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와, 알버트를 따르는 인물들과 한자리에서 식사라니. 사장님과 이사들 사이에 낀 신입 사원의 처절한 생존기… 정도로 봐야 하려나.
사실 알버트가 수제비 두 그릇을 가져오라 한 데에는 꽤 놀랐다. 나하고만 먹을 줄 알았는데.
모두 함께 먹는 게 편한 건가? 아니면 나와 리암, 슈버트 사이에 안면을 확실히 트길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가 도망가지 않길 바라니까.
과연 리암과 슈버트가 수제비를 좋아하려나. 수제비를 노려보던 리암의 얼굴을 생각해 보면 그에게 수제비 주기는 좀 두려웠다. 슈버트는 그나마 같이 만들어 안심이 되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직 만든 지 얼마 안 된 수제비는 뜨끈뜨끈했고, 시종은 나를 따라 그릇에 수제비를 가득 담았다. 작은 그릇에 하양이에게 줄 것도 함께였다.
“그런데 정말 고양이에게 이런 걸 줘도 괜찮을까요?”
“당근이지이이… 난 다아아 잘 먹어어….”
시종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하양이는 자랑스레 말했다. 새로운 음식을 먹을 생각에 신난 듯 보였다. 그래 봤자 나와 알버트 외에는 그저 고양이가 야옹거리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하양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해주는 음식과 새로운 만남이 하양이의 삶에 확실한 활력을 불어넣은 듯했다.
물론 하양이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시종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괜찮다고 답하며 부엌을 나섰다.
“이런 일까지 모두 도와주시다니… 아가씨는 좀 특이하시네요.”
시종은 함께 그릇을 옮기는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알버트와 상의해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겠다.
밖에 나갔을 때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면 되는지 정도는 알아야 마음 편히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알버트를 비롯해 리암과 슈버트까지 늦은 식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자 우리는 자리를 다이닝룸으로 옮겼다.
따듯하게 난방이 되어 있는 다이닝룸에는 포근한 하얀색 식탁과 긴 식탁을 둘러싼 고급스러운 의자들이 자리했다. 알버트는 맨 끝 가운데 자리에 앉았고, 리암과 슈버트는 알버트와 한 자리 떨어진 양쪽 의자에 앉았다.
시종은 슈버트와 리암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고 나는 들어가다 말고 자리에 서서 고뇌했다.
“로제, 이리 오거라.”
알버트가 내게 손짓하며 양쪽 빈자리를 가리켰다.
설마 이 자리에 앉으라는 건 아니지요, 왕자님?
“네가 원하는 쪽에 앉거라. 어느 쪽이 좋을지 몰라서.”
하지만 그런 내 고뇌를 무참히 부순 알버트는 우아하게 말했다.
신입 사원이 임원들 제치고 앞에 앉는 건 범죄가 아닐까요?
“아뇨, 저는 괜찮….”
“치료를 했다고 하지만 아직 흑마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두 사람에게도 설명해 두었으니 그리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전 왕자님의 실력을 믿고 있어요. 흑마법이 다시 작용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자부합니다, 라고 말하기에는 알버트의 눈빛이 상당히 살벌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작님과 공작님을 두고 제가….”
“명령 불복종은 더 큰 죄지.”
왕자의 말이 제일 먼저 아닐까 싶은데. 나지막이 덧붙인 알버트의 말에 나는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하양아, 너는 어디서 먹을래?”
“나는 여기서어어….”
하양이는 알버트와 멀찌감치 떨어진 바닥을 택했다.
결국 나는 슈버트 옆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 어디에 앉아야 하나 장렬히 고민했는데, 리암의 옆자리에 앉기에는 아직 용기가 부족했다.
“그럼 들까.”
알버트의 단정한 어조와 함께 수저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까 전 알버트가 몸소 먹었던 음식이라 리암과 슈버트가 피할 방법은 없었다. 알버트가 직접 시켜 가져온 음식이기도 했고.
이게 알버트가 노렸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빠져나갈 수 없는 덫.
하지만 그건 둘째 치고, 지금 더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알버트의 그릇이 식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 내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먹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럴 때를 생각해 한 그릇 더 가져왔지! 나는 알버트에게 지금 막 가져와 따끈따끈한 김이 나는 수제비를 내밀었다.
“따듯할 때 드시는 게 좋으니까요.”
알버트는 피식 웃었다.
“세심한 배려 고맙다.”
아무래도 알버트는 내 이미지 쇄신에 들어간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칭찬받으니 좀 부끄러웠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원래 해야 하는 일인걸요.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해야 하는 일과, 일을 하는 태도는 별개니까. 그런 걸 보면 넌 일을 잘하는 편이지.”
기분이 묘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듯 만드는 말이, 그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게 만들었다. 알버트가 이만큼 대단한 외모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을 사로잡고 말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행히 다른 이들도 수제비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리암은 나와 알버트의 대화를 들으며 말없이 수제비를 먹고 있었고, 슈버트도 침묵 속에서 식사를 이어갔다.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앞에서 대놓고 맛있다며 먹을 수도 없고, 알버트와 하양이와 자유로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보니 식사 시간이 무척 지루했다.
어차피 지금 말고는 리암이나 슈버트와 마주칠 시간도 별로 없을 것 같고. 나는 내 태도를 확실히 했으니 내가 마녀라는 오해는 풀렸을 것 같았다.
