 돋는 거라고 했었으면서.”

“알고 있으면 됐고. 어차피 이분도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우리 편이라는 소리잖아?”

“네 헛소리는 기각한다.”

너무 자연스럽게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혼을 뺏겼다. 그런데 그게 묘하게 어울렸다. 분위기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오랜만에 직장인으로서 쌓은 짬밥이 발동한다.

나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둘이 사귀어요?”

“내가 미쳤어?”

“미쳤어요?”

어, 둘이서 동시에 정색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닌 모양이다.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가볼까요?”

내 말에 헛기침을 하며 먼 산을 바라보던 메르시가 다시 활짝 웃었다. 그녀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드래곤을 보러.”

나는 다시 마법진 안에 섰다. 메르시와 슈버트가 내 양쪽에 섰다.

우리는 숲으로 순간이동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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