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사실 알버트가 무슨 말을 꺼내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알버트는 이윽고 수긍의 뜻을 표했다.
“로제 덕에 잘 지내고 있다.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알버트가 넌지시 건넨 말에 앞에 앉은 리암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흐르는 침묵이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준비는?”
알버트가 꺼낸 말에 리암의 몸이 다시 딱딱히 굳었다. 옆에 앉아 있던 슈버트가 의외로 먼저 입을 열었다.
“기사들 사이의 여론은 잘 정리되고 있습니다.”
“반드시 기사단에 들어가야 하냐고 진지하게 묻던 게 엊그제 같은데, 수고했다.”
알버트가 만족스러운 듯 이야기했다. 나는 슈버트를 표현하는 말에 다소 놀랐다. 태어났을 때부터 난 기사 하겠다 그랬을 것 같았는데 처음부터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거야 저는 저하처럼 품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배운 것도 아니니까요.”
슈버트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남작이라는 호칭은 거의 명예직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지금 슈버트의 행동을 보면 태생부터 귀족이었던 건 아닌 듯했다.
알버트를 위해 기사까지 되다니, 대단한 충성심이군. 나중에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 물어봐야겠다.
“하지만 시민들의 여론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리암의 말에 알버트는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지 않으냐. 그걸 쓰거라.”
“…정말 그러길 원하십니까?”
리암이 인상을 찌푸렸다.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지. 그에 대해선 더 이상 말하지 말도록.”
물밑 작업부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새로웠다. 내가 모르는 사이, 알버트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는 증거 같기도 했다.
그 뒤에도 띄엄띄엄 이야기는 이어졌다. 내 앞에서 극비 사항은 꺼내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건 이해되는 바였다.
조금씩 긴장이 풀리면서 이 자리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역시 여러 사람과 이야기하는 건 즐겁다. 내가 아무리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 해도 자발적으로 집에 있는 것과 강제적으로 집에 박혀 있는 건 다르다.
처음에는 알버트가 왜 이런 자리를 만들었을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날 자신의 측근들에게 소개하고, 같이 밥을 먹고 끝내는 왕위 찬탈 계획까지 듣게 만드는 건 심경이 복잡했다.
알버트는 이제 내가 그를 가두는 데 동조한 흑마법사라는, 거의 확정된 사실을 알고 있다. 탑에서 나오기 전에 날 치료해 주는 건, 그의 입장에서는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진짜 바뀐 건지, 바뀐 척한 것인지 모르니까.
하지만 알버트는 기꺼이 나를 치료했고, 제 신하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알버트는 자신의 선택에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불러왔다. 이건 그의 직감일까, 혹은 세밀한 계산일까.
어느 쪽이든 그가 대단한 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 나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도,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알버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우아하게 수저를 쥔 손도, 나를 향해 나른히 뜬 눈동자도, 살짝 열린 입술도 현실감이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미모라 더 그렇게 느껴졌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알버트의 눈빛이 짙어졌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듯 왕자님은 정말 잘… 아닙니다.”
천연덕스레 말을 이으려던 나는 리암의 가늘어진 눈매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리암과 슈버트가 버티고 있는 곳에서 왕자님 잘생기셨습니다, 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건 아무리 나라도 조금 부끄러웠다.
사람들을 오래 안 만났더니 얼굴에 깐 철판이 얇아졌나 보다. 얼른 익숙해져야겠어. 나는 다음을 기원하며 방긋 웃었다.
“아쉽구나.”
알버트가 넌지시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알아들었지만, 아쉽게도 여기서 말을 이을 생각은 없었다.
수저를 내려놓은 알버트는 주먹을 쥔 채 턱을 괴었다. 초승달 같은 눈매가 곱게 휘었다.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매일 듣는 말일 텐데, 저렇게 홀릴 것처럼 말할 건 뭐람. 얼굴이 삽시간에 빨개지는 모습을 생중계하는 건 곤란했다.
“어휴, 시간이 늦었네요.”
나는 황급히 말문을 돌렸다. 마침 이야기가 끝난 참이기도 했다.
“왕자님, 피곤하지 않으세요? 이만 쉬셔야지요.”
“아.”
내 말에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짤막하게 말하는 알버트가 심히 의심스러워진다. 알버트는 슈버트가 가져다 바친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식은땀이 좀 나는 것 같구나.”
…그건 자랑이 아닌데요?
뜨거운 음식을 먹어서 나는 땀이 아니라,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니. 아픈 티 낸다는 것도 전부 순 거짓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참고 있었음이 여실 없이 드러나는 얼굴에 내 목소리도 뾰족해졌다. 그가 아프게 된 게 내 탓이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가서 쉬셔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이만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무리 알버트라도 단번에 솔직해질 순 없을 터인데, 그게 왜 섭섭해지는 건지. 나는 마음이 좁아터진 소인배가 분명하다.
“나쁘지 않아. 모두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구나. 내 몸도 한계가 오고 있어서.”
알버트의 말을 들은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암과 슈버트도 마찬가지였다. 알버트 앞에 서 정중히 인사를 마치는 이들에게, 그는 우아하게 손짓했다.
“이만 가보거라.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저하.”
“감사합니다, 저하.”