“왕자님,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수저를 내려놓는 모습까지 한 폭의 그림 같은 알버트가 물었다.
“여기서 저는 어떤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모두 귀족 아가씨로 보고 계시던데….”
“흐음, 그렇지. 네가 나와 탑에 갇힌 것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최측근이 아니면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시종들은….”
“그냥 시종들이 아니라 예전부터 저하를 모시던 사람들이다.”
이 큰 저택에 시종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던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처음 나와 알버트를 데리러 나왔던 사람이 둘뿐이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으로서는 리암의 먼 친척 정도다. 성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는 게냐?”
“서재가 있다면 책을 좀 읽을까 하고요.”
알버트에게만 물어볼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도 일을 해결하고 싶다. 하양이에 관한 정보도 찾아보고, 로제가 썼다는 흑마법과 알버트 같은 마법사에 대해서도.
“하녀가 무슨 책을 읽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내 옆에 앉아 있던 슈버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마법이나 흑마법에 관해서도 알아보고 싶고… 드래곤에 대해서도 궁금해져서요. 이에 관한 책을 빌릴 수 있을까요, 공작님?”
“흑마법에 대한 책은 금서이기 때문에 마법 책에서 드문드문 있는 게 다일 테지만, 그 밖의 책들은 좀 있군.”
무뚝뚝하긴 했지만 사실 그의 답변은 성실한 편이었다. 금서라니, 그럼 로제는 흑마법을 어떻게 익힌 거지?
나는 리암의 얼굴이 생각보다 너그럽게 풀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제비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좋아, 서이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알버트 주변 인물들의 호감을…!
“그럼 마법의 기초와 드래곤의 역사에 대한 책을 빌릴 수 있을까요? 흑마법은 아쉽지만….”
“내일 시종을 보내주도록 하지.”
“네, 감사합니다.”
서재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내일부터 알버트는 하루 종일 누워 있게 될 테고 그 원인인 나는 그의 곁을 착실히 지킬 예정이었다.
하지만 곁에 있으면서 책 정도는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능하다면 알버트에게 질문을 해도 되고.
아픈 사람에게 질문이라니, 좀 너무한가? 그의 상태를 봐가면서 해야겠다.
리암이 문득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어떻게 흑마법에 걸렸는지는 몰라도 그쪽은 우리 소관이기도 하니 걱정하지 말도록. 확실하게 해결하도록 하지.”
나는 눈을 깜빡이며 멍청히 그의 말을 되새겼다. 걱정? 확실히 해결?
“흑마법사들은 자고로 죽어 마땅한 불법 마법을 저지른 이들이니까.”
“…그렇군요.”
그러니까 흑마법사를 찾으면 죽인단 얘기로군.
머릿속에 뭉게구름이 낀다. 흑마법사는 죽어 마땅한 사람. 로제는 흑마법사. 그리고 로제는….
나.
…이래서 아는 게 힘이라고 한 건가?
자칫 잘못해서 로제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알버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등골이 서늘했다.
알버트가 날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게 얼마나 큰 도박이었는지 조금이나마 상상이 갔다.
아무래도 나중에 알버트에게 흑마법에 대해 더 물어봐야겠다. 내가 지금 흑마법을 쓰는 건 아니지만 흑마법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어떻게 쓰는 건지 정도는 배워놔야 난감한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의 핵심은 언제나 알버트를 관통한다. 과연 그는 모든 것을 가진 남주다웠다.
나는 알버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한한 신뢰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왕자님, 새우 좋아하세요? 더 드릴까요?”
닭다리에 이어 내 왕새우를 주는 건 그를 정말–인간적으로- 좋아한단 표시인데!
“되었다, 너도 어서 먹거라.”
내 말에 알버트가 피식 웃었다. 흘끔 보니 그의 수제비에는 아까 전 잔뜩 펐던 건더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럼 저도 잘 먹겠습니다.”
나는 수제비를 입안에 넣었다. 아까 전 반죽을 열심히 치댄 보람이 있었다! 시원한 국물과 어우러진 해산물도 상태가 완벽했다.
간단한 이야기 후 한결 풀어진 분위기는 썩 괜찮았다. 그리고 그건 나만 느낀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어디 음식이지? 밀가루 반죽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는데… 신기하군.”
내 옆에 앉아 있던 슈버트가 그릇을 깨끗이 비운 후 넌지시 물었다.
아까 전 이게 뭐냐 할 때는 언제고. 그의 태도 변화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지만 어깨가 으쓱한 것도 잠시, 어디 음식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로제가 어디서 자랐는지도 모르니 더더욱.
결국 난 거짓과 진실을 적당히 섞었다.
“탑에 들어가기 전 해 먹던 음식인데… 저도 오래전에 배운 것이라 누구에게서 배웠던 것인지는 잘….”
“신기하군. 종종 먹어도 될 듯하고.”
리암도 덩달아 칭찬했다.
“저하의 까다로운 미각에 맞는 음식을 만들었다 하더니… 꽤 솜씨가 있군.”
“아무렴, 요리사도 계속 갈아치우시던 분인데.”
두 사람은 가볍게 웃으며 나를 칭찬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거의 비운 그릇만 숟가락으로 벅벅 긁었다.
…알버트에게 매운 음식만 주로 먹였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