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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36화 (36/156)

36화.

계속 숨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이렇게 빨리 물을 줄은 몰랐다.

모르겠다. 내가 알버트에게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는 게 옳은 일일지. 오히려 그를 더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숨기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물으면 변명하기도 힘들다.

알버트가 이 타이밍을 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너무 삐뚤어진 걸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솔직함에는 솔직함이 답이다.

“…맞아요.”

내 주위를 감싼 빛 속에 앉아 있는 알버트가 마치 성자처럼 보였다. 알버트는 나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변명하지 않을 것도 알았다.”

아까 전까지 슈버트와 리암을 어떻게 구워삶을까 생각하던 내 자신의 양심이 반으로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만 아는 비밀로 하면 완전범죄니까 괜찮아. 나는 반으로 조각난 양심을 다시 붙였다.

“왜냐 물어보면 답해줄 것이냐.”

나는 구슬리듯 말하는 알버트가 얄미워 눈을 부릅떴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든 원하는 답을 하게 만드실 거 알아요, 왕자님.”

무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사람을 원하는 쪽으로 굴리는 방법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 그게 내가 아는 알버트니까!

“너도 나를 좀 파악했구나. 좋아, 로제.”

만족스럽다는 듯 말한 알버트가 턱 끝을 매만졌다.

…뭐지? 변형 문제 맞혔다고 칭찬받는 학생 같은 기분인걸.

어찌 되었든 기회는 왔다. 나는 알버트 설득하기에 돌입했다.

“왕자님, 저는 지금 왕자님께서 느끼시는 감정이 일시적인 거라 생각합니다.”

“일시적이라.”

“그렇잖아요. 처음에 저… 를 많이 싫어하시기도 했고, 탑은 너무 비좁아서 둘밖에 없으니까요.”

“둘밖에 없는 게 왜?”

“그러니까 왕자님께서도 외로우셔서 잠시….”

나는 뒷말을 자연스레 흐렸다.

알버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턱을 괴었다. 흐트러진 숨을 고른 그가 피식 웃었다.

“탑에 있다고 해서 내 심미안이나 성격이 죽는 건 아닌데.”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첫 번째 이유는 완전히 설득 실패였다.

하지만 그가 지금 한 말을 내가 완벽히 믿는 건 아니었다. 알버트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떻게 변하는지는 모르니까.

한마디로 이게 진실인지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사람의 허풍인지 알 수 없다는 소리다.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달라진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더 말해보거라.”

알버트와의 대화는 흡사 창과 방패 같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는 모두 튕겨낼 것 같다는 소리다.

아니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대화는 생각보다는 유하게 흘러가고 있잖아?

언뜻 비치던 미친놈 같은 모습도 보여주지 않고, 내 말을 끊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아직 그를 설득할 기회는 충분해.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갈까 생각하는 와중에 알버트의 숨소리가 고막에 가득 찼다.

후, 후 일정하게 들리는 소리에 자꾸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른 생각 말자. 알버트는 지금 마법을 쓰느라 힘들어서 저러는 거야. 속으로 세뇌하듯 중얼거렸지만, 자꾸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진지하게 물었다.

“왕자님, 지금이 정말 이야기를 이어가기에 알맞은 타이밍일까요?”

내 말에 알버트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답했다.

“아주.”

“옙, 그럼 이어가겠습니다.”

자칫 알버트의 심기를 건드릴 뻔했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뭐 어쩌겠어. 나는 체념한 후 말을 골랐다.

“그리고 저는 하녀예요.”

“그렇구나.”

너무 덤덤히 넘기는 알버트 때문에 당황했다. 알버트가 이렇게 현실감각이 없는 인물이었던가?

아무래도 사태 파악을 못 하는 것이 분명하다.

재벌이 서민들의 생활을 이해 못 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평생 재벌로 살아온 인물이 신입 사원의 고충을 깨달을 리 없지….

“왕자님, 저는 평생 하녀로 살아왔고 왕자님은 왕족이세요.”

사실 로제가 평생 하녀로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잠시 넘어가도록 하자.

“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상처받을 게 두려워요.”

“그렇지 않게 만들면 되겠구나.”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지는 않잖아요.”

“쉽게 되게 만들면 되지.”

알버트가 깔끔하게 끝을 맺었다. 흔들림 없는 시선과 말투는 정말 그 일을 해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말 그럴 것 같, 아냐. 정신 차리자. 말과 행동은 다른 법! 알버트가 아무리 주인공이라 해도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두 번째 이유도 설득 실패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가 더 있느냐.”

알버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마지막 이유까지 말해야 할까, 싶었다.

이건 너무 개인적인 이유이기도 하고, 내 속을 꺼내 보이는 기분이라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기보다 겁쟁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고백하는 거기도 하고.

하지만 이 왕자님 앞에서 내가 뭘 숨길 수 있을까. 나중에 오해할 일이 생기는 것도 싫다.

나는 열리지 않는 입을 떼어, 꼭꼭 숨겼던 마음까지 내려놓았다.

“왕자님의 마음이 변하실까, 무서워요.”

뜻밖에 알버트는 동요했다. 그는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처럼.

“내가 변할 거라 생각하느냐?”

“…왕자님께서 이렇게 변하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금방 좋아해 주셨던 것처럼, 금방 싫어하실까 두려워요. 저는 왕자님께 모든 걸 드리고 난 후일 텐데.”

이건 최소한의 자기방어다.

