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침묵이 흐르는데, 그게 어색하지 않았다. 단둘이서 방 안에 있는 시간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알버트와 함께 있는 긴장감보다 슈버트와 리암을 상대하며 느끼는 피로가 더 컸다.
둘을 아직 잘 몰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알버트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눈을 내리깐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사람들을 빠르게 물린 만큼 바로 치료해 줄 거라 생각했던 나는 당황했다.
나는 슬쩍 웃으며 물었다.
“왕자님, 치료는…?”
내 말에 문득 정신이 든 듯 눈을 깜빡인 알버트가 일어서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해야겠지.”
내 앞에 선 그가 하양이를 가리켰다.
“우선 이 드래곤 새끼부터 치우는 게 좋겠구나.”
“왕자님, 하양이는 물건이 아닌데요.”
내 말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지. 깜빡했다. 치우는 게 아니라 쫓아내는 거지.”
“…….”
“지금 여기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알버트의 답은 시베리아의 바람처럼 찼다. 자신의 선 안에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가 확연히 보였다.
예전의 로제가 얼마나 다른 알버트를 마주했을지도 상상이 아주 조금 갔다.
평소에 하양이를 좋아하진 않았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그러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아까 전 하양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 대화를 들은 것 같다. 하긴, 듣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가깝긴 했으니까.
나는 하양이의 몸통에 손을 올려 그 앞에 척 내밀었다. 하양이의 맑은 눈망울이 잘 보일 수 있도록!
“왕자님, 하양이가 왕자님 걱정된다고 같이 밤도 샜는데….”
나는 하양이의 장점을 열심히 어필했다. 하지만 알버트는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한 무표정이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면, 이해를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구나.”
“왕자님, 전 왕자님께서 정말 마음이 너그러우시고 아름다우시다 믿어요.”
“마음이 너그러운 것과 지금 드래곤 새끼를 내보내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치료하기 전 안에 있는 사람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야.”
“…….”
으음, 그런가. 알버트가 이렇게 치료를 들먹이면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내가 모르는 분야니까.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하는 건가 봐.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양이와 눈을 맞췄다.
“하양아, 내가 아파서 치료를 해야 하니까 잠시만 떨어져 있자.”
“싫은데….”
하양이가 느릿하게 말하며 울먹였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가슴이 찢어졌다. 안 돼, 우리 하양이!
어떻게 알버트는 이 귀여운 생명체를 보고도 눈 한번 깜빡 안 할 수 있지?
“네가 가지 않으면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을 테고, 그러면 로제가 죽을 확률이 늘어날 수도 있지.”
알버트의 무미건조한 말에 내 품에 안겨 있던 하양이가 몸을 움찔했다. 알버트는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와 다름없이 하양이도 알버트에게 완벽하게 파악당했다. 그는 적재적소에 쓸 말을 다 알고 있었다.
“알겠어어….”
결국 하양이는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며 방을 나섰다.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 화들짝 놀라며, ‘고양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은근히 낯이 익은 목소리는 마치 슈버트 같았는데… 얼굴을 보지 않아서 확실하지 않았다.
“왕자님은 하양이를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나는 아까 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알버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드래곤과는 별 좋은 기억이 없구나.”
“기억이라니, 드래곤을 직접 본 적 있으세요?”
“그래.”
“진짜요? 진짜 성체 드래곤?”
이거는 좀 놀랍다. 성체 드래곤은 보기 힘들다며! 하양이밖에 보지 못한 나는 알버트가 만났다는 드래곤에 흥미가 일었다.
그리고 하양이의 친구가 될 수도 있는 법이잖아. 어쩌면 하양이에게 살아남는 방법을 전수해 줄 수도 있고.
알버트가 눈을 반짝이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덟 살 때였다. 화이트 드래곤이었지. 산처럼 거대했어.”
“어디서 보신 건데요?”
내 말에 알버트는 침묵하다 중얼거렸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의 흐릿한 눈동자가 마치 오래된 상처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나도 한 번 더 만나고 싶었지만… 크면서 다시 만났던 일은 없었단다. 그러니 네 새끼 드래곤을 위한 정보는 없다.”
알버트는 내가 이 대화에서 뭘 원하는지 바로 알아냈다. 나는 머쓱해져 하하 웃었다.
“들켰네요.”
나는 잽싸게 이야기 화제를 돌렸다.
“저는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그런 듯하구나.”
내 모습을 보며 알버트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평소처럼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만날 때 보이는 것처럼 인위적인 것이, 꼭 내 영업용 미소 같아 보였다.
하기야, 탑에서 얼마나 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마법진을 통해야 할 정도로 먼 지방에서 탑을 둘러싼 마법진을 제어하고, 내게 걸린 흑마법까지 치료하려면 힘들 것 같다.
“탑에서 치료하는 건 안 되었을까요?”
“이처럼 큰 마법을 오래 쓰려면 탑에 걸려 있는 마법을 완전히 풀어야 한단다. 그러면 내 힘이 돌아왔다는 것을 들키고, 더 이상 탑에 있을 수 없지.”
