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탑 안에도 책은 있었지만, 그 종류가 한정적이었다. 그중에서는 딱히 내 흥미를 끄는 책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나는 어제 알버트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흑마법에 관한 것 말고도, 그에게 물어본 질문이 몇 개 있었다.
귀찮을 법도 한데, 알버트는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마치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던 때처럼.
그런 모습을 보면 아까 전 그레텐이 잘못 본 것은 분명한데 말이야.
내가 어제 알버트에게 물었던 질문의 핵심은 ‘마법’이었다.
매번 알버트에게 받기만 하는 것은 미안하고 부담된다. 그의 마음은 거절하면서 도움을 받기만 하는 건 부질없는 희망을 주는 것과 같다.
심지어 어제 했던 대화를 통해 흑마법사였던 로제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 알버트에게는 꽤 큰일이라는 것도 알았기에 부담감이 더해졌다.
나는 어제 알버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제가 마법을 다룰 수 있을까요?”
로제 아티어스의 본래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 알버트가 내게 연금과 땅을 보장해 준다 해서, 핏줄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법은 다른 이야기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 그런 힘에 이끌린 것도 사실이었다. 알버트가 실제로 마법을 쓰던 모습도 매혹적이었다.
나중에 혼자 나가 살 때, 마법으로 내 몸 하나 지킬 수 있으면 그것도 좋을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알버트에게 진 마음의 빚도 갚고 싶었고.
나는 하양이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고 내가 빙의한 이 몸은 본래 흑마법사였으니, 내가 마법을 배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말에 알버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었다.
“마법은 왜.”
그가 넌지시 묻는 말에 나는 찬찬히 답했다.
“배우면 제 몸을 지키는 데 도움도 될 것 같고, 나중에 요긴하게 쓸 것 같아서요. 왕자님을 도울 수도 있을 것 같고.”
“…흑마법사도 몸에 마나가 깃들어 있으니, 시도는 해볼 수 있을 테지. 하지만 마법사란 타고나는 재능의 역량과 편차가 너무 커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구나.”
그러자 팔짱을 낀 알버트가 나를 가만히 쳐다봤었다.
“갑자기 배우고 싶어진 이유가 있을 터인데.”
“매번 받기만 하니까요. 저도 나중에 왕자님을 한 번은 돕고 싶어서요.”
“지금도 충분히 도와주고 있는 듯하구나.”
나는 그에게 뭔가 해준 기억이 전혀 없었다. 밥을 줬다면 준 거지만, 그건 나도 함께 먹으려고 한 것이니 도움을 준 건 아니었다.
알버트는 내 말에 나지막이 한마디 내뱉었다.
“평화로운 일상.”
그러고서 내게 자러 가라 말했지.
내게는 지루하고, 때때로 답답하기까지 했던 시간이 알버트에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여전히 마법을 배우고 싶다. 하지만 알버트가 마법에 대해 더 말해주지 않고 내보낸 것으로 보아 가르쳐 줄지는 미지수였다.
항상 알버트에게 기댈 수도 없는 노릇. 나도 직접 찾아보는 것이 좋겠지.
시종이 나를 안내한 곳은 성의 동쪽 탑이었다. 가는 길이 복잡하긴 했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여기 부엌 가는 길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아아….”
잘되었다. 이따 부엌에 들러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만들어야겠다. 알버트의 곁을 지키지는 못해도, 그에게 음식을 전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레텐도 그건 막지 못할 테다.
마음 한편에 찝찝한 감정이 남았다. 그레텐과 더 말싸움을 하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했을까, 하는 마음이.
알버트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이게 당연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나는 그와 하양이만 존재하는 세상에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함께 들어가서 책을 찾아드릴까요?”
“으음, 우선은 혼자 찾아봐도 될까요?”
서재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시간 때우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서재 안에 날 데려다준 시종이 꾸벅 인사하고는 멀어졌다. 곳곳에 자리한 창문 말고는 벽이 온통 책으로 뒤덮여 있는 공간은 마치 나무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고동색으로 뒤덮인 벽. 여기저기서 풍기는 책 냄새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상하게 탑을 생각나게 만드네….”
책장의 책은 도서관에라도 온 것처럼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마법에 대한 책도 분명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하나하나씩 살피기로 했다. 부스럭거리며 책장 앞에 쭈그려 있던 나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올렸다.
“여긴 무슨 일이지?”
고개를 올리니 북부대공 설정에 알맞은 흑발을 정리하며 나를 응시하는 리암이 보였다.
“마법사와 드래곤에 관한 책을 찾으러 왔습니다.”
“저하께서 부르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아, 유모란 분께서 워낙 완강하셔서 쫓겨났어요.”
