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나는 저들의 동정심을 살 거란다.”
“…….”
“사람들은 저 높이 있던 사람이, 사실은 저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걸 깨달을 때 꽤 너그러워지거든.”
그가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을지 가늠이 갔다.
로스투라투는 알버트 그레이를 업신여겼다. 알버트가 그만큼 쥐 죽은 듯 살며 그 자신을 낮춘 것도 있었지만, 로스투라투가 그의 불행한 가정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혈육을 저버린 채 부와 명예만 좇다 목숨을 잃은 형제들 사이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어린아이.
귀족들 사이에서도 쉬쉬하던 이야기였기에 사람들 사이에 제대로 풀린 적은 없었다.
“네게 더 오래 완벽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이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내가 알길 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어차피 소문으로 듣게 될 사실이라면, 지금 굳이 그를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만큼 그가 괴로워할 사실이라면.
“왕자님께 강요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알버트가 이렇게 행동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걸 아니까.
알버트가 가만히 웃었다.
“고맙구나.”
그릇이 비었다. 나는 트레이를 치우며 알버트를 조심스레 살폈다. 알버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다른 곳을 응시하는 모습은, 겨울이 찾아온 북부와 퍽 잘 어울렸다. 이야기하지 않을 때 알버트의 얼굴은 서리가 내린 것처럼 차갑기 때문이다. 온기라곤 없는 회색 머리카락도 한몫하는 것 같고.
욕실에서 차가운 물을 받아온 나는 수건을 물에 담갔다. 첨벙. 대야에 담근 수건을 짜는 나를 보며 알버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내게 다른 궁금한 것은 없느냐.”
“…으음, 여쭤봐도 되는 걸까요?”
“답해줄 수 있는 것이면 답해줄 터이니 물어보거라.”
어두워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걸까, 알버트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미소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넘어가기로 한 건, 이야기를 할 때 그의 표정이 그만큼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왕자님 유모보다 왕자님을 더 잘 알려면, 꽤 질문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나는 활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더 좋구나. 앞으로도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보거라. 물어봐도 되는 걸까 고민하면서 속으로 끙끙 앓지 말고.”
“…티 났어요?”
“네가 티를 냈다기보다는 내가 잘 읽었다는 게 맞겠지.”
알버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안쓰러웠던 것도 잠시, 약이 올랐다.
“왜 고민했는지 아시면 그렇게 말 못 하실 텐데.”
나는 일부러 더 투덜거리며 비스듬히 누운 알버트의 이마에 물수건을 얹었다.
“고백을 받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여지를 주는 건 아닌지 두려운 거겠지.”
와, 진짜. 등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자님, 정말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마법으로 사람 마음도 읽을 수 있나요?”
“없다. 마음을 읽는 건 애초에 마법으로 될 만한 일이 아니지 않더냐.”
난 정말 100퍼센트 진지했는데. 내가 대단한 농담이라도 던진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알버트를 보니 민망했다.
소리 내어 웃던 알버트가 눈을 가볍게 흘기는 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크흑, 소리를 내며 웃음을 참는 알버트를 보며 나는 물에 담근 여분의 수건을 열심히 짰다.
“이게 여지를 주는 거라 생각하지 말거라. 어차피 서로에 대해 계속 모르면서 지낼 수도 없는 일 아니냐. 나도 네게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때그때 묻고 싶고.”
“…….”
“사람 대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다.”
나는 알버트가 입에 꿀을 바른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완벽한 이유로 나를 설득할 수 없다.
“왕자님, 요즘은 왕자님의 외모보다 말솜씨가 더 대단한 것 같습니다.”
“칭찬인지 아닌지 모르겠구나. 네가 눈이 높아진 모양이지.”
“왕자님께서 너무 잘생기신 탓에… 그런 이유도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인정했다.
항상 일은 알버트가 원하는 쪽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없어서 그런지 나쁘진 않다.
나는 수건을 들어 그의 목 주변에 남아 있는 땀을 닦았다.
“으음… 옷을 갈아입으시겠어요?”
“조금 이따 갈아입도록 하마. 그러고 보니 마법과 드래곤에 대한 책을 찾는 건 잘 되었느냐?”
“아, 네. 다 찾았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가 눈을 크게 뜨더니 반갑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마법은 이론만으로 어렵다 치지만… 드래곤에 대해 찾아봤다면 알겠구나.”
“…….”
“네 곁에 있는 드래곤 새끼가 겪게 될 일을.”
알버트가 냉정히 말한 현실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는 내가 드래곤에 대해 찾아보길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하양이를 들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양이가 알버트를 무서워하긴 하지만 말도 잘 따르고, 걱정도 해줬는데. 내가 작게 꿍얼거렸다.
“언제는 하양이라고 칭하시더니… 드래곤 새끼가 아니라 새끼 드래곤 쪽이 나은 것 같은데.”
드래곤 새끼는 이상하게 욕하는 것 같단 말이다.
혼잣말이긴 해도 알버트에게 들리지 않았을 리 없지만, 알버트는 내 말에 답하는 대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언제쯤 내보낼 참이냐, 저 드래곤 새끼는?”
