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알버트가 나를 아끼는 것을 안다. 그가 내게 보여주는 미소가 흔하지 않다는 것도.
그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해서 나를 다그치듯 하던 말에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양이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새벽에 눈을 뜬 나는 창문 가까이 섰다. 바깥에 다시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매일 눈 치우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는걸.
해가 막 떠오르는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넋을 놓고 있던 나는 공중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사람인 듯 보이는 형체가 날렵하게 성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본 걸까? 내가 정말 피곤하긴 한 모양이지.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알버트에게 갈 준비를 했다. 그와 이 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과 간호는 별개의 일이었다.
문을 연 나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하고 눈을 깜빡였다.
“…공작님?”
리암이 복도를 가로질러 단숨에 내 앞에 섰다. 그가 아직 물기가 남은 흑발을 쓸어 넘기며 숨을 골랐다. 후, 내쉬는 숨이 깊었다. 그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타이밍이 잘 맞았군.”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아직 풀려 있던 단추를 목 바로 위까지 잠갔다. 잘 차려입은 셔츠와 제복, 그리고 허리춤에 칼까지 두른 모습은 당장 전투라도 나갈 법한 태세였다.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알버트와 비슷한 듯 다른 분위기에 감탄했다. 사람들이 괜히 북부대공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탑 안에 있을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꼬박꼬박 규칙적인 일상을 이어가던 알버트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남주들은 새벽 훈련이 일상인 게 분명하다. 나는 지금 일어나는 것도 힘든데, 주인공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딱 맞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저하께서 말씀을 주셨다. 오늘 저녁에 떠날 테니 맞춰 준비하도록.”
“그렇게 빨리요? 왕자님은….”
알버트가 시켜서 가는 거긴 하지만, 그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저하께서 괜찮다 하셨다.”
알버트가 괜찮다 말하는 건 괜찮다는 게 아닐 텐데. 내 석연찮은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리암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믿는 게 내가 할 일이고.”
리암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미간을 좁혔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말하며 내 왼쪽 어깨에 손을 올린 리암이 몸을 빙글 돌려 가볍게 나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드래곤 새끼는 울음을 터트린 순간부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와 같아. 가는 시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지금도 사람이 늘어 마법진을 준비해야 해서 늦는 거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떠날 거다. 절대로 늦어서는 안 돼.”
작전을 설명하듯 일목요연하고 단단한 말투였다. 그의 말을 들으니 그제야 죽어가는 새끼 드래곤을 보러 간다는 것이 좀 실감이 난다.
“절대 짐이 되지 말도록.”
짤막한 말이 철퇴처럼 나를 후려쳤다.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모두 저하를 위한 일이니까.”
탑과 알버트, 그리고 하양이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내 세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흑마법을 치료한 후 북부 구경이나 하면서 놀다 갈 줄 알았는데. 책 속의 활자에 가까웠던 세상이 점차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에 알버트가 나를 함께 넣었다는 건, 나를 그만큼 믿는다는 증거였다. 이제 계약서는 필요 없다.
“네, 알겠습니다.”
평소와 달리 웃음기를 싹 지운 대답이 마음에 든 걸까, 리암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작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슈버트 남작과 이야기하도록 해.”
“…남작님께서도 함께 가시는 건가요?”
그가 기사단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아는 나로서는 좀 놀라웠다. 기사단은 황궁에 상주하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먼 북부까지 내려와 있는 것도 모자라 이번 작전까지 참여한다니.
…진짜 기사 맞아? 너무 땡땡이치는 것 같은데.
하지만 평소 행동이나 이미지를 보면 리암을 쏙 빼닮은 모습이 기사에 딱 맞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슈버트에게 듣는 게 빠를 테고,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건 하나다. 이번에 저 드래곤을 데리고 갈 건가?”
리암이 턱짓으로 하양이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하양이의 정체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하양이를 보며 나는 갈등했다. 아무리 개인주의인 드래곤이라도, 같은 개체가 죽는 걸 보면 충분히 트라우마가 될 수 있을 테다.
이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당사자가 직접 정해야 한다.
“데려갈 생각이라면 저녁 8시에 성문 앞으로 데리고 나오도록. 다른 드래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유용할 수도 있으니.”
“배려 감사합니다.”
“배려가 아니라, 내가 응당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서재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는….”
“…….”
“수도에서 계속하도록 하지.”
우리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 후 리암이 방을 나섰다.
나는 리암이 가고 난 후, 하양이를 깨웠다.
“하양아, 일어나.”
“뭐야아아….”
하양이가 몸을 꼼지락거리다 일어났다. 어제까지 슈버트랑 열심히 논 모양이었다. 졸린 눈을 뜨는 모습마저 모두 귀여웠다.
“하양아, 나는 수도로 올라갈 거야.”
“으으응…?”
하양이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죽을 때가 된 새끼 드래곤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서야.”
죽을 때, 라는 말이 나오자 하양이가 주춤했다. 항상 피하던 화제가 나오자 놀란 모양이었다. 새하얀 몸과 얼굴인데,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왜, 왜…? 아파아…? 로제… 아파아…? 주, 주그려는 거야?”
하양이가 날 보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을 했다.
나는 하양이의 앞발을 조심스레 잡았다. 내 손에 들어갈 만큼 작은 발이었다.
“아니, 내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야.”
“…으응?”
“하양아, 나는 네 계약자가 되고 싶어.”
