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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48화 (48/156)

48화.

“믿을 수 없다면 직접 말해주도록 할까. 내가 퍼뜨리고 있는 소문에 대해서.”

그레텐의 멍한 얼굴을 보며 알버트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가족에게 살해 위협을 받았던 가련한 왕자는 몇 번이나 죽고 싶어 했다더군.”

로제의 앞에서는 돌에 깔린 것처럼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그레텐 앞에서는 너무도 쉽게 열렸다.

그도 알았다. 이 사실을 말한다 해서, 로제가 자신을 다르게 대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 성정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할 생각이란 뻔한 것 아닌가. 자신을 향한 말이 진심일 것을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울어줄 것을 알면서 그 눈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그녀가 저 자신을 알길 원하지만,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알았으면 하면서, 이런 부분은 숨겨지길 원한다.

모든 사람에게 동정을 사고, 제 이야기를 헐값에 팔아도,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때로 그녀를 놀리고, 가끔 음식에 놀라기도 하고, 눈치 빠르다며 불평을 듣는. 외양은 봐줄 만한 왕자, 알버트 그레이로.

붉은 눈동자는 핏빛처럼 반짝였다. 머릿속에서 그의 앞에 기우뚱 쓰러지던 형의 모습이 스러져 갔다.

알버트의 목소리가 방 안에 고요히 울렸다.

“거의 미친 채 혼자 살아가던 불쌍한 왕자를 꾀어 성으로 데려간 왕은, 그가 갈구하던 애정 대신 증오를 심어주었다고 해.”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바뀌는 말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고저 없는 음성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왕자가 제 자리를 탐낼까 두려웠던 왕은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탑에 그를 가뒀고, 왕자는 자신이 다시 믿었던 유일한 사람에게 배신당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던데?”

“…….”

“이제 그 왕자가 타락한 왕을 끌어내고 제 자리를 찾으려 한다더군.”

그레텐이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며 알버트가 빙그레 웃었다.

“어때, 완벽한 소문 아닌가? 적당히 섞은 진실과 허구는 소문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지.”

“…….”

“내 잘난 낯짝도, 그들의 동정심을 사고 내게 서사를 부여하는 데 보다 큰 힘을 줄 테지.”

알버트는 그레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덜덜 떠는 노인의 어깨를 느리게 토닥였다.

“그대가 특별하다는 착각은 버려.”

“…….”

“내가 그 사실을 여태 밝히지 않았던 건, 그대에게 오만한 착각을 심어주기 위함은 아니었거든.”

얼굴에 남아 있던 미소의 흔적을 전부 지운 알버트가 그레텐의 귓가에 속삭였다.

“언제 또 내 이름을 들먹이며 사람들을 조종하려 들지 어찌 알겠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레텐은 뼈가 부러질 듯한 아픔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가 원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라 믿고 싶어.”

“…….”

“그러려면, 앞으로 행동으로 보여줘야겠지.”

“…….”

“그대가 넘은 선을 다시 지키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할까.”

자리에서 일어난 알버트가 그레텐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의 손가락이 까닥였다. 그레텐은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

한편, 알버트의 방을 나선 리암은 슈버트가 머무르는 방으로 향했다. 슈버트는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고 있었다.

“어, 공작님.”

슈버트가 손을 흔들며 리암에게 뛰어왔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저하께서 새 명을 내리셨다.”

“저하께서?”

슈버트는 소년다운 청량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갈색 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이 반짝였다. 알버트는 그에게 항상 존경의 대상이었다.

리암은 그에게 이번 임무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슈버트의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그러니, 네가 직접 드래곤을 예프넨 후작의 저택에 숨겨야 한다.”

“…드래곤을 직접 만져야 하는 건 그렇지만, 숨어드는 건 마음에 든다.”

슈버트가 씨익 웃었다.

“남작위에다가 기사 작위에 깔려 죽기만 할 줄 알았다고.”

로제의 앞에서 보였던 진중한 척 내뱉던 말투는 없었다. 리암이 그를 타이르듯 엄히 말했다.

리암이 공작위를 물려받기 전, 그리고 슈버트가 남작위를 받으며 귀족 사회에 들어가기 전까지 둘은 격의 없이 서로에게 반말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슈버트는 리암에게 지위 낮은 귀족이 아니라 동생과도 같은 존재였고, 슈버트에게도 리암은 혈육 없는 그에게 의지할 수 있는 형이었다.

“계속 일한 사람처럼 말해 지적하는 건데, 지금도 본래 임무는 땡땡이치고 있거든, 넌.”

“그, 그건….”

리암의 가차 없는 지적에 슈버트는 찔린 얼굴을 했다.

“그동안 일 열심히 했잖아!”

슈버트가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알버트를 위해 예프넨 후작의 측근 중 하나였던 베르젠 남작의 양아들로 들어간 슈버트는 부부의 죽음을 사고사로 위장한 후, 기어코 남작의 자리까지 물려받았다.

