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국물은 계속 팔팔 끓고 있었다. 야채만 넣고 만든 육수는 처음인데 괜찮으려나? MSG의 힘을 빌릴 수 없다는 건 좀 슬픈 일이다.
간을 보니 조금 싱겁길래 소금을 더 넣었다. 그러고는 육수에 쓴 야채를 차례차례 건졌다.
다행히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내가 원하던 뽀얀 국물이 나왔다. 이제 수제비를 뜯어서 넣을 차례였다.
나는 아까 전 만들어뒀던 반죽을 보며 고심했다.
양이 좀 되는데.
이걸 혼자 뜯기에는 확실히 귀찮은데….
나는 하양이와 놀고 있는 슈버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어볼까, 말까. 일 시키기에 딱 좋은 신체 조건인데.
역시, 좋은 인력은 써먹는 게 인지상정이지. 재료 손질을 너무 열심히 오래 했더니 지친 것도 사실이었다.
“남작님!”
“뭐지?”
“왕자님을 위한 요리, 같이 만들지 않으시겠어요?”
몸을 움찔한 슈버트가 눈을 굴렸다. 마치 변명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헛기침과 함께 슈버트가 말했다.
“기사는 요리를 하지 않는다.”
“도와만 주시면 남작님께서 만드신 요리를 무려 왕자님께서 드시는 건데.”
“…….”
“왕자님께서 만족스럽게 웃으시는 표정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 말에 입술을 짓씹던 슈버트가 이윽고 홀린 것처럼 느리게 다가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와, 남작님! 요리사 하셔도 되겠어요!”
“내게 어려운 건 없지!”
슈버트는 내 옆에서 뿌듯한 얼굴로 수제비를 열심히 뜨고 있었다. 손놀림이 장난 아니었다. 요리 배우면 꽤 잘할 것 같은데?
수제비는 반죽을 얇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니까 순식간에 얇은 반죽을 쑥쑥 만들어 육수에 집어넣는 자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슈버트와 이야기하며 느낀 건데, 그는 생각보다 더 순진한 편이다.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인 데다, 아직 사회를 겪지 않은 치기 어린 소년 느낌도 났다.
겉으로 무슨 말을 할지언정 속은 알 수 없던 이들이나, 말의 속뜻을 살펴야 했던 사람들과 달라서 대할 때 마음이 편했다.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이 느낌이 비록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라도.
하지만 이 어린 소년이, 알버트와 어떤 접점이 있는지는 좀 궁금해진다.
“남작님. 한가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뭐지?”
“남작님은 왕자님을 왜 존경하시나요?”
수제비를 다 뜨고 밀가루가 묻은 손을 씻던 슈버트가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분이 나를 구해주셨기 때문이야.”
“…오.”
알버트가 구해준 목숨이라니. 그럼 확실히 그를 존경하고 섬기게 될 만했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싶어 기다렸지만 슈버트는 더 이상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야기를 해달라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아쉽지만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야겠다.
슈버트 덕에 수제비를 뜨는 건 금방 끝났다. 수제비가 좀 익었을 즈음 나는 모든 해물을 때려 넣었다.
새우가 점점 빨간 빛을 띠기 시작했다. 오동통하게 자른 낙지와 오징어가 국물에 수제비 반죽과 함께 떠올랐다. 나는 국자를 들어 보글보글 끓는 국물 맛을 보았다.
“으음.”
채소 육수라서 밍밍하거나 맛이 덜 깊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 없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끝이다.”
알버트와 하양이, 그리고 나를 위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나는 쟁반과 그릇을 꺼내 수제비와 해물을 골고루 옮겨 담았다. 옆에서 슈버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행동을 관찰했다. 나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제가 직접 요리하는 걸 보셨으니 음식에 독을 탄다는 오해는 풀렸을 거고. 뭔가 더 확인하실 게 있을까요?”
“…….”
슈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수저를 들고 시종을 불렀다.
“하양이를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님. 덕분에 요리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슈버트 품에 안겨 반쯤 졸고 있던 하양이를 향해 손짓했다. 하양이가 그의 품에서 일어서더니 내 품으로 폴짝 뛰었다. 하양이의 조그만 날개가 파닥거린 것 같기도 했다.
하양이를 향해 손을 뻗는 슈버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다 했어어어…?”
“응, 왕자님께 음식 전해드리고 우리도 밥 먹자.”
아까 전 나를 내보내고 싶어 했으니 이미 자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일단 쟁반에 알버트의 몫까지 챙겨 올렸다.
“왕자님께 이 음식 전해드리고 와서 먹자.”
“그래애애….”
하양이가 내 품에서 얼굴을 비볐다. 나는 하양이의 몸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슈버트가 자리에서 멈칫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를 슬쩍 응시했다.
“남작님, 같이 가 달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아직 길도 잘 모르고… 왕자님이 어렵기도 해서요.”
길은 시종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고 알버트와의 사이에 굳이 어렵다는 말을 넣을 필요는 없었지만, 핑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핑계는 슈버트에게 썩 잘 먹혀들었다.
알버트 방 앞에 선 나는 시종 대신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리암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아직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자지는 않는 모양이군.
“왕자님께 전해드릴 음식이 있어서 왔습니다.”
“로제, 들어오거라.”
연이어 알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종의 손에서 음식이 담긴 쟁반을 받아 든 나는 머뭇거리는 슈버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하양이는 내 머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자고 계실 줄 알았는데.”
“누우면 바로 앓을 예정이라, 최대한 시간을 벌고 있는 중이란다.”
