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드래곤 새끼의 계약자가 되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후, 알버트는 로제와 이야기를 계속해 봤자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사람을 너무 빨리 읽는 것도 탈이었다.
계속 심해지는 고통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것도 한몫했다. 그는 남에게 제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흐….”
로제를 방으로 돌려보낸 알버트는 그제야 온몸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에 신음했다.
고통은 한 번도 익숙해진 적 없었다. 제 온몸이 불구덩이에 들어가 불타는 것 같았다. 매 순간 뼈가 쪼개지고 다시 붙는 기분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으로 시작했었다.
사람의 목숨이 생각보다 훨씬 질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나마 다행인 건, 마법으로 방음을 해두어 신음을 참을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계약자가 되는 고통은 이를 초월한다고 알고 있었다. 해서 그는 로제의 생각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흑마법도 못 이겨내면서 무슨 계약자가 되겠다는 건지.’
같이 지낸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 드래곤 새끼에게 정을 붙인 건지.
‘직접 느끼게 해준다면 달라지겠지.’
시각적인 공포는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의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는 순간처럼.
보통 사람처럼 살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탑에 갇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계약서를 들이밀기 전까지는.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잠드는 시간. 그에게 지옥이어야 했을 시간은 오히려 그에게 삶의 의미를 선사했다.
생에 소중한 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제때 행동하지 않는다면, 과거를 곱씹으며 덩그러니 남겨질 뿐이다.
어린 시절, 멍청했던 제 자신처럼.
***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무렵, 리암이 알버트의 방을 찾았다. 알버트가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방에 들어온 리암은 알버트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고통 속에서 희미한 정신을 부여잡은 알버트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그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드래곤 새끼는.”
“헤텐도르에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파견했던 마법사의 보고에 따르면, 조금 전 울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를 터트리는 건 드래곤이 죽을 날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청색 드래곤인데, 생각보다 훨씬 협조적입니다. 예프넨 후작의 사람들에게 복수할 기회라 여기는 모양입니다.”
“세상 물정을 아는군.”
누구랑 다르게. 알버트는 로제의 곁에 찰싹 붙어 있던 하양이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잠만 자고 살았다는 게 대단할 지경이다.
“복수는 무슨 소리지?”
“거의 500살이 다 되었었는데, 예프넨 후작에게 공격당했던 모양입니다.”
“안타깝군.”
알버트가 무심히 대꾸했다.
드래곤은 과거와 차원을 넘나들며,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그런 드래곤의 수가 많아지는 건 이쪽에서도 사양이었다.
“예프넨 후작이 또 그 욕심을 제어하지 못했나 보아.”
“예, 그런 듯합니다. 이번에 가서 고문할 마법사들과 예프넨 후작이 서로 거래한 흔적도 있었고요.”
예프넨 후작은 현왕인 로스투라투의 최측근이었다. 마법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마나가 부족해 되지 못한 케이스로, 거의 반신이 될 수 있게 해주는 드래곤에 대한 욕망이 엄청난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드래곤 새끼의 운명이란 뻔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반역을 앞당길 좋은 기회입니다.”
알버트는 드래곤이 일으킬 재해로 예프넨 후작의 피해를 극대화시키고, 로스투라투와의 사이를 이간질할 작정이었다.
“그러라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네게 추가로 내릴 명이 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말씀해 주신 소문은 변두리부터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
소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알버트는 곧바로 로제를 떠올렸다. 제가 싫다 하자 말하지 않아도 된다며 다독이던 얼굴을.
그 상냥함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알버트는 얼굴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로제 아티어스를 수도에 데리고 가 직접 보여주거라, 그 재해의 현장을.”
“…예?”
리암이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 하녀를 수도에 데리고 가는 것도 모자라 초토화될 현장에 데리고 가라니.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짤막하게 리암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드래곤의 계약자가 되려고 해.”
“…그렇습니까? 탑에 있던 이가 무슨 수로….”
“함께 다니는 고양이가 드래곤 새끼다.”
“아아….”
리암은 말을 천천히, 신중하게 골랐다. 그는 도서관에서 로제와 마주쳤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티를 내면 알버트가 사실을 유추해 낼 위험이 있었다.
그 하녀, 로제 아티어스와 그가 서재에서 만났고, 도망치는 데 협조하겠다는 말을 나눴다는 것을.
그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누구보다 완벽한 왕좌에 올라야 할 알버트 그레이의 곁을 제 발로 떠나준다니.
“직접 겪지 못한 고통보다… 그 드래곤 새끼와 헤어질 상실감이 더 크다 하더군.”
