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38화 (38/156)

38화.

내가 생각한 메뉴는 해물 수제비였다.

해물을 듬뿍 넣고 끓인 뽀얗고 시원한 국물에 맛있고 쫀득한 수제비! 추운 겨울에 많이 먹었다.

반죽하고 국물 만들면 며칠은 먹기도 하고, msg의 힘을 빌리면 추운 밖에서 돌아와 데워 먹는 국물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쫄깃쫄깃한 수제비는 또 어떻고.

내가 귀차니즘을 이겨내고 요리에 돌입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아,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네.

알버트 입맛에도 맞으려나? 맵지는 않을 텐데 수제비가 아픈 사람한테 맞을지 모르겠다.

우선은 만들고 본다! 정 안 되면 국물과 해물이라도 주지, 뭐.

저녁은 이미 먹고도 남은 시간이라 부엌은 비어 있었다.

내가 왔다는 소리에 황급히 불려왔던 요리사는 내가 직접 요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요리사의 워라밸을 주장했다.

“쉬시는 데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재료하고 향신료만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시종에 이어 요리사도 품에 하양이를 안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성의 사람들에게 완벽히 이상한 여자로 각인되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상당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나는 털어냈다. 어차피 이번에 한 번 보고 말 사이인데.

지속적으로 만나거나 마주치는 사람들이었다면 소문에 대해 더 신경을 썼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

슈버트는 지금 상황을 관찰하려는 건지 의외로 조용했다. 나는 그를 흘끔 보다 우선 손을 씻었다.

“나도오오… 물 조아아아….”

내 품에서 뛰어내린 하양이도 물에 손을 참방댔다. 살짝 물이 튀겨 내 얼굴에 닿았다.

“하양아, 조심해야지!”

장난스럽게 말한 나는 하양이의 손을 직접 잡고 깨끗이 씻겨주었다. 하양이의 조그마한 발톱과 연분홍빛 발바닥을 뽀득뽀득 씻었다. 하양이도 같이 부엌에 있을 거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전 슈버트가 하양이를 데리고 있었지. 문득 생각하며 고개를 올린 나는 하양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울컥한 얼굴로 인상을 쓰고 있는 슈버트와 마주했다.

“…….”

내가 고개를 들 줄 몰랐는지, 방심하고 있던 슈버트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정말 그 나이대 소년 같았다. 슈버트가 제 감정을 숨기기 위해 홱 고개를 돌렸다.

“나, 나는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

목소리 높낮이가 어색한 것이 희극을 보는 것 같았다. 민망한지 내게서 등을 진 슈버트가 쿵쿵거리며 방을 나섰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소리가 잘 울렸다.

하양이가 드래곤으로 보일 리는 없고, 슈버트는 고양이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잘 씻은 하양이에게 속닥거렸다.

“하양아, 아까 전에 남작님하고 놀았어?”

“인가아안 남자가 자알… 놀아줬어….”

만족스러운 듯한 하양이의 말에 슈버트의 호감을 어떻게 사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

“그럼 이따 내가 요리할 때 남작님하고 놀고 있을래?”

바로 반려동물로 공략한다!

“몸으은… 괜차나아…?”

하양이는 밥 소리에 눈을 반짝이다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 무슨 말이든 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난 괜찮아. 아까 전에 그렇게 나가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아… 어차피이… 로제 반려어는 나 안 좋아해애….”

“하양아, 반려 아니야.”

“로제도 부끄럽구나아…?”

하양이는 내 말에 알겠다고 말하는 대신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하양이의 머릿속에서 나와 알버트는 이미 반려로 묶여 버린 듯했다.

알버트를 떠올리던 나는 그가 이야기했던 드래곤을 기억해 냈다. 어쩌면, 하양이가 알고 있는 드래곤일지도 모르잖아?

“아, 맞아. 하양아. 나 화이트 드래곤에 대해 들었어.”

“화이트 드래고온…?”

“왕자님이 성체 화이트 드래곤을 본 적 있으시다고 했거든. 여덟 살 때.”

만약 진짜 성체 드래곤을 만날 수만 있다면 하양이가 죽지 않고 성체 드래곤이 되는 데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알버트가 어떻게 드래곤을 보게 된 건지는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알버트에 대해 아는 것이 책 속에서 배운 걸 말고는 거의 없다.

그가 얼마나 잘생겼는지도 알고, 기쁠 때 어떤 미소를 짓는지 알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알았지만,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지금 그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싫어하는 거, 무서워하는 게 있긴 한지.

“항상 나만 이야기하는 기분이기도 하고….”

알버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해야 한다.

그를 밀어내면서, 거리를 둬야 한다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이기적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이성적인 호감에서만 알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에 대해 알고 싶은걸. 인간적인 호감과 이성적인 호감의 경계는 언제나 어렵다.

끙. 고민하던 나는 하양이가 조용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대답도 안 해줄 애가 아닌데.

“하양아, 어디 아파?”

“성체 드래곤….”

“응.”

“나를 낳았어….”

“…응?”

알버트가 하양이의 어머니를 만난 거야?

어리벙벙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하양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혼자 뒀어….”

하양이는 시무룩하게 말하고서 내 품에 자신의 얼굴을 폭 묻었다. 그제야 퍼뜩 생각이 났다. 드래곤은 낳았다고 해서 가족이 되는 게 아니라고 했었지.

하양이는 거의 태어나자마자 혼자 자라온 것이다. 하양이의 눈동자가 떨렸다. 고개를 축 내리던 하양이는 나를 만나기 전의 일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이상해….”

