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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34화 (34/156)

34화.

알버트가 숨 쉬듯 자연스레 하는 말은 언제나 나를 긴장시킨다. 그가 내뱉는 가벼운 말이 나를 얼마나 두근거리게 하는지 당사자는 알고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단시간에 생겨난 호감에 내 안온한 일상을 바칠 정도로 대범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의 행복이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나를 좋아하는 마음은 쉬이 찾아온 만큼 쉬이 떠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래서 이 왕자님을 완전히 믿지는 못했다.

그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이 모든 고민과 잡생각을 놓은 채 그의 손을 잡고 싶을 때가 있다.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그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하고, 이 왕자님은 내가 계속해서 밀어내도 고고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유지하면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얄밉다. 사람을 잘 다룰 줄 아는 그가, 말 하나가 얼마나 큰 파장을 가지고 오는지 잘 아는 그가.

나는 알버트의 눈을 응시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언뜻 붉은 빛이 다르게 느껴졌다.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방향을 틀기 위해 고개를 든 알버트의 턱선이 고스란히 보였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보석처럼 반짝이는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완벽한 턱선, 툭 튀어나온 목젖 밑으로 이어지는 떡 벌어진 어깨.

…내가 이 말을 한 지 좀 오래된 것 같은데. 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가 나를 흔드는 거라면, 나도 그를 흔들어보고 싶다는 심술이 일었다.

“왕자님.”

“할 말이 있느냐.”

“네, 왕자님. 잘생기셨어요, 오늘도.”

뭐, 이런 말 한마디로 알버트를 두근거리게 만들 수는 없을 테지만, 그도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내 말에 알버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렇게 아부를 하는 이유는?”

솔직함이 답이지. 알버트와 밀당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 마음을 간접적으로라도 조금씩 표현하기로 했다.

나는 솔직히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제 말에 놀라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매번 저만 놀라는 것 같아서.”

“칭찬도 나쁘지는 않지만, 날 놀래키는 방법은 따로 있는데. 직접 알려주는 편이 낫겠어.”

“알려주시면 놀래키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니, 가능할 거다.”

“어떻게요?”

나를 바라보는 눈이 곱게 휘어졌다.

“네가 내게 넘어오면 돼.”

“…….”

“내게 먼저 입을 맞춰주면 돼.”

뻔뻔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정말 알버트 그레이가 맞나 싶다.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자 알버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안 넘어왔구나, 로제. 더 애써야겠어.”

“안 그러셔도 돼요. 지금도 과부하예요.”

“제일 중요한 넌 아직이잖니, 로제.”

언제나처럼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무게가 있다.

나는 그 무게를 파고드는 게 무섭다. 파고드는 순간,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모르는 척, 알아차리지 못한 척하는 게 최고다.

다행히도 우리는 마법진 위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힘차게 이야기했다.

“이제 내려주셔도 돼요. 두통도 없고 저 잘 걸을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알버트가 흩날리는 내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짧은 머리카락을 귀 뒤쪽으로 넘겨주며 닿는 손등이 뜨거웠다.

“그런데 나는 아니라서. 마법을 지속적으로 쓰고 있거든.”

“…왕자님, 요즘 들어 모든 일에 티를 너무 내시는 것 같아요.”

“너는 티 내지 않으면 모르니까.”

그래, 나는 알버트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그래서 찔렸다. 알버트는 날 너무 잘 파악했다.

“하지만 그래도 제가 걷는 편이….”

내가 말을 끝내기 전, 시야가 뒤바뀌었다. 알버트의 품에 폭 안긴 채, 나는 북부에 도착했다.

“…이게 무슨.”

그리고 내 앞에는 리암 메이슨 공작과-

“와, 왕자님?”

황당한 얼굴의 슈버트 베르젠 남작이 서 있었다.

슈버트와 눈을 마주친 나는 그의 입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는 흡사 연인의 외도를 목격한 사람처럼 상처 입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선 리암과 슈버트에게 내 이미지는 망한 것 같다.

나도 일부러 이러고 있는 거 아닌데!

알버트의 품에서 나가기 위해 바둥거렸지만 내 모든 힘을 쏟아부어도 그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하들 앞이라고 무표정한 얼굴을 지어 보이고 있던 알버트가 내 강렬한 저항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가만히 있거라. 나와 가까이 있어야 흑마법 제어도 가능하단다, 로제. 네 두통을 누가 막아주고 있다 생각하느냐?”

…탑을 나오기 전, 알버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태 내가 고통을 못 느끼는 게 아니라 밖에 나오면서 마력을 쓸 수 있게 된 알버트가 막아주고 있는 거였다니!

…안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보다 아픈 게 더 싫었다. 나는 얌전히 있기로 했다.

“착하구나.”

저항을 멈춘 나를 보며 알버트가 조곤조곤 말했다. 잔잔히 미소 짓는 알버트의 모습을 보며 리암이 미간을 좁혔다.

