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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45화 (45/156)

45화.

“너도 약속을 어겼지 않으냐.”

자신의 행동에 변명을 갖다 붙이는 알버트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내가 그의 스킨십을 매번 받아들이는 것을 알면서, 그는 매번 내 허락을 구했다. 이쯤이면 계약을 잊어버릴 법도 한데, 그는 항상 나를 살폈다.

내 심장박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내 대답을 기다리며 숨을 내쉬는 알버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까지 느리게 재생하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보다 입을 뗐다.

“왕자님, 전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했어요.”

“최선의 말이라.”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지만, 전 실제로 왕자님에 대해 아는 게 많은 듯 없잖아요.”

그대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평소처럼 알버트의 기분에 맞추어, 잘못했다 말하고 그의 말대로 하겠다고 아부를 해도 그만이었다.

그는 왕자고, 나는 하녀라는 1차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서로의 가치관이 부딪히는 건 생각보다 감정 소모가 심하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굽히고 들어갈 수는 없다. 그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가 아는 내가 정말 내 자신일까, 하는 의문도 들고.

나는 소중한 가족을 떠나보낸 후,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다. 그게 타의든, 자의든 간에 내 삶의 일부였던 사람을 보내는 건 힘들다.

사회생활을 할수록 방어적인 태도가 되고 이해득실을 따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경험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든다.

알버트의 눈동자가 화악 커졌다. 동공을 채우는 붉은빛이, 마치 막 피어나는 장미 같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

“평소처럼 웃으며 넘어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다며 넘어갈 줄 알았던 알버트는 바로 내 말을 부정했다. 내가 고개를 올리자 알버트의 눈꼬리가 휘는 것이 보였다.

방금까지 서운해했던 게 풀린 것처럼.

…대체 어디서?

“죄송해하지 말거라. 나는 이쪽이 더 좋거든.”

“…이게요?”

“네가 네 의견을 내보이던 순간이, 내가 반했던 부분이니까.”

알버트가 내 턱을 유리 공예품 다루듯 섬세하게 그러쥐었다. 검지로 내 턱을 어루만지면서, 그가 속삭였다.

“네 말대로야. 시간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지. 해서 나는 질투를 하였다.”

“…….”

“네가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의 말은 바람처럼 흘러와 가슴 가득 뻐근히 들어찼다.

“내 유모가, 널 아무 말 없이 쫓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는 사실에.”

“…….”

“그리고 네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고,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에.”

마지막 말을 끝낸 후 내쉬는 한숨이 마치 담배 연기 같다. 나는 지금 체포당한 범인처럼 허를 찔린 채 그를 멍하니 응시했다.

반쯤 눈을 감은 알버트의 속눈썹이 팔랑였다.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라고 해놓고, 내 꼴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제가 잘못했는걸요.”

“몸이 힘드니, 생각도 조급해지는 모양이야.”

나는 양손을 올려 내 턱을 쥐고 있는 그의 손 위를 감쌌다. 두 손으로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그의 손은 나와 전혀 다른 골격을 실감케 했다.

“제가 있었어야 했잖아요. 약속은 지켜야 했는데, 잘못 생각했어요. 왕자님께서도 그렇게 말하셨으니까.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내가 잘못한 부분은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좋다. 실수는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실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다.

비장한 눈으로 그를 보며 결심을 되새기자, 알버트가 침묵하다 중얼거렸다.

“마치 내게 보고서를 올리는 신하 같구나.”

“…그쪽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내가 네 턱을 그러쥐고,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느냐?”

“…한두 번 하신 것이 아니니 익숙해지려 하고 있습니다.”

“저런,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피식 웃은 알버트가 내 목을 감쌌다.

“네 심장이 뛰었으면 해서 하는 거거든.”

힘을 주지도 않은 것 같은데 순식간에 그가 가까워졌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모습, 풍기는 분위기에 직감했다.

키스한다.

내 아랫입술에 그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찰나의 감촉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하지만 알버트는 거기에서 멈췄다. 살짝 닿은 접촉 후에, 내 목덜미를 잡은 힘이 느슨해졌다. 그가 다시금 내쉰 한숨이 내 입술 위에 뜨겁게 내려앉았다.

토마토처럼 변한 얼굴을 보며 알버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람을 이리 조급하게 만들고서, 넌 너무 차분한 것 같아 억울했다.”

“…….”

“계약 내용은 잊지 않았어. 그러니 심술은 여기까지 해야겠지.”

봄바람에 떠도는 아지랑이처럼, 알버트가 부드러이 말했다.

내 목덜미를 잡았던 손이 사라지고, 턱을 쥐던 손도 풀렸다. 그의 얼굴이 멀어졌다.

침대 위쪽 벽에 기대어 앉은 알버트를 보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 키스 안 했는데.