“뭐가 이상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에… 없었을 때에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보니 몸이 굳는다.

하양이는 이 모든 게 처음이겠지. 누군가와 계속 같이 있는 것도, 말을 걸어주는 것도, 함께 생활하며 맞춰가는 것도.

나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인해서, 하양이는 외로움에 대해 알게 된 걸지도 모른다.

내가 혼자 남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깊숙이 파고들던 공허함을 난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함께하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기에, 상실감이 더 컸다.

하양이는 나와 함께하며 행복한 것 같지만, 그게 과연 좋기만 한 일일까.

하양이와 1년을 보내겠다는 약속. 이렇게 가까워지고, 이 아이에게 감정을 알려주고 추억을 쌓아가면… 난 정말 이 아이를 보내줄 수 있을까?

지금도 이렇게 안타까워하면서.

하양이가 작게 칭얼거렸다.

“맛있는 거 먹고 싶어어….”

우울할 때는 음식이 생각나는 법이지. 이런 것도 날 생각나게 했다.

“얼른 만들어줄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수제비를 맛있게 만들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런데 하양이를 품에 안은 채로 요리하기는 좀 어려운데.

때마침 슈버트가 다시 부엌으로 들어왔다. 아까 전 빨갛던 얼굴은 본래 색을 되찾은 참이었다.

좋아, 완벽한 타이밍이다! 나는 하양이를 품에 안은 채 슈버트 앞에 성큼 다가섰다.

“남작님, 제가 요리를 해야 하는데 하양이를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요. 정말 죄송하지만 잠시만 하양이를 돌봐주실 수 있을까요?”

“…내가?”

“품에 안겨 있는 걸 좋아해서요. 아까도 같이 놀아주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 도와주시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비장하게 말을 맺은 나는 하양이를 천천히 슈버트에게 내밀었다. 슈버트는 얼떨결에 하양이를 품에 안았다. 처음에는 엉거주춤하더니, 이내 하양이를 편안히 안는 게 한두 번 한 솜씨가 아니었다.

동물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데. 새삼 슈버트가 다시 보였다.

“그럼 저는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손을 깨끗이 씻은 나는 안이 오목하게 파인 볼을 꺼내 밀가루를 솔솔 쏟았다. 밀가루에 물을 부어가면서 반죽을 만들고 열심히 치대기 시작했다.

퍽! 퍽퍽! 주먹을 쥐어가며 반죽을 때리는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슈버트가 나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내 행동이 신기한 듯 관찰하는 와중에 하양이는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이 대조되어 보였다. 슈버트가 진지하게 물었다.

“이게 정말 저하께 드릴 요리라고? 이 밀가루 덩어리가?”

“아직 안 끝나서 그렇습니다. 해산물도 많이 남았는걸요.”

“설마 이게 저주의 일부는 아니겠지? 옛날에 읽은 책에 인형을 만들어 상대를 저주하는 방법이 있다고 본 적 있다.”

저주 인형하고 밀가루 반죽은 좀 궤를 달리하는 것 같긴 한데.

“음식으로 누군가 저주하는 건 처음 들어보는데요. 어쩜 그리 잔인한 소리를…!”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휙휙 저었다. 잠시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여준 건 덤이었다. 이상한 오해는 싹부터 자르는 게 나으니까.

“남작님. 더 이상의 상상은 제 음식이 끝난 후에 해주시면 안 될까요? 왕자님을 향한 제 충성이 곡해될까 두렵습니다.”

“충성이라….”

“왕자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만든 사람이니 잠시만 믿어주세요. 저를 믿는 게 아니라 왕자님을요.”

슈버트의 상상력은 내 생각을 뛰어넘었다. 나는 슈버트의 충성심을 자극했다. 그게 먹혀들었는지 슈버트는 조용해졌고 하양이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드디어 부엌에 고요가 찾아왔다. 나는 반죽에 열중했다.

반죽을 숙성시키면 좋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한 덩이가 된 반죽을 볼 안에 다시 넣은 나는 손을 씻고 바로 육수 만들기에 돌입했다.

멸치는 못 찾았으니 야채를 때려 넣기로 했다. 파와 양파, 마늘을 넣고 간이 되라고 후추도 넣었다. 센 불에 냄비가 팔팔 끓게 놔두고 해물 손질을 시작했다.

해물을 담은 상자는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요리사를 따라 재료 창고에 간 나는 신선하게 보관 중인 온갖 재료를 목격했다. 여기가 바닷가라도 되는 것처럼 싱싱한 것들뿐이었다.

리암이 정말 해산물에 진심인 모양이었다.

함부로 쓰면 리암의 증오를 사는 건 아닐까 했는데 거의 매일같이 채워두고 있어서 상관없다 했다.

나는 큰 새우와 오징어, 낙지를 골고루 골라왔다. 홍합도 있길래 큰 것으로! 재료를 고르는 게 이렇게 행복할 줄 몰랐다.

흐르는 물에 모든 해물을 깨끗이 씻은 나는 잠시 목을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고개를 숙이며 홍합을 빡빡 씻다 보니 목이 뻐근했다.

다음으로는 새우 머리를 따고 겉껍질을 벗겼다. 요령이 있어서 익숙하다 보니 속도가 제법 났다. 새우 손질을 끝내고 나서 오징어와 낙지의 손질까지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으….”

기분 좋은 냄새가 솔솔 났다. 요리가 거의 끝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