알버트는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며 전신을 강타하는 고통에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나 리암과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목소리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 사람이 지옥불에 걸어 들어가겠다는데, 그 정도는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
나른히 웃는 얼굴은 사람이 넋을 잃게 만들었다.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법사로서, 인간으로서 한계를 초월할수록 알버트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초연한 분위기가 났다.
리암은 놀랐다.
슈버트가 매일같이 놀아주는 고양이가 드래곤이라는 사실보다, 그 로제라는 여자가 드래곤의 계약자가 될 결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책을 읽었다면 계약자가 어떤 의미인지 알 것이 분명한데도, 자신의 사람, 아니 드래곤을 지키려는 듯한 행동이 인상 깊었다.
‘생각보다는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군.’
이번에 알버트의 품에 안겨 나타나 바닥까지 추락했던 로제에 대한 신뢰도가 서재에서의 대화에 이어 한층 올라갔다.
“알겠습니다.”
물론 그것과 로제를 알버트의 곁에 두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둘의 사이가 미묘했다. 본래 제 사람들을 잘 챙기는 알버트지만, 그의 행동에는 언제나 벽이 있었다.
한데 그 벽이, 로제를 대할 때는 희미해졌다.
알버트는 본래 세력이 없는 고아에 가깝다. 그런 그에게 하녀 왕비라는 멍에를 씌울 이유는 없다.
애초에 결혼은 서로의 이해하에 하는 새로운 계약에 가깝다. 알버트를 향해 기꺼이 계약서에 사인할 영애들은 널려 있었다.
신하는 주군을 위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리암은 자신의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알버트의 미움을 받게 된다 해도, 그게 알버트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돌아오는 시간은 나와 맞추면 되겠구나. 드래곤 새끼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내일 떠나는 것으로 하고, 돌아오는 시간은 주말로.”
알버트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흑마법에 대해 물어볼 마법사들을 고문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로제가 방에 오지 않도록 어떻게 꾀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일이 잘 풀렸다.
이번 기회에 수도를 구경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러면, 그 드래곤 새끼에게 굳이 목맬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릴 것이다.
그가 봐온 로제는 제 목숨이 소중한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게 처음 계약서를 내밀었던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였지.’
자신이 탑을 나가는 순간 목숨을 잃을 것을 알고 계약서를 들이밀던 순간이 생생했다. 그전과 완전히 달랐던 모습.
로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중에 말해줄까.’
로제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한번 짚고 가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깊이 생각에 잠기니 생각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바뀐 그녀는 묘하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어릴 때 만났던….
생각에 잠긴 채 고통을 억누르기 위한 심호흡을 이어가던 알버트의 귓가에 리암의 딱딱한 목소리가 울렸다.
“알겠습니다. 준비 마친 후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리암이 물러갔다.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알버트는 밀려오는 두통에 짜증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방에 들어올 만한 인물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레텐.”
“와, 왕자님. 너무하십니다. 어제 그렇게 저를 내보내시다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들어온 그레텐은 부리나케 알버트의 수건을 갈았다. 알버트는 그레텐의 손을 그대로 쳐냈다.
“그대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생각 못 하는 모양이군.”
“…그 아이에게 그만큼 마음을 주셨을 줄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앞으로 그런 말투는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레텐의 말에 알버트가 눈썹을 올렸다.
“사과가 그게 전부인가? 난 날 전부 안다는 듯 행동하는 그대에게도 화가 났는데 말이야.”
“…….”
“어릴 적 내 모습을 보았다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자부하지 말거라, 그레텐.”
“저하, 하지만….”
“어차피 이제 전 국민이 알게 될 사실이니.”
땅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 들며 울상을 짓던 그레텐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예?”
“아직 리암이 말해주지 않았나 보군. 이미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네가 너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내용에 대해 말이다.”
“…그, 그것에 대해서요? 왕자님, 하지만 그건 계, 계속 숨겨야 할 치부… 입니다.”
그레텐이 말을 더듬었다.
자신을 알버트의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특별하다 느끼게 했던 알버트의 과거.
신성한 왕이라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흠이다.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레텐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왕자님, 안 됩니다. 제가 숨겨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숨기셔야 합니다. 그건 저주 같은 겁니다. 저주요. 신께서도 아시면 노하실 겁니다. 그러니 꼭-”
미친 사람처럼 말을 잇는 그레텐을 보며 알버트가 눈꼬리를 휘었다.
그래, 이게 그에게 익숙한 환경이 아니던가.
그에게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진 유모.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 여기며 모욕하던 왕. 숨 쉬는 것조차 무겁게 느껴지던, 그게 평범함의 정의인 줄 알았던.
그런 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