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새끼 드래곤이라는 말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죽어가는’이라는 말이 핵심이었다. 알버트는 분명 드래곤끼리는 서로를 챙기지 않는 편이라 했었다.
그렇다면 만약 하양이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 외에는 도와줄 이가 없을 터였다. 그 생각을 하니 죽어간다던 새끼 드래곤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입을 뻐끔거리던 나와 리암의 눈이 마주쳤다. 그게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드래곤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긴 하군. 왜지?”
리암에게 하양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에게 하양이에 대해 말해도 되려나?
드래곤에 대해 아는 건 알버트에게 들은 게 전부다. 그리고 알버트는 드래곤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하양이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가 내가 데려왔기 때문인 것 같긴 하지만.
내가 주저하자 리암은 나를 지나치며 책장을 살폈다.
“굳이 말할 필요 없다.”
하지만 내 쪽에서 숨기는 게 있다면 리암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도 없겠지. 더군다나 나는 리암에게 도움을 청한 입장이다.
나는 솔직히 말하는 대신, 사실을 뭉그러뜨렸다.
“제가 아는 새끼 드래곤이 있어서요.”
“아아.”
내 말에 시큰둥한 태도로 짧게 답했던 리암은 이윽고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너, 마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인가. 나는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몰랐는데 그런가 봅니다.”
“제대로 각성하진 못한 모양이군. 아, 그래서 마법에 대한 책을 찾는 거고.”
“네, 그런데 드래곤에 대한 책은 왜 찾으시는 건가요?”
리암이 책장에서 1,000페이지는 족히 되어 보이는 두꺼운 책을 한 권 꺼냈다.
“새끼 드래곤이 죽을 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서다.”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알아서 확인하도록. 책을 읽으러 온 것 아닌가?”
책을 펼쳐 든 리암은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으며 나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이제 집중해서 책을 읽어야 하니 더 이상 말을 걸지 말라는 표시였다.
책을 읽을 때도 꼿꼿하고 우아한 자세를 지키는 알버트와 다르게, 리암은 턱을 괴며 반쯤 걸터앉은 자세로, 책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성안에서도 칼을 차고 다니는 걸 보면, 검사인 모양인데, 아무래도 머리 쓰는 것보다는 몸 쓰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확실히 리암의 몸이 좋긴 했다. 알버트보다는 아니지만.
그러면 알버트는 대체 뭐야…? 남주 버프인가?
엉뚱한 생각에 잠겼던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리암은 다른 사람을 시킬 수도 있는 일임에도 직접 왔다.
그만큼 확인이 중요하다는 건데.
제대로 된 답을 얻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그가 꺼낸 책 옆에 드래곤에 대한 책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세 권 정도 꺼내 테이블에 들고 왔다.
<드래곤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을 펼친 나는 삽화처럼 그려진 거대한 드래곤을 보고 놀랐다. 성을 뛰어넘을 정도로 거대한 몸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나중에 하양이도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문득 생각에 잠긴 나는, 내가 하양이가 죽는 건 상상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끼 드래곤은 약한 존재라고 했지.
하양이랑 항상 함께 있어서, 이런 건 사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탑에 나가서도 같이 있을 생각만 했었다.
책의 초반에는 알버트가 알려준 것과 똑같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가 마치 책을 통째로 외운 것처럼.
새끼 드래곤들이 죽는 사유도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는데,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500살에 가까워질수록 어이없는 이유로 죽을 확률은 낮아지지만, 500살의 생일에는 또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새끼 드래곤이 죽고 난 후, 그 시체는 주변의 마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재해를 일으킨다. 그들이 일으키는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다.
죽고 난 후 재해를 일으키는 게 그들이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라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리암은 이 정보를 왜 확인하려 했던 거지? 그는 죽어가는 새끼 드래곤이 발견됐다고 했지, 새끼 드래곤의 시체가 발견됐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이게 왜 필요하신 건가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나를 응시하던 리암이 답했다.
“저하를 위해서지. 새끼 드래곤의 죽음은 그 자체로도 왕국에 꽤 큰 파장을 일으킬 테니까. 꽤 좋은 미끼야.”
리암의 말은 가차 없었다.
“죽어가는 새끼를 살리지 않는 이유는요?”
“계약자가 없는 이상, 죽어가는 드래곤을 살리는 방법은 없다. 그리고 이건 드래곤의 숙명 같은 거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또 넘기는 것.”
우리는 저하를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뿐이지. 나지막이 말한 리암은 책을 다시 자리에 꽂아 넣었다. 그가 손에 살짝 묻은 먼지를 털며 나를 지나쳤다.
“보아하니 계약자가 될 마음은 없는 모양인데, 그럼 멀리하는 게 좋다. 죽는 순간 일어나는 재해에 휘말려 죽을 수도 있으니.”