리암과 슈버트가 물러갔다. 나는 맨 마지막으로 알버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왕자님, 저도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시종을 따라가려는 순간-
“로제, 네게는 할 말이 남았으니 함께 방으로 가자꾸나.”
알버트에게 붙잡혔다.
예, 고용주가 부르시면 가야지요. 나는 하양이를 품에 안은 채 시무룩한 얼굴로 알버트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하양이는 이미 고롱고롱 꿈나라에 간 후였다.
***
방에 들어가기 전, 알버트는 옷을 갈아입겠다며 내게 기다리라 명했다.
잠시 후, 나는 평소와 다르게 가운에 바지만 걸친 알버트를 마주했다.
“들어오거라.”
“…네.”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라 당황했다. 하지만 난 눈을 부릅떴다. 드라마 한두 번 본 내가 아니지! 여기서 홀린 듯한 얼굴을 보이면 내가 지는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기는 어려웠다.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마치 붉은 장미를 꺾어놓은 듯 선명했다. 나른히 뜬 눈매 사이의 시선은 내게 진득하니 달라붙었다.
집요한 시선을 피해 슬쩍 고개를 내리니 느슨히 풀린 가운 사이 보이는 선명한 복근과 인사하는 지경이 되었다. 아, 안녕…?
운동하는 거 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아예 웃통을 벗은 것보다 이게 더 자극적으로 다가오는 건 왜일까?
알버트가 이런 옷을 입은 건, 정말 왜일까…? 이렇게 나를 숨 막히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왕자님? 여기서 난 코피를 흘려도 무죄 아닐까?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자 등에 문이 닿았다.
알버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흐르고 그가 벽을 잡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자가 진 얼굴에는 웃음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도망이라도 치려고.”
햇빛처럼 드리운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그, 그럴 리가요.”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목소리가 떨리면 내가 진짜 이상한 사람 될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른 옷을 입으셨네요.”
“자면서 땀을 흘릴 테니, 이쪽이 나을 것 같아 부탁했단다. 저번에 많이 느꼈거든.”
“오….”
로제가 이런 옷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던 건 알버트에게 천운이 아닐까? 알버트가 매일 이런 옷을 입고 다녔다면,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매일 그를 마주 볼 수 없었을 것 같다.
나는 용건을 빨리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왜 부르셨어요? 혹시 더 필요하신 거라도….”
“앞으로 흑마법에 대한 말은 하지 말거라.”
알버트의 말은 간단명료했다. 수긍할 수 있었다. 흑마법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안 좋아 보이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걱정되는 사실이 있었다.
“하지만 제가 흑마법사였다는 사실 정도는 밝혀야 하지 않을까요? 현왕이 조종당했을 수 있다는 사실 같은 건 정말 중요한 정보 같아서….”
내 걱정에 알버트가 해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미소에는 전과 다른 냉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말하지 말거라. 네가 준 정보는 내가 전달하는 것이 나아.”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내 재빠른 눈치가 발동했다. 여기서 이야기를 멈춰야 하나, 고민했지만 ‘로제’의 이야기가 현재 나의 이야기이기도 한 만큼, 피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제가 흑마법사였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될 수 있나 보군요.”
“그래, 흑마법사는 그 정체가 밝혀지는 즉시 처형당한단다.”
처형. 죽을 위기에까지 놓인다는 건 흑마법이 얼마나 중죄인지 실감하게 만들었다.
알버트의 입에서 무심히 나온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무거운 말에 충격받은 나는 그를 멍하니 응시하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 알버트가 아니었다면 난 이미 몇 번 죽고도 남았겠다, 싶어서.
사실 사랑에 눈이 먼 알버트가 사리 분별도 못 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는 오히려 내 치부를 감싸고 흑마법의 부작용을 치료까지 해줬으니까. 그게 고마우면서도, 걱정스러웠다.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할 그가,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덮는 게 얼마나 잘못된 건지 알기 때문이다.
이럴 때 평소 보이지 않던 양심이 가슴을 콕콕 찌른다.
“제게 너무 많은 혜택을 주시는 거 아닐까요?”
“너만 챙기는 건 아니니 걱정 말거라. 폭군이라도 될까 우려하는 모양새구나.”
“들켰네요.”
나는 순순히 인정하며 배시시 웃었다. 머쓱한 걸 무마하기에는 웃음이 제격이다.
“왕자님 눈치는 빛의 속도 같아서 뭘 숨길 수가 없네요.”
“눈치보다… . 내가 널 더 오래, 유심히 관찰한다는 말이 옳겠구나.”
또 이렇게 훅 들어온다. 그의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그를 살짝 흘기다 장난스레 물었다.
“왕자님, 제가 정말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시려고 해요? 이렇게 다 알려주시면.”
“나쁜 사람이라.”
알버트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괴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은 내 귓가에 멈췄다.
“끝까지 쫓아가겠지.”
첼로 선율처럼 깊은 울림을 가진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뒤끝이 길어, 로제.”
“…….”
“그러니 도망칠 때는, 나를 다시 볼 때 어떤 말을 할지 생각 정도는 해놓아야 할 거란다.”
농담이라 말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모양새에, 등에 땀이 났다.
내가 도망칠 것도 아닌데.
만일 그러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