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알버트가 녹초가 될 때까지 치료해 주었으니, 나는 그가 잠들기 전까지는 방에 있어 주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이참에 알버트에게 해주면 좋을 만한 음식도 좀 적어놓고. 사심 하나 없이 정말 일만 열심히 할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알버트가 날 내보내려 했다. 피곤할 텐데 가서 쉬라며 내보내는데, 혼자 두기 미안해서 더 있으려 하다 실패했다.
“하양이도 널 찾고 있겠구나.”
알버트가 걱정스럽다는 듯, 하양이의 이름까지 손수 불러가며 말했기 때문이다. 아까 전 하양이의 물기 가득한 눈동자가 기억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하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알버트가 하양이 이름까지 들먹인 걸 보니, 정말 혼자 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혼자 쉬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방 밖으로 나온 나는 복도에 기대어 서 있는 리암과 마주쳤다. 차갑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알버트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메이슨 공작님.”
직장 생활과 알버트에게 단련된 내게 리암의 찬바람 정도는 시원한 에어컨이다.
리암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뭐, 말 한마디 하고 미소 한 번 보여줬다고 그의 태도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 비키도록.”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고분고분 자리에서 나왔다.
“방은 시종이 안내해 줄 거다. 저하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면 가만히 있도록.”
“앗, 죄송합니다. 방에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저하의 호의를 네 편의에 맞춰 이용하려는 건가.”
“아니요. 제 고양이를 좀 찾아야 해서… 고양이를 찾고 같이 뭔가 좀 먹고 싶은데 부엌을 빌려도 될까요?”
“부엌을?”
리암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굳이 부엌에 직접 가는 이유를 이해 못 해서겠지. 하지만 하양이도 찾고 싶고, 배도 고프다. 여기 사람들이 해주는 음식도 나쁘지 않긴 한데….
추운 북부지방에 있으니 뭔가 따듯한 국물이 먹고 싶은걸. 시원하고 맑은 국물! 죽만 먹었더니 제대로 만든 요리가 당겨!
리암이 미간을 좁혔다. 그 얼굴이 마치 ‘네가 해봤자 뭘 하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좀 웃겼다.
공작님, 이렇게 읽기 쉬우시면 어떡합니까….
알버트와 팀장님에게 너무 단련되어 있던 걸까. 나는 의외로 사람의 감정이나 표정을 잘 읽는 편일지도 모르겠다.
알버트가 워낙 읽기 어려운 사람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읽는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리암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편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마음대로 하도록. 고양이는 아까 전 슈버트가 데리고 가더군.”
“네, 감사합니다.”
슈버트가 데리고 갔다니. 시종한테 이따 물어보면 될 것 같다. 리암에게 감사 인사를 마저 끝낸 나는 시종을 따라 내 방으로 향했다.
방은 예전에 머물렀던 곳과 비슷한 듯 달랐다. 알버트와 있었던 방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탑보다는 커서 좋았다.
벽난로와 더불어 마법으로 난방이라도 하는 건지 성 안이 훈훈하기는 했지만, 내가 원래 입던 드레스는 확실히 얇은 감이 있었다. 때마침 솜이 누벼진 드레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입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시녀인 듯 보이는 사람 두 명이 기다렸다는 듯 방으로 들어와 드레스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내가 하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는 것 같았다.
여기서 대놓고 나 하녀니까 더 이상 도와주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것도 분위기 깨는 거고….
고민하던 나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일주일만 있다 돌아갈 테고, 굳이 사람들과 불편해질 필요 없으니까.
직접 요리하는 건 좀 이상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리암이 따로 말을 하지 않는 이상 괜찮겠지.
“다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게 저희 일인데….”
귀족 아가씨께서 우리를 칭찬하시다니…! 시녀 둘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저 귀족 아닌데요….
하긴 여주인공이 자신의 상냥함을 부각시킬 만한 상황이긴 했구나. 로판에 정말 흔한 상황이었어.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저은 나는 그제야 확연하게 느껴지는 몸 상태에 깜짝 놀랐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전신이 가뿐했다. 온몸이 아팠던 게 마치 없었던 일 같았다. 아까 전 알버트의 마법이 제대로 먹힌 것 같다.
…앞으로 이런 일로 알버트를 아프게 할 일은 없겠지. 이번 일은 내가 흑마법사였기 때문이라 했으니까.
어쨌거나 그가 나를 치료했고, 내가 로제가 된 이상 나는 흑마법에 관심이 없으니 일은 이대로 종결이었다.
너무 쉽게 끝나니 뭔가 찝찝하긴 하지만… 이건 역시 알버트가 너무 대단한 탓이겠지.
이런 사람이 아군이면 얼마나 편한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아, 흑마법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마법에 대해서도. 성이 큰 만큼 서재도 있을 테니 그곳에서 시간을 좀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랜만에 새로운 곳에 오니 마음이 들떴다.
“자, 그럼 하양이를 찾으러 가볼까.”
개운하게 기지개를 켠 나는 방을 나섰다. 때마침 시종이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
슈버트는 성의 동쪽 끝에 있는 정원을 거닐고 있다 했다.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데 정원이 있다니, 처음에 들었을 때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종을 따라 복도를 거니니 앞에 유리 온실이 보였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다른 사람이 내게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다니! 평생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 없는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짜릿해, 이게 권력의 힘인가?
