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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42화 (42/156)

42화.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웠다. 몸이 노곤해서, 얼른 잠들고 싶었다.

시녀의 도움을 받아 얇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알버트의 모습을 떠올리다 고뇌했다.

…진짜 알버트는 신이 빚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알버트도 잠시, 곧 이 몸의 원래 주인인 로제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책 속 내용을 떠올려도 소용없는 것이, 그녀는 애초에 알버트에게 살해당할 엑스트라에 불과했기에 부연 설명조차 별로 없었다.

그녀가 탑에 들어온 과정은 이제 알았는데…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았다.

대체 로제는 어떻게 흑마법사가 된 거지? 흑마법사는 보이는 족족 처형당해 지금 씨가 말랐다는데, 어떻게 정체를 숨긴 걸까.

그저 하녀에 불과하던 그녀가 대체 흑마법은 어떻게 알았을까?

스승 같은 존재가 있었나? 그럼 그런 존재를 언제, 어떻게 만난 거지?

로제에게는 너무 의뭉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삶에 대한 기억은 단 한 번도 생생했던 적이 없었다. 마치 뿌연 안개 너머를 바라보는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지만 생각나는 건 없었다. 나는 결국 포기했다. 눈꺼풀도 점점 무거워지고 있던 참이었다.

우선 자자. 푹 자고 내일 일어나서 생각하자.

일어나는 시간은 7시 언저리가 좋겠지? 누워 있을 알버트에게 죽을 만들어 바쳐야 하니까.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누웠다. 희한하게 시계가 없어도 일어나는 시간은 일정하게 잘 맞는 편이었다.

전복이 있었던가? 있으면 전복죽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던 나는 여기 쌀이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탑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생각도 이렇게 하게 되네.

그리고 여긴 공작의 성이니 나보다 알버트의 식성을 훨씬 잘 맞춰줄 요리사도 있겠지. 나는 나보다 전문가들을 믿는 편이다.

음식은 뒤로하고, 차라리 내일 아침 일찍 가서 간호하는 것이 낫겠다. 나는 잠든 하양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눈을 감았다.

포근한 침대는 탑에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지만, 왜일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다락방 바닥과는 다른 폭신한 감촉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잠시 탑을 나온 적은 있어도, 이렇게 외박한 적은 없었으니까.

지금까지는 탑에서 나오고 싶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어쩌면 그곳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먹을 것을 고민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잠드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추억은 항상 남아 있을 테니까.

탑을 나가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리워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점차 눈꺼풀이 감겼다. 고민도 잠시, 몸이 피곤하긴 했던 모양인지 나는 금방 잠들었다.

***

“으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나는 지금 시간을 예상하며 시계를 흘끗 보았다.

역시나, 내가 항상 일어나는 시간인 오전 7시였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창밖을 살폈다. 창 가까이 보이는 물기가 바깥 날씨를 말해주는 듯했다.

겨울철이라 그런 걸까, 아직 밖이 밝지는 않았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빛 사이로 온 세상에 내려앉은 눈이 보였다. 여긴 정말, 동화 속의 성 같았다.

돌아가기 전에 하양이랑 눈싸움이라도 할까.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시녀는 날 도와주며 아침 식사는 원할 때 할 수 있다 말해주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침 식사보다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나는 나중에 돌아오겠다 말하며 시녀를 물렸다.

“하양아, 가자!”

잠 많은 하양이도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래애애애….”

하양이가 내 품 안으로 뛰어올랐고 나는 하양이를 품에 안은 채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 알버트가 오는 시기에 맞춰 리암이 사람들을 물린 것 같았다. 그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알버트의 방은 내 방이 있는 복도에서 쭉 내려가 막다른 길에 있는 가장 큰 방이었다.

내가 혼자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길이라 다행이었다. 성의 복도는 마치 미로 같아서 아직 알기 힘든 구석이 많았다.

음…. 음식도 먹여줘야 하려나. 물수건도 준비하는 게 좋겠고. 나는 탑에서 그가 아플 때 무엇을 해줬었는지 떠올리며 발걸음을 놀렸다.

복도를 걸으니 문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보였다. 알버트를 지키기 위해 서 있는 걸까? 누군가 싶어 흘끔 응시하던 나는 그게 슈버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 훈련이라도 마치고 온 건지,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는 얼굴이 싱그러웠다.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풋풋한 모습은 청춘 영화의 주연 같기도 했다.

하루 봤다고 좀 반갑네. 어제 수제비 먹고 하양이랑 놀아주면서 나에 대한 경계심도 좀 풀어졌으려나? 나는 반갑게 슈버트를 불렀다.

“남작님!”

“아, 저하의 하녀.”

슈버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돌리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저도 이름 있습니다.”

“내가 부를 필요는 없는 것 같군. 아, 하양이라고 했었나? 고양이는.”

내 항의를 심드렁하게 넘긴 슈버트는 내 품에 안긴 하양이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정말 호불호가 분명한 인간이군.

슈버트라는 로봇에게 입력된 키워드는 ‘저하의 하녀’와 ‘하양이의 보호자’일 뿐,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히 느껴지는 바였다. 나는 예, 대답하며 용건을 말했다.

“왕자님을 뵈러 왔습니다.”

“들어가 보도록. 저하께서 너는 원할 때 들여보내라 하셨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고양이도 데리고 들어가나?”

“아? 그것이….”

슈버트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하양이는 알버트를 무서워하지. 또 사람이 아픈 모습을 보면 걱정도 될 테고.