알버트가 웃으며 내 말을 받아쳤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픈 사람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리암 앞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알버트가 앉아 있는 소파 앞 테이블에 수제비가 든 그릇을 내려놓았다.
“너야말로 자지 않은 것이 의외구나. 썩 피곤해 보이더니.”
“배도 고파서요. 공작님께서 재료와 장소를 제공해 주신 덕에 해올 수 있었어요.”
“웬일로 음식 색감도 연하고.”
“왕자님께 드릴 음식인걸요!”
누가 들으면 내가 빨간 음식만 만드는 줄 알겠다! 리암과 슈버트가 오해할라. 나는 웃으며 받아쳤다.
“그래서 이게 무엇이냐.”
“해물로 국물을 내고 밀가루 반죽을 건더기로 넣은 수제비예요. 국물은 시원하고 건더기는 쫄깃한 맛이 일품입니다.”
“국물은 따듯한데 어찌 시원하다는 것이냐?”
그것은 한국인만 알 수 있는 시원함…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면서도 시원하다 외치는 것이 진정한 한국인이지만, 여기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하겠지. 나는 말을 정정했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왕자님. 왕자님의 외모에 눈이 너무 부셔서 그랬나 봐요.”
“이제야 평소 같구나.”
“따듯할 때 먹는 게 제일이에요. 아, 그리고 반죽 만드는 데 남작님의 도움이 지대했어요. 꼭 알아주세요.”
“…….”
나는 이쪽을 뚫어져라 보는 슈버트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그의 활약상을 덧붙였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리암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대화하시는 겁니까?”
“네, 제가 왕자님의 외모를 찬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는 쪽으로. 저는 절대 왕자님을 해치지 않고요.”
어쩌면 지금이 이상한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겠다 싶어 얼른 말했다.
“저는 정말 왕자님을 위한 충성스러운 하녀로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마음이 없고….”
“베르젠 남작,”
착각일까. 알버트가 내 말을 끊으려 든 것 같은데.
알버트는 슈버트를 응시하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예!”
갑작스러운 부름에 화들짝 놀란 슈버트가 얼른 알버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번에 로스투라투의 기사단에 거짓 정보를 성공적으로 퍼뜨렸다 들었어. 수고했군.”
“저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슈버트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기사단에 거짓 정보라니. 그의 말 한마디에 아직 반역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나는 아주 조금, 소외감이 들었다.
알버트 앞에 앉아 있는 리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슈버트. 두 남자 사이에 오만하지만, 완벽하게 군림하고 있는 남자.
세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가 내게는 다른 세상인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가 이 거리감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나는 애써 더 씩씩하게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하양이의 꼬리가 내 머리카락 사이에 대롱대롱 흔들렸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알버트의 유려한 손가락이 내 손등을 건드렸다.
“너는 어디서 먹느냐.”
“저는 부엌 가서 먹으려고요.”
“어차피 먹을 거라면 여기서 먹으면 되겠구나.”
“공작님과 이야기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들으면 곤란할 것 같은 이야기기도 하고요.”
아까 리암이 와서 날 내보냈던 것을 보면 더 그럴 것이다.
“이야기는 끝났어. 리암, 피곤할 테니 가서 쉬도록.”
하지만 리암은 내가 가져온 수제비에 정신을 빼앗겨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해물 사이에 동동 떠다니는 수제비를 홀린 것처럼 관찰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수제비인데요.”
“해산물을 이런 곳에….”
리암이 해산물을 사랑한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재료가 정체불명의 음식에 들어 있는 게 언짢은 듯 보였다. 꽤 미식가일지도.
공작도 사람이니 호불호는 있겠지. 하지만 수제비를 먹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건 좀 슬프다. 내가 여태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소설의 주인공인 서이나처럼 화려하고 멋진 요리로 시선부터 사로잡을 수는 없어도 맛은 있단 말이지.
“로제, 어서 네 몫도 가져오거라.”
“아니, 저는 괜찮은데요.”
리암도 쉽게 방을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슈버트도 마찬가지인 지금, 이곳에서 밥을 먹을 생각은 없다. 차라리 얼른 부엌에 가서 편하게 식사하는 게 나았다.
“이만 가보….”
다시 한번 인사를 하려는데, 알버트가 수저로 국물을 떴다. 국물과 함께 잘 익은 낙지가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음식을 음미하는 동안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마치 마스터 x프 결승전에 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맛있구나.”
알버트는 딱 한마디 했다. 순식간에 뿌듯해졌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는 게, 정말 마음에 들었을 때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알버트를 생각하면서 만든 음식이니 더 그랬다. 상대방을 위한 선물이 딱 맞았을 때 드는 기쁨이랄까.
리암이 놀란 듯 알버트를 응시했다. 하지만 알버트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한데 혼자 먹는 건 외롭기도 하고.”
“…예?”
“예?”
알버트의 말에 리암과 슈버트의 입에서 처음 듣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평소에 같이 먹던 사람이 있기는 한데….”
이렇게까지 나오면 어쩔 수 없었다. 알버트가 대놓고 말하면 거절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나가서 나와 하양이 몫이 수제비를 가져오겠다 말하려던 순간, 어딘가에서 천둥이 쳤다.
꼬르르륵.
“…….”
“흐음.”
알버트가 팔짱을 끼고 슈버트와 리암을 살폈다.
“로제.”
“넵.”
“네 몫 외에도 두 그릇 더 가져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야심한 시각, 세 남자와 함께하는 기묘한 식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