알버트가 구해준 이후부터 암살이 주가 되었던 슈버트의 일 처리는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 후, 슈버트는 알버트의 완벽한 반역을 위해 기사단 입성까지 자진해 그쪽의 소문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 슈버트에게도 고민이 하나 있었으니….

자신의 우상이자 구원자인 알버트 그레이를 만나지 못한다는 거였다.

알버트가 어릴 적 자신을 구해준 이후로, 슈버트가 그를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다. 알버트에 대한 책을 읽거나 남작의 신분으로서 그를 먼발치서 보는 게 다였다.

그나마도 알버트가 탑으로 들어가게 되며 아예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우연찮게 저번에 알버트와 만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직접 만난 자신의 우상은 생각보다 더 완벽한 사람이었다. 매일 곁에서 모셔도 될 만큼!

그래서 이번에 알버트가 다시 북부에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 지병과 온갖 핑계를 다 대가며 북부까지 내려온 참이었다.

슈버트가 우울한 얼굴로 답했다.

“이번에 올라가잖아. 그것도 그렇고… 나 말투는 좀 바꾸면 안 돼? 묵묵한 남작 설정은 좀 피곤한데….”

평소 슈버트의 말투가 귀족들의 말투와는 너무 다른 만큼, 연기는 필수였다. 묵묵하고 과묵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그가 남작을 살해하지 않았을 거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을 심어주기도 했다.

“평소에도 계속 쓰지 않으면 너도 모르는 사이 그런 말투가 튀어나올 거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말투도 썩 어울리던데.”

“…장난이지?”

슈버트가 잘못 들었다는 듯 귀를 후볐다.

평소 귀족들에 대해 잘 모르는 그가 그나마 편히 따라 할 수 있던 건 형처럼 여기는 리암의 말투였다. 딱딱하고 과묵한 설정과 딱 맞는 귀족적인 말투.

하지만 제 진짜 모습과는 전혀 달라서, 말하는 중간에 몸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아니 진심인데. 내 말투 따라 하는 게 썩 잘 어울리더군. 이참에 건달 같은 말투는 고치는 게-”

온몸에 돋은 소름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던 슈버트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가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공작님, 앞으로 휴가 안 낼 테니까 그런 말은 안 하면 안 될까요?”

“알았으면 되었고.”

리암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슈버트가 고개를 숙이며 힘차게 인사했다.

“네에, 알겠습니다. 공작님, 이번 일도 저하께 잘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출발은 하루 뒤니까 그 전에 새끼 드래곤의 상태를 확인하고 오거라.”

“으으, 알겠어.”

파충류를 무서워하는 슈버트로서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명이었다.

“아, 하나 더 말해줄 사실이 있다.”

“뭔데? 빨리 나가봐야 하는데.”

“네가 요즘 같이 놀던 고양이.”

“그 하녀가 데리고 온 고양이?”

슈버트는 행복한 듯 미소 지었다. 머릿속에 아까 전까지 같이 있다 온 고양이가 떠올랐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그는 큰 저택을 사 고양이들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진짜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

해맑은 슈버트를 보며 리암이 안타깝다는 듯 흠, 소리를 냈다. 슈버트가 불안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리암은 안타까운 얼굴로 그에게 사실을 고했다.

“새끼 드래곤이라더군.”

“…뭐?”

“저하께서 말해주셨으니 틀림없다.”

드래곤을 파충류라 하긴 뭐하지만, 리암은 슈버트가 드래곤의 사진을 보고서 기겁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저런 피부를 가진 동물하고는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다면서.

“…내, 내가 쓰다듬고 만졌… 는데….”

슈버트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타깝군.”

제 주군처럼 심드렁한 얼굴로 답한 리암은 바로 방을 나섰다. 리암이 나간 후에도 슈버트는 넋을 놓은 채, 자리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

나는 새벽에 알버트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가 단단히 화난 얼굴로 오지 말라 말했기 때문이다. 직접 가도 알버트의 화를 풀어줄 수 없으니 차라리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맞을 듯했다.

그와 이렇게까지 대립한 건 처음이라 그런지 잠을 설쳤다. 새벽에 눈을 뜬 나는 옆에 곤히 잠든 하양이를 응시했다.

부모님을 잃고 난 이후, 누군가에게 정을 주는 것이 무서웠다. 반려동물도 언젠가 나를 떠나갈 거라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회사 다니면서 나 혼자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반려동물에게 제대로 사랑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이제는 알 것 같다. 친구들이 왜 내게 반려동물을 키우라 했었는지. 나중에 헤어질 거란 두려움보다 함께한 추억이 내 인생에 훨씬 값진 것으로 남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알버트가 한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통에 약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내가 새끼 드래곤의 계약자가 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나도 나를 믿을 수 없는 지금, 드래곤으로 인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볼 기회가 생긴 건 행운일지도 모른다.

내가 살릴 수 없는 생명이 이용당하는 것을 보는 것이 불편한 마음도 있었고, 이게 과연 옳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원래 삶이란 그랬다. 불확실한 것이 더 많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래도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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