알버트에게 일단 한번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 그가 순식간에 내 벽을 허물고 모든 것을 잠식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기 전에 그만큼의 확신이 필요했다.

모든 이유를 들은 알버트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숨소리가 점차 느려지고 고요해졌다.

“나를 싫어해서는 아니라는 거구나.”

“이 세상에 왕자님을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나는 진지하게 답했다. 그래, 알버트를 싫어하는 건 무성애자나 가능한 일 아닐까?

알버트를 싫어한다 말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해서 내게서 벗어날 생각을 한다라….”

마법진의 빛이 점차 사그라든다. 내 온몸을 감싸던 빛에 어둠이 먹혀든다. 어둡게 잠긴 그의 눈동자가 새하얀 빛에 비쳐 반짝였다.

“너는 내가 이해한다 해도 믿지 못하겠지.”

알버트는 손에 꼈던 깍지를 풀고, 내 손등을 제 입술 가까이로 가져다 댔다.

“내가 변하지 않는다 해도, 쉬이 믿을 수 없을 테고.”

묘하게 이질적인 감촉이 손등을 짓눌렀다. 그의 콧등이, 길다란 속눈썹이 금방이라도 내 손에 닿을 것 같았다.

입술을 지그시 누른 후 뗀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해보거라.”

“…네?”

“네가 하고 싶은 것 전부.”

그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따스한 시선이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응시했다.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지만….”

포기하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보다는 포식자가 먹잇감을 풀어주고 자비를 베푸는 것에 가까웠다.

그조차도 그의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 같다는 게 문제지만.

“네가 뭘 하든, 그걸 시도하는 것까지는 허락해 주겠다는 말이란다.”

알버트가 내 머리 양쪽에 손을 올렸다. 무게 중심을 옮긴 알버트의 몸은 금방이라도 내 위에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하는 행동까지 막을 수는 없을 테지….”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약한 빛이 그의 얼굴에 얕은 그늘을 드리웠다. 그의 얼굴에 남아 있던 땀방울이 흘러내려 내 볼에 떨어졌다.

“나는 기다리는 걸 꽤 잘해.”

그가 손을 들어 내 볼을 만졌다. 엄지는 땀방울이 떨어졌던 곳을 덧그렸다.

“애원하는 것도 꽤 잘하고.”

알버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놀라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지금도 네게 애원하며 부릴 수 있는 꾀병은 다 부려볼 참이거든.”

알버트의 몸이 기우뚱 움직였다. 그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위, 위-”

위험해, 라고 외치려던 순간, 알버트가 내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내 위에 엎어졌다.

“아?”

그의 단단한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상체만 엎어진 덕에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알버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기다리게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진짜.

이 남자를 어떡하지?

***

치료를 끝낸 후, 알버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로제를 내보냈다. 옆에서 간호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로제는 순순히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는 결국 그 드래곤 새끼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하양이, 라는 이름이 나오자 로제는 순순히 물러갔다. 로제가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던 리암이 들어왔다.

알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제에게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여기 일주일 정도 머물 참이다.”

“무엇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리암은 사실 그게 가장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가 머물러 달라 할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니, 갑자기 성에 돌아와 머물겠다고 하는 알버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도 예의 하녀와 함께 말이다.

“마법사들을 만나야겠구나.”

“직접 가시는 건 현재 위치가 드러날 위험이 있습니다. 제게 계속 맡기시는 게….”

“흑마법이다. 어쩌면 너도 위험할 수 있겠지. 지금 너를 잃는 건 병력에 가장 큰 손실이야.”

리암이 조용해졌다. 그는 검을 쓰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마법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 흑마법을 건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는 것이 좋겠거든.”

그는 리암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로제 아티어스가 흑마법사였다는 사실을.

로제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그녀는 더 이상 흑마법을 쓸 줄도 몰랐고 마법 자체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무지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다른 사람에게 로제가 흑마법사였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알버트는 찬바람을 쐬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창밖에는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탑에 혼돈 마법을 걸어놓았으니 내가 아직 탑 안에 있는 줄 알고 있을 거야.”

그는 로제에게 모든 진실을 말한 게 아니었다. 알버트의 마력은 탑을 벗어나 로제의 흑마법을 푼다 해서 일주일을 앓아누울 정도로 미약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내일부터 사흘은 누워 있어야 할 테지만, 그 후에는 쌩쌩할 것이었다. 한계치에 가까운 마법을 쓰면 오히려 앓아눕는 시간은 비슷했다.

그리고 한계에 도달해 온몸을 잠식하는 고통은 그의 마법을 성장시키기 때문에, 그 고통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피할 수 없었다.

로제가 간호해 준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을 불태우는 것처럼 강렬한 고통이 지나고 난 후, 그는 제 마력이 더 강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옛날부터 겪어왔던 시간이었다.

그는 요양을 핑계로 로제가 잠든 새벽마다 북부 끝자락의 감옥으로 갈 심산이었다. 그곳에는 그동안 납치해 둔 마법사들이 갇혀 있었다. 그곳의 마법사들을 닦달하면 로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필요하다면 마법사들의 마을까지 갈 생각이었고.

“온몸을 찢으면, 한마디 말이라도 건질 테지….”

흑마법사는 정신과 몸이 붕괴되어 사람들 눈에 쉽게 띈다. 마법사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흑마법사의 존재를 리암이 알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알버트가 직접 처리해야 했다.

로제 아티어스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즉시 그의 하녀는 참수를 당할 터이니까.

그게 여기 온 가장 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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