내 말에 리암은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텐이 또, 라며 중얼거리는 게 그녀가 이런 행동을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알버트 주위에 꼬이는 여자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자진해 맡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알버트는 원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책장에 살짝 기대어 선 리암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는 슈버트와 비슷하게 눈매가 축 처진 강아지상이었지만, 인상이 순하기보다는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이 남자는, 정말 북부대공… 아니, 북부 공작다웠다.
“네, 그래서 저녁에 다시 뵈러 가려고요. 왕자님께서 명하신 일이니까요.”
리암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표정을 보니 용건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탑에서 나오면 어떻게 살 생각이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알버트가 우리가 한 계약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나? 그 정도는 서로 이야기했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내 이미지가 더 안 좋아질 걸 예상해 부러 숨겨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리암이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느냐, 그것이니까.
“무엇이 걱정스러우신 건지 알고 있습니다.”
내 말에 리암의 눈매가 뱀처럼 가늘어졌다. 살짝 좁힌 미간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서늘했다.
“어떻게 알고 있는가.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탑에서 왕자님을 보필하며 는 것이 눈치였으니까요. 제가 계속 왕자님 곁에 머물며 부당한 요구를 할까 두려우신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저하 주변의 일은 ‘두렵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저 내 우려일 뿐이지. 하지만 맞았어.”
뚜벅, 리암이 내 앞에 다가섰다. 안 그래도 어두운 조명 때문에 그림자가 진 얼굴은 마치 북극처럼 차가웠다.
“난 내 앞에 있는 자가, 내 주군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모르겠거든.”
역시, 요리 한번 잘한다고 해서 순순히 마음을 열 사람은 아니었다. 단순한 슈버트에게는 음식과 하양이가 먹힌 모양이지만.
“그 영향이 좋은 쪽인지는 더욱.”
…내게 호의가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좋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직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알버트와의 시간도, 그도 좋지만 그와 연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별개다.
아까 전 그레텐의 시선과 리암의 시선이 교차했다. 슈버트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경계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건 피곤하다.
눈치라도 없었으면 모를까,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넘기는 것도 지치는 일이다. 눈치가 있어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알버트가 이렇게 계속 다가온다면, 어느 순간 내 마음이 이성을 잡아먹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알버트도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여유롭게 내게 다 해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가졌고, 가질 자의 여유랄까.
그렇다면 나도 뭔가 더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를 말로만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좋은 분인 건 알지만, 제가 그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조용히 떠나고 싶다고 말씀드리면, 도와주실 건가요?”
“떠나고 싶다고?”
“되도록이면 왕자님과 마주치지 못할 곳으로요.”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리암이 고개를 기울였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군. 저하께 죄라도 저지를 예정인가? 왜 그렇게까지 저하를 피하는 거지?”
“그러지 않으면 저하께서 따라오실 것 같아서요.”
리암이 눈을 깜빡였다. 한참 침묵하던 그가 중얼거렸다.
“잘못 들은 것 같군.”
“아니요, 맞게 들으셨습니다. 저하께서, 저를 따라오실 것 같다는 말이에요.”
“…네가 그렇게 유능한 요리사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리암이 머리를 굴려 생각한 이유는 그쯤인 모양이었다. 어제 수제비가 정말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알버트가 내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털어놓는 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가 봅니다.”
“얼마 전 너와 비슷한 종류의 요리를 한다는 사람의 소문을 들은 것 같긴 하군…. 아,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집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던 리암이 물었다.
“너는 저하께서 그렇게까지 찾는데 왜 떠나려는 거지? 정말 네가 저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인가?”
“그런 이유라고 보기엔, 너무 큰 이유인 것 같은데요.”
“자기 객관화가 대단히 잘 되어 있군.”
“사는 데 필요하더라고요.”
생각지 못한 리암의 칭찬에 나는 하하 웃었다. 그의 말이 맞긴 했다. 나는 처음 계약 때부터,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정도만 바랐다.
그게 알버트의 마음에 든 이유 중 하나일 테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안주할 줄 아는 내 성정. 그러니, 알버트는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할 수 없었다.
“저하의 눈을 피하는 건 어려우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한참의 침묵 끝에 나온 리암의 말에 나는 고맙다 이야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려다본 리암의 눈매는 생각보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리암도 내 이런 면모가 좋게 보인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공작인 리암이 도와주면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른다. 리암을 향한 호감이 퐁퐁 솟아났다.
서재에 왔다는 건 찾는 책이 있어서일 터! 나는 우선 리암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공작님께서는 무슨 책을 찾고 계셨던 건가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다면 도와드리고 싶은데.”
“아아, 드래곤에 관한 책인데….”
“드래곤이요?”
“그래, 수도에 죽어가는 새끼 드래곤이 나타났거든.”
리암이 무심히 말했다.
하지만 난 무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