다행히 자리에 온 건 리암과 슈버트뿐이었다. 알버트가 부러 이들만 불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버트는 나를 한 손으로 지탱한 채 리암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암은 진심으로 놀란 듯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미남은 인상을 찡그려도 잘생겼다지만, 지금 리암의 태도는 꽤 무서웠다. 알버트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사악한 마녀로 생각할까, 하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알버트였다.

“이런 시간에 갑작스레 방문해 미안할 따름이구나. 우선, 가져온 외투부터 주거라.”

리암의 손에 들려 있는 외투를 낚아챈 알버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와 함께할 때 보이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아니라, 그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군주의 것이었다.

“설명을 원한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구나. 너를 믿어주었듯, 이제 나를 믿어줘야 할 시간이다.”

알버트는 자신의 결정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자신감은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알겠습니다.”

짧은 말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알버트는 내 위에 커다란 외투를 씌웠다. 내 시야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나를 안은 손아귀는 여전히 단단했다.

그가 걷기 시작했다.

“가지.”

짧은 말에 알버트를 따라 눈밭을 걷는 소리가 들렸다. 리암과 슈버트는 아무런 대꾸 없이 나와 알버트 뒤를 묵묵히 따랐다.

“…다 이상해애애….”

나와 알버트, 그리고 리암과 슈버트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느낀 건지 하양이가 잠자코 있다 중얼거렸다.

평소처럼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양아, 안 자고 뭐 했어.”

내가 속삭이듯 말하자 하양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가 올렸다.

“잠이 안 와아….”

어둠 속에서 하양이의 눈동자가 맑게 반짝였다.

…걱정했구나.

알버트가 아플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작은 드래곤은 나를 걱정했다. 평소 밥 먹듯 자던 잠도 다 뿌리치고 내 곁을 지킬 만큼.

“아프지… 마아….”

“…….”

“나랑 여행… 간다고… 했자나….”

“…….”

“죽지 마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던 하양이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작은 목소리여서 알버트에게 들렸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 하양이랑 여행을 가야지. 내게는 힐링 라이프라는 목표가 있어.

알버트를 따라 수도에 가고 그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알려지는 순간, 내가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할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녀와 왕자님. 가십거리가 되기에는 충분한 이야기였고, 나는 이 소문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너무 잘 알았다.

내 힘만으로 알버트를 밀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사랑에 빠지면 불도저인 건지, 아니면 주변은 안중에도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알버트는 내 생각보다 훨씬 저돌적이었다.

어차피 알버트가 날 치료하고, 그가 다시 깨어나 탑으로 돌아갈 때까지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하는 입장.

앞으로 아예 안 볼 사이도 아닐 테니, 슈버트와 리암에게 점수를 따봐야겠다.

왕국의 모든 사람이 알버트와 내 사이를 반대할 때 슈버트나 리암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버트도 나와 단둘이서 있는 시간이 늘다 보니, 외로워서 그럴 수 있었다.

내가 우선 시야에 사라진 후 그를 이루던 일상으로 돌아가면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시간은 꽤 많은 것을 가능하게 만드니까.

***

나는 어딘가로 옮겨졌다. 리암이 사람들을 물린 건지, 사람들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걸어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근 알버트는 나를 침대 위에 눕혀주었다. 그제야 시야가 밝아졌다.

여전히 두통은 없었다.

천장에 반짝이는 샹들리에에 눈이 부셨다. 나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다시 떴다.

크고 화려한 장식품이 가득한 방은 예전에 내가 묵었던 방보다 훨씬 고풍스러웠다. 아마 이게 리암의 취향인 모양이었다.

“저하.”

리암이 먼저 알버트를 불렀다. 알버트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리암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흑마법을 치료하실 거라는 게… 사실입니까?”

“그래, 그러니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좋겠구나. 방 안에 결계를 쳐야 하거든.”

“말씀하신 대로 독채를 준비했지만, 저하께서 그 정도 힘을 쓰셔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인지 여쭙고 싶은 겁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묘했다. 알버트는 웃으며 답했다.

“아까 전, 나를 믿는다 하더니.”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십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저로서는 아직 파악할 도리가 없습니다.”

리암의 말도 신빙성이 있었다. 여태 알버트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더더욱.

“내게 벌어진 일과 현재 로제를 감싸고 있는 흑마법이 관계가 있다. 직접 파헤치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이야.”

“…저하께서 탑에 갇히신 이유와 이어진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리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법사들을 차례대로 고문할 때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네가 찾아봐야 할 것도 더 생겼구나.”

“예,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타당한 의심이면 죄송할 것도 없지. 이제 나가주겠느냐.”

“알겠습니다, 저하.”

리암의 의심을 잠재우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슈버트는 더 할 말이 있는지 몸을 움직였지만, 리암