알버트에게 재산을 받아 시종과 요리사를 들일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이왕이면 잘생긴 사람으로 하고 싶은데.
안에 들어갔던 시종이 밖으로 나왔다. 다만 그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죄송하지만 들어오지 마시라고….”
“음, 혹시 베르젠 님이 고양이를 데리고 계신가요?”
“예? 예, 그렇습니다만….”
“그 고양이가 제 고양이입니다. 데리고 가야 해요.”
그 고양이가 제 겁니다. 나는 당당히 하양이를 요구했다. 내가 하양이와 같이 있었던 세월이 얼마인데.
슈버트가 날 보기 싫다면, 굳이 볼 이유는 없었다. 여기 직접 들어가지 않아도 하양이를 데리고 올 방법은 잘 안다.
“하양이랑 맛있는 거 해 먹을 거라고 전해주시겠어요? 그러면 올 거예요.”
“…고양이가 그렇게 긴 말을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시종은 아리송한 표정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며 나를 향해 뛰어오는 하양이의 모습이 보였다. 조그만 날개를 퍼덕이며 뛰어오는 모습에는 활기가 넘쳤다.
“하양아!”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하양이를 반겼다.
“나 찾으러 와써어어….”
“당연하지, 어디 갔던 거야?”
“조오기… 인간 남자가… 맛있는 거어… 준다길래애….”
“하양아, 맛있는 거 준다고 다 따라가면 안 돼.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해.”
“아냐아… 남자 기운이 좋아… 써어….”
내 말에 하양이가 작게 항의했다. 시종은 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고양이와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니, 미친 것처럼 보이겠지.
“지금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건가?”
뒤에서 삐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나는 슈버트 베르젠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뇨, 남작님은 정말 좋은 분이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말을 잘 돌리는군…. 저하께도 이렇게….”
슈버트가 아득 이를 가는 소리를 냈다. 흉흉한 눈빛이 위협적이었다.
음, 그런데 그 모습도 알버트에게 단련되어 있는 내게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온미남은 대형견. 대형견은 뭐로 호감을 사는 게 제일 나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은 금방 나왔다.
하양이를 품에 꼭 안은 나는 주위를 살피는 시늉을 하고 은밀하게 말했다.
“남작님. 전 지금 왕자님께 바칠 음식을 하러 갈 예정인데요….”
“음식?”
“왕자님도 좋아하신 제 음식, 남작님께도 드리고 싶습니다.”
슈버트 공략 방법은 간단하다. 알버트를 들먹이면 된다.
움찔. 나는 보았다. 슈버트의 어깨가 움직이는 모습을.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도, 독을 탈지 어떻게 알고! 난 아직 널 못 믿는다!”
슈버트가 빨개진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나는 짐짓 슬픈 얼굴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냥 가는 거야?”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평소 근엄하던 모습과 달랐다.
아쉽지? 아쉽지? 몇 번 매달릴 줄 알았던 사람이 안 그러니까!
자고로 사람의 관계 개선에는 밀당이 필수인 법이다.
…물론 알버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슈버트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서는 나를 낮춰야 한다. 그는 나를 위협적인 마녀로 보고 있으니까.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무려 알버트와 같은 요리를 먹게 해준다는 건 그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일 터였다.
헛기침을 한 나는 공손히 말했다.
“제가 남작님께 감히 무엇을 강요할 수 있겠어요. 그건 오히려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슈버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즐겁게 말을 건넸다.
“부엌으로 안내해 주세요.”
시종의 안내를 따라 난 부엌으로 걷기 시작했다. 내 품속에서 헤헤 웃던 하양이가 물었다.
“오늘은 뭐어… 만들 거야아…?”
“뭐 있는지 봐야 할 것 같아.”
국물 요리도 종류가 많으니까. 하지만 머릿속에 생각나는 게 있긴 했다.
나는 시종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혹시 여기 해산물 있나요?”
“해산물이라면….”
“아무거나 괜찮아요. 새우도 좋고, 조개도 좋고. 홍합이나 문어도 좋아요.”
“예, 메이슨 공작님이 좋아하셔서 항상 구비해 두는 편입니다. 바닷가도 멀지 않아서 사시사철 있습니다.”
그때,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
오셨습니까, 호갱님? 나는 놀란 척 입을 살짝 열며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머리가 흐트러진 슈버트가 자세를 바로 하더니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나는 굉장히 뜻밖의 상황을 마주한 사람처럼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남작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저하를 위한 음식에 독이 들어가지는 않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오, 변명 잘 생각했는데? 나는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렸다.
“매우 타당한 이유십니다.”
“…넌 이상하군.”
슈버트가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렸다.
“…마녀가 아니라 바보 같아.”
“남작님. 다 들렸는데요. 마녀가 아니라는 게 증명되면 바보도 괜찮은 것 같아요.”
내 말에 슈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경계를 풀지는 않은 것 같지만, 확실히 나에 대한 이미지는 바뀐 듯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양이와 함께 걸었다.
오랜만에 요리할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