“하양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들어갈래?”

나는 하양이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하양이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답했다.

“여기이이….”

“…….”

알버트가 무섭긴 한 모양이다. 나는 하양이를 여기 두고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슈버트에게 자연스럽게 하양이를 건넸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거야 당연, 아니. 나한테 지금 일을 시키는 건가?”

“아니요, 부탁드리는 건데요. 제가 하양이를 무척 아끼는데 어제 남작님이 무척 든든하게 봐 주셔서….”

“…그렇군.”

순간 언짢은 얼굴을 했던 슈버트는 이어진 말에 수긍하며 하양이를 안아 들었다. 하양이를 품에 안은 그의 표정은 정말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하양이도 슈버트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몸을 비비적댔다.

앗, 나 지금 질투할 뻔했다. 하양이와 가장 가까운 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아, 안에… 저하의 유모가 있다.”

“오, 함께 간호하면 되는 건가요?”

“음… 그건 네가 알아서 하도록.”

슈버트는 내 말에 그러라 답하는 대신 말꼬리를 흐렸다. 여기서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뭐지? 이 느낌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문을 열었다.

“누구지?”

안에 들어간 나는 낯선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적게 쳐도 60대는 되어 보이는 깐깐한 인상의 할머니가 알버트의 침대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왕자님을 모시는… 사람인데요.”

“나는 저하의 유모였던 그레텐이다. 저하는 내가 모시겠다고 말했을 텐데.”

“어제 저와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그레텐은 내 말에 전혀 수긍하지 못하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얼굴에 진 주름만큼이나 고집이 세 보였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인상에서 성격이 보인다는 말이 딱 맞았다.

“아무래도 저하의 빈말을 진심으로 들은 모양이구나.”

“진심이셨기에 진심으로 들었습니다만.”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받아쳤다. 자신의 목숨까지 들먹이며 했던 말들을 빈말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레텐이 코웃음을 치며 알버트의 이마에 올려둔 물수건을 갈았다. 나와 말싸움을 하고 있어도 신경은 알버트에게 쏠려 있다는 것이 잘 보였다. 유모는 분명한 모양이었다.

“탑에서 고작 몇 달 함께 보낸 너와, 저하의 어린 시절을 보아왔던 나 중 누가 더 저하를 잘 알 것이라 생각하느냐?”

이미 그레텐은 내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경멸에 찬 얼굴, 오만하기까지 한 말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런 종류의 감정 소모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시간이 모든 걸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짧은 찰나의 만남이 그 사람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하고요.”

나는 알버트 가까이 다가섰다. 상태는 역시나 좋지 않았다.

그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보다 더 심한 것 같아 죄책감이 더 심해졌다.

“내가… 내가 저하의 어떤 모습까지 봤는지 알면 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내 말에 당황해 굳었던 그레텐이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저하의 미모에 반해 이런 식으로 다가오려던 인물이 한둘인 줄 아느냐? 거짓말을 하려거든 썩 물러나거라!”

“왕자님이 잘생기신 건 알지만, 저는 거짓말하는 게 아닌데요.”

“지금도 저하의 외모에 눈을 번뜩였지 않으냐!”

…이건 그냥 평소 내 눈빛이긴 한데 찔렸다. 알버트가 잘생겨서 홀리는 건 내 탓이 아니잖아.

아무래도 그레텐의 고집은 쉬이 꺾을 수 없을 듯 보였다.

당사자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말싸움이 끝나는 일은 없을 테다. 오랜만에 느끼는 직장인으로서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알버트에게 방해만 될 테고, 그레텐이 알버트를 허투루 챙길 리도 없으니, 나는 나가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쓸데없는 말싸움을 지속할 이유는 없다. 알버트를 위해서라도,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중에 알버트가 일어나 그레텐에게 말하면 모를까, 지금은 안 된다.

하지만 나가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게 있었다.

“저는 이곳에 있으려 했습니다. 그레텐 님께서 내보내신 거예요.”

나중에 알버트가 깨어났을 때 내가 없는 모습을 보고 화를 낼 수도 있으니, 이 부분은 명확히 해야 했다. 내 말에 그레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왜…?”

“나중에 왕자님께서 여쭈시면 다 이야기하려고요.”

“이런 소소한 일에 신경 쓰실 분이 아니다만.”

“제가 모신 왕자님은 모든 일에 신경 쓰시는 분이었는데.”

“자신의 일이 아니면 겉으로 흥미 있어 보일망정, 속으로 무관심하신 분이다.”

아무래도 그레텐이 아는 알버트와 내가 아는 알버트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지금 나눈 대화는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인데… 지금 저 내보내고서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아는 왕자님은 제가 있길 바라실 것 같은데.”

와, 나 지금 되게 오글거리는 말 한 것 같은데! 나 내보내면 후회할 거야! 의 순화 버전!

하지만 이건 사실 그레텐을 위한 말이었다. 난 정말 알버트 말을 따르러 온 거였으니까.

“하, 저하께서? 아무도 없는 걸 가장 편안히 여기실 거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고.”

음, 난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어서 가거라. 저하는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나는 밖으로 쫓겨났다.

바깥에 나오니 슈버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제 봤던 시종이 나를 보며 인사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냥….”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생각에 잠겼다.

슈버트는 하양이와 놀러 간 것 같고. 오늘 알버트의 곁을 지키기는 글렀고.

“서재에 좀 데려다주시겠어요?”

오랜만에 책을 읽을 때가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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