이 이야기는 피하려 했는데, 알버트가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알버트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면 하양이와 생이별을 할 것 같단 예감은 들었지만,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사실 계약자가 될 수 있는 쪽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라고 말하면 서늘한 눈으로 하양이를 냅다 버릴 것 같은 직감이 든다. 아니, 이건 직감이 아니라 확신이다.
내가 답하길 망설이자 알버트가 찬찬히 말을 이었다.
“네가 꽤 의지하는 것 같아 가만히 있었지만, 로제. 이제 밖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도 만나게 될 테고, 굳이 그것에게 관심을 주지 않아도 된다.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그 와중에 내가 하양이를 들였던 이유를 완벽히 파악했군. 하긴 처음에 싫어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까지 참아준 것도 대단하긴 했다.
“알고 있지 않으냐. 드래곤 새끼들의 이야기도, 죽을 때 주변에 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공포심을 자극하는 말에 몸이 움찔했다. 날 파악했다면, 내가 무얼 무서워하는지도 알았을 터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위하려는 행동임을 안다. 나도 하양이와 계속 함께하는 게 내게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왜 답하지 않는 게냐?”
하지만 알버트의 재촉에도 입술은 굳게 다물렸다.
“로제.”
뭐라고 하지?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알버트가 이 문제를 계속 파고들 테고, 내가 여기서 상황을 모면하겠다고 하양이와 헤어지겠다 하며 잘되었다 말하며 바로 하양이를 버릴 것 같단 말이다.
“로제?”
나를 재촉하는 말에 결국 입이 열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인지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 나왔다.
“하, 하양이와 계약자가 되는 게 정말 그렇게 위험한 일일까요?”
“…뭐?”
알버트가 내 말에 멍한 얼굴을 했다.
비스듬히 누워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고, 이마에 놓여 있던 물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지만.
순식간에 싸늘해진 얼굴을 보며 나는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넌지시 운만 떼려고 했는데 방에 들어오기 전 하던 생각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시간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정말 아무 말이나 하게 되는구나. 한숨을 내쉰 나는 몸을 숙여 물수건을 집었다. 숙인 고개 위로 알버트의 목소리가 무섭게 들이쳤다.
“로제.”
결국 나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물수건을 트레이 위에 올려놓은 나는 그의 맹렬한 시선을 슬쩍 회피하며 입을 열었다.
“저 계약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하양이랑 계속 지내다 보니… 책에 쓰여 있는 고통보다 하양이와 헤어진다는 게 더 현실감 넘치게 다가오는걸요.”
“…….”
알버트의 침묵이 지금처럼 무섭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나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제가 마법을 배울 수도 있잖아요. 알고 보니 제가 엄청난 마법사여서 1년 안에 저도 모르는 엄청난 재능으로 계약을 완벽히 끝낼 수도 있는 일이고.”
“…….”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침묵하는 알버트를 보는 건 상상 그 이상의 공포였다.
“왕자님, 저 너무 무서워서 그런데, 한마디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알버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속삭이듯 무언가 중얼거린 알버트의 손으로 내가 아까 전 가져왔던 책이 쏙 들어갔다.
“아무래도 네가 책을 제대로 못 읽은 모양이구나.”
알버트가 책을 펼치더니 내 앞에 드래곤의 계약자에 대해 적혀 있는 부분을 들이밀었다.
내용이 알버트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는 내 쪽으로 책을 돌린 채 내용을 술술 읊었다.
“계약자의 육체는 고통을 그대로 받아낸다. 이 과정에서 사람마다 다른 고통이 찾아오게 되는데, 이 고통은 드래곤이 완전한 성체가 되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 지속된다.”
아까 전 내가 읽었던 것보다 훨씬 자세히 적혀 있는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알버트는 이 책을 달달 외웠던 모양이다.
“…그래도 여기 밑에 이 고통을 모두 이겨내면, 드래곤의 계약자답게 반신에 가까운 몸을 가지게 된다.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 라고 쓰여 있는데요.”
내가 반박하자 알버트가 바로 되받아쳤다.
“성체 드래곤으로 성장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조차 요청할 수 없도록, 외딴곳에 떨어진다는 말도 있다.”
음, 하양이에 관한 일은 알버트와 내 의견 차이를 좁힐 수 없을 듯했다.
책을 접은 알버트가 날 보며 턱을 괴었다.
“불구덩이 속으로 직접 네 자신을 밀어 넣는 건 차마 못 보겠구나.”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닌데요.”
“아무래도 직접 경험하는 것이 낫겠지.”
“…네?”
알버트의 눈이 위험스럽게 휘었다. 초승달 같은 그 모양새가 마치 불행의 서막을 알리는 것 같았다.
“죽어가고 있다는 드래곤 새끼가 있다. 직접 보고 오거라. 그 주위가 얼마나 초토화되는지. 그건 네가 느껴야 할 고통의 일부밖에 되지 않을 테지만.”
“왕자님, 전 왕자님을 혼자 둘 수 없고….”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명이다.”
내가 거부할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