책에서도 드래곤의 계약자가 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경고했다. 사람이 견뎌내기 힘든 고통이라고.
알버트와 똑같은 말이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처음에 하양이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500살이 되었을 때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그 전에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아주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그저 활자로 적혀 있는 고통보다, 하양이의 죽음이 더 와닿은 탓이다.
하양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 그럴 것이다.
알버트도 하양이에게 너무 마음 주지 말라 했지만… 알버트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동안, 외로움을 덜어준 하양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양이가 살았으면 좋겠다. 첫 페이지에 그려져 있던 드래곤처럼 늠름한 모습으로, 행복했으면 한다. 재해로 지나가지 않았으면 했다.
계약자라.
나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가 마법사라면, 그래서 남은 1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마법을 배워 하양이의 계약자가 된다면. 하양이는 살 수 있을까?
1년 동안 내 평생의 모든 힘을 가져다 쓴다면…?
최고의 마법 선생을 한 100명 붙이고, 잠도 최대한 줄이면?
그도 아니라면, 알버트한테 배우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난 알버트를 떠올리는 동시에, 그가 하양이를 내다 버리려 했던 모습도 떠올렸다. 계약자가 되는 것은 절대 막을 모양새였는데.
알버트에게 평생 숨길 수는 없을 테니 이야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타이밍을 잘 봐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하양이와 생이별을 할 것 같은 직감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앞에서는 웃으며 괜찮다 말하고서, 뒤에 일을 다 끝내놓을 게 이미 머릿속에 상상이 갔다.
“아, 아직 여기 계셨군요!”
심각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빨리 달려온 듯 땀에 흠뻑 젖은 시종이 웃으며 말했다.
“저하께서 찾으십니다.”
***
나는 시종의 도움을 받아 마법과 드래곤에 대한 책을 몇 권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알버트가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종의 발걸음이 아까 전보다 훨씬 빨라진 것을 보며 나는 알버트의 기분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복도를 걷던 나는 창문 사이로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나 아무것도 안 먹었네.
서재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이미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책을 읽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오래 걸린 모양이다.
나는 슈버트와 놀고 있을 하양이를 떠올렸다.
“저랑 다니는 고양이 좀 찾아주실 수 있을까요? 저녁 먹을 시간이라서….”
“알겠습니다. 우선 저하를 뵈시는 동안 제가 찾도록 하겠습니다.”
시종의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미로 같은 길을 따라 나는 다시 알버트의 방 앞에 도착했다.
“오셨습니다!”
시종은 바로 문을 열며 나를 안으로 들었다.
“로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음률처럼 울렸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어제와 비슷하게 안이 비칠 듯한 얇은 셔츠를 입은 알버트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물수건이 올려져 있었던 듯,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나른하게 뜬 눈이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레텐이 앉아 있던 그의 침대 옆 의자는 비어 있었다. 자리를 비운 걸 보니 내 말이 맞았다는 걸 안 모양이었다.
의자 옆에 있는 트레이에는 알버트를 위한 듯한 수프가 준비되어 있었다.
저녁 시간 때 왔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나는 의자에 앉아 책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숟가락을 들어 알버트의 식사를 도울 준비를 했다.
알버트의 시선이 수저를 쥐는 내 손에 닿았다. 그는 입을 다문 채,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게 먼저 말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표정 없는 알버트는 무섭다. 아까 전 시종이 왜 부리나케 나를 찾아왔는지 살짝 이해가 갔다.
“왕자님, 저 일부러 안 온 거 아니에요. 쫓겨난 거예요.”
“들었다.”
내가 먼저 말하자, 알버트의 눈꼬리가 느슨히 풀렸다. 하지만 가는 눈매는 여전했다. 긴 속눈썹에 진 그늘 때문일까, 눈이 유난히 붉다.
나는 어깨를 축 내리며 우는 시늉을 했다.
“유모님께서 왕자님에 대해선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얼마나 말하시던지….”
“말하지 그랬느냐. 네가 나를 훨씬 잘 안다고.”
알버트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내가 정말 알버트를 더 잘 안다고 말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나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시간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긴 했는데… 아픈 왕자님 앞에서 계속 싸우는 게 더 안 좋을 것 같았어요. 조용한 곳에서 쉬셔야죠.”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네가 없는 게 더 안 좋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나 보구나.”
“…….”
“그리고 네가 나를 더 잘 안다는 말에는 왜 말을 돌리는 거니, 로제.”
알버트가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의 손이 내 볼에 닿았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접촉. 그의 손이 유난히 뜨거웠다. 나는 숨을 들이켠 채 그를 응시했다.
숨소리조차 공유할 수 있는 한 뼘 사이 거리에서, 알버트가 웃으며 속삭였다.
“너도 약속을 어겼지 않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