안 했는데 왜 아쉽지? 나는 그의 입술이 남기고 간 촉감을 되새기다 눈을 부릅떴다.

세상에, 내가 미쳤어. 알버트를 밀어내야 하는데 키스 못 했다고 아쉬워하고 있다니! 내가 미쳤다!

더군다나 나는 그의 수족인 리암에게 도망치는 걸 도와달라고까지 했던 참이다. 이런 생각은 옳지 않다.

진정하자. 나는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다.

“아쉬운 얼굴이구나.”

“아뇨!”

알버트의 말에 나는 즉각 답했다.

“대답이 너무 빠른데. 마치 찔린 사람처럼.”

…저 왕자님은 나를 완벽히 파악한 게 틀림없다. 나는 그를 흘끔 쏘아보다 내 손안에 느껴지는 수저의 존재를 상기했다.

아, 나 병간호하러 온 거였지.

그래, 병간호나 열심히 하자. 한숨을 푹 쉰 나는 아직 따듯한 수프에 수저를 넣고 휘휘 저었다.

자리에 일어난 나는 트레이를 알버트 앞에 내려놓았다. 알버트의 시선이 수프가 담긴 그릇에 꽂혔다.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숙였다.

“먹여주길 기다리고 있단다.”

“…알겠습니다.”

오늘 내가 잘못한 게 얼마던가. 이 정도는 알버트에게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의자를 당겨 가까이 앉은 후, 수저를 들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수저를 조심스레 그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알버트가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유모님은 어디 가셨어요?”

“저녁 먹고 머리 좀 식히고 오라 내보냈다.”

“아, 그렇구나.”

“리암도 그레텐이 널 그리 싫어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더구나. 그래도 나를 모시는 사람이니까.”

탑에 있는 동안 유일하게 그를 돌보는 사람인 만큼, 이렇게 대놓고 멸시하며 쫓아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이해했다. 그가 봐왔던 그레텐의 모습이 전부는 아닐 테니까.

아, 그레텐의 이야기가 나온 지금이 그를 설득할 좋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와 그의 벽을 느끼게 해줄 장치처럼.

“그레텐 님의 태도도 이해되는 바예요. 저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남녀 단둘이서 탑에 갇혀 있는데 좋게 볼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넌 그걸 두려워했지.”

“네.”

내 말에 알버트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괴었다. 좋아, 설득이 통하는 것 같다. 나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저를 들었다.

그가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소문은 쉽게 퍼지지. 하지만 그만큼 빨리 선동되는 것도 사람이다.”

“…….”

“너에 대한 소문이 걱정된다면, 내가 그걸 다르게 바꿔주마.”

“나쁜 소문을 좋은 소문으로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방법을 알고 있다면 다르지.”

알버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았다. 마치 이런 일을 몇 번이고 겪어본 사람처럼, 피곤한 말투였다.

알버트의 현 상황이 떠올랐다. 맞다, 로스투라투에 의해 퍼진 소문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지. 그와 소문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의문이다.

탑에서 탈출한 후 반역을 성공시킨 알버트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같이 저녁 식사를 할 때 리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시민들의 여론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알버트는 예상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지.

“생각해 둔 방법이 있지 않으냐. 그걸 쓰거라.”

그 생각해 둔 방법이라는 게 뭘까. 본능적으로 알 것 같다. 그가 소문을 이용할 거라는 사실을.

그가 이용할 소문이 뭘까. 현재 사람들의 여론을 뒤집어놓을 수 있으면서, 로스투라투에게 타격이 갈 만한 소문.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왕자님, 저번 저녁 식사 때 말씀하신 생각해 둔 방법이라는 게, 설마 소문을 이용하는 건가요?”

내 말에 알버트가 놀란 듯, 잠시 멍하니 날 응시했다. 평소의 여유가 잠시나마 사라진 얼굴에는 고단함이 스며들어 있었다.

표정을 갈무리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알버트가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갑자기 말이 거기로 튀는 이유가 무얼까.”

“소문에 대해 얘기하실 때, 표정이 심상치 않으셨거든요. 무슨 소문을 퍼뜨리시려는 거예요?”

답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더한 불안감이 든다.

“왕자님, 어차피 퍼뜨릴 소문이라면, 저도 알게 될 거잖아요. 왜 망설이시는 거예요?”

“어차피 알게 될 터이지만.”

입을 뗀 알버트가 나를 돌아봤다. 선명한 눈동자가 흐릿해진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하지만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연유로, 소문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지.

“이 소문은 네가 제일 늦게 알았으면 좋겠구나.”

“…….”

“모두에게 밝히고 기꺼이 이용할 사안이지만 너만은 몰랐으면 좋겠다.”

가까이 다가온 알버트가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손길이 뜨거웠다.

“그게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알버트가 조용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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