“그렇군요….”
아직 알버트의 반역 준비가 끝나지 않았으니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아무것도 못 하는 수동적인 주인공을 좋아한 적은 없었는데, 내가 그 상황에 놓이니 이해가 간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무것도 없다!
“가만히 있거라. 주위에 마법진을 그려야 하니까.”
“걱정 마세요, 저 가만히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잘할 수 있어요.”
그래, 할 수 있는 건 사실 이 정도. 그리고 땅굴을 파지 않는 것뿐. 자기 객관화는 꽤 중요하다고.
마법서를 읽었다고 해서 뭔가 달라진 건 아니다. 알버트와 계약서가 내게 없던 능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뭐, 모든 사람이 능력자인 건 아니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
“왕자님, 뭐 드시고 싶은 건 없으세요?”
몸을 잔뜩 쪼그린 나는 용감히 물었다.
“먹고 싶은 거라.”
“누워 계실 때 해드릴게요. 제가 해드린 것 중에서! 아니면 이참에 요리를 새로 배워도 되고.”
“새로 배운 것도 매울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이번에는 왕자님 취향에 딱 맞춰보겠습니다.”
그의 검지 끝에 피어난 빛이 침대 주변에 뭔가 그리기 시작했다. 알버트는 미간을 좁힌 채 마법진을 그리다 고개를 들었다.
“상관없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매운 거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아픈 사람에게 매운 것만 드리기엔 제 양심도 찔리고….”
“입맛도 변하더구나.”
“…….”
“네가 해주는 것이 맛있어.”
“왕궁 요리사들이 들으면 울겠어요.”
너스레를 떨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럼 제가 성에 있는 동안 왕자님께 죽도 만들어드리고… 볶음밥도 해드리고… 고기도 구워드릴게요.”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것으로 해주거라.”
성이면 재료도 훨씬 많겠지! 북부지방이라 좀 걱정되긴 하지만, 마법사고 공작인 리암의 성이니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를 기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었다.
“자, 이제 자리에 눕거라.”
침대 맡에 기대앉아 있었던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침대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자리에 얌전히 누운 나는 고개를 살짝 내려 알버트를 봤다.
알버트가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내리깔았다. 후, 숨을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알버트 같은 상사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나마 계약직이지만, 일할 때 얼마나 까다로울까. 그를 상사로 둔 리암과 슈버트의 미래에 안녕을 빌어주었다.
엉뚱한 생각을 하던 와중, 침대 주변을 감싼 마법진에서 나온 새하얀 빛은 형체 없는 사슬이 되어 내 몸을 감쌌다.
그에 저항하듯, 내 몸 주변에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특히 손 주변이 제일 잘 보였다.
알버트가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얼굴색에 변화는 없었지만, 그의 얼굴에 점점 땀방울이 맺혔다.
가만히 누워서 편안히 치료를 받고 있는데, 이게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옆에 앉아 있는 왕자님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실시간으로 너무 잘 보여서.
“…왕자님, 제가 가만히 있는 게 좋을까요,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나을까요?”
“무슨 말.”
“…아무거나요.”
“그럼 너에 대해 이야기해 보거라.”
알버트가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에 대한 이야기라. 로제와 너무 차이 나지 않는 이야기가 뭐 있을까?
사실, 나는 내 이야기보다 알버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알버트는 자신에 대해 통 이야기하지 않으니까.
드래곤을 만났다는 것도, 아까 전 처음 알았던 사실이고.
하지만 지금 알버트에게 뭔가 이야기해 달라 그러긴 애매하니까.
고민하던 나는 직장에 다니기 전, 마지막으로 여행 갔던 로스앤젤레스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바닷가로 여행을 간 적 있는데….”
물론 지명이나 시기는 뭉뚱그려 말했다.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푸르던 바다에 눈부시게 쏟아지던 햇빛. 활기 넘치는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 하루 종일 해변가를 거닐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당당히 걷고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원하는 곳에 가고, 미리 찾아놓았던 식당에 가 맛있는 것을 먹고.
나는 여행이 주는 해방감, 새로운 곳을 돌아다니는 경험을 사랑했다.
“여행은 진짜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 나중에 열심히 가야지. 감금되어 여행의 ‘여’ 자도 못 떠올리고 있으니까.
여행 예찬론으로 끝을 맺은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숨을 헐떡이는 알버트를 보고 기겁했다.
“와, 왕자님?”
평소 알버트가 운동할 때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얼굴에 흐른 땀에 머리카락이 젖어 얼굴선을 따라 달라붙었다.
그가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탁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응시했다.
“로제.”
알버트가 내 오른손을 잡았다. 잠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아픈 사람 손도 못 잡게 하는 건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지.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는 손가락 사이사이, 제 손가락을 구겨 넣고 깍지를 꼈다.
“로제.”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짧은 순간이, 내 온몸을 쭈뼛 긴장시켰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손을 쥐는 악력이 강해졌다. 그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네가 내게서 멀어질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안다.”
그의 숨결과 말소리가 내 콧등 위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