“아냐아, 계약자 되는 거 너무 아파아…. 나는 로제가 아픈 거 싫어어…. 난 어차피 죽을 건데에….”
하양이가 고개를 저으며 느릿하게 중얼거린다. 그 목소리는 체념하는 기색조차 없이 담담했다.
그동안 이 드래곤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해주는 말이었다. 나는 하양이를 품에 안고 가만히 등을 쓸어주었다.
“하양아,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어쩌면 이기적인 욕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탑에 국한되어 있는 내 세계가 커질수록, 하양이의 세계도 커졌으면 좋겠다.
목숨과 직결된 삶을 살고, 긴 수면을 통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하양이가 좀 더 욕심을 부렸으면 좋겠다.
“나와 같이 여행을 가고, 나한테 화도 내보고, 투정도 내보고. 탑에서와 비슷하면서 다른 일상을 계속 함께했으면 좋겠어.”
내가 이곳에 와 알버트 다음으로 마음을 준 유일한 사ㄹ… 아니 드래곤이니까.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 나 다녀올게.”
“…….”
하양이가 망설이며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하양이를 꼭 안아주었다.
“떠나는 건 오늘 밤이니까 생각해 봐도 돼. 나는 왕자님 만나고 올게.”
아무래도 하양이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
***
수도에 가기 전에 알버트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부엌을 빌려 간단히 감자국을 만들었다. 탑에서 먹던 것 그대로.
먹을지 안 먹을지는 알버트가 결정할 사안이지만 가기 전 그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알버트의 상태는 어제보다 훨씬 심해져 있었다. 그레텐은 그의 곁을 지키며 지극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그레텐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가 나를 보고서 낯빛이 새파래졌다.
“…그, 저하께 말 들었습니다. 저하를 모시고 있다고… 어제 그런 행동을 해 미안합니다.”
잘못을 쉬이 인정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알버트의 말이 무섭긴 했던 모양이다. 그러게 어제 그냥 들여보내 주지.
“먼저 사과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아무리 알버트의 말이 있었어도, 저 나이대의 사람이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게 쉬운 법은 아니다.
“점심 전까지는 저와 제 고양이가 여기 있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 당연하지요. 그럼 난 이만….”
어제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레텐이 방을 나섰다. 방에 나와 알버트만 남았다.
누워서 끙끙거리고 있는 알버트에게 다가선 나는 그를 유심히 보았다. 이렇게 심각하면서 나를 수도로 올려보내려 들다니.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망설이다 알버트의 손을 잡았다. 내 쪽에서 먼저 접촉을 하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알버트가 그제야 나를 눈치채고는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렸다. 그의 눈 밑에 드리운 그늘이 지독히 깊어 보였다.
나를 보는 눈빛이 흠칫 떨렸다. 의아함을 담고서, 그가 헐떡이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네 앞에서는 항상 병약한 모습만 보이는구나.”
“제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걸요. 그리고 왕자님은 병약하다 표현하기에는 몸이 너무 좋은 편이세요.”
진짜 그랬다. 그가 아픈 건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순간이고, 그 순간은 나와 항상 맞닿아 있었다.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알버트가 대단할 뿐이다.
나는 그의 손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올렸다.
알버트가 날 응시하고 있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
“왕자님, 저 수도에 가서, 말씀해 주신 드래곤의 마지막 순간을 보며 열심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
“제가 지금 하는 생각이 순간의 충동인지, 아니면 후회하지 않을 만큼 굳건한 결심인지.”
“…….”
“이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는 저를 이해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고요. 왕자님은 제게 언제나 고맙고, 아름다운 분이세요.”
알버트의 행동은 언제나 내 안위를 위한 것임을 안다. 그래서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왕자님은 좋은 분이세요.”
그가 잘생겼다는 말은 매번 했지만,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외모에 대한 칭찬은 쉽지만, 본질에 대한 평은 어려운 법이다.
내가 잡은 손을 꽉 말아쥐는 알버트의 눈꼬리가 휘었다. 검은 하늘에 나타나는 초승달처럼 곱다. 만족스럽다는 듯 짓는 미소가, 나는 좋다.
“넌, 내가 제대로 화도 낼 수 없게 만들어.”
“…….”
“때로는 그런 네가 밉다. 하지만 네가 여태 한 칭찬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었어.”
알버트가 내 손을 그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어….”
내 몸이 중심을 잃고 그의 몸 위에 엎어졌다. 그에게 안기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잘 다녀오거라.”
알버트가 쥐고 있는 내 손이 그의 심장께에 가까워졌다. 쿵. 쿵.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것과 비슷한 맥박으로, 그의 온몸이 진동한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세상에 나와 그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순간 탑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로제.”
그의 심장 소리와 비슷한 목소리로 알버트가 말했다.
“난 때로… 내가 너와 계속 그 탑에 갇혀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어쩌면, 그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네가 그걸 싫어할 걸 알지만, 내게는 그 평범한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해졌거든.”
알버트의 눈빛이 바닷속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시간을 만들어준 네가 제일.”
알버트의 고개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가 내 목덜미를 자연스레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얼굴에 흐르는 땀이,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그를 절박해 보이게 했다.
평소의 여유가 보이지 않는 얼굴이 낯설었다.
“그러니 넌 죽을 수 없다.”
그건 내게 내리는 명이 아니었다. 그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맹세하듯 다짐한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았다. 나를 갈구하듯, 그가 나를 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은 누구도 계약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서로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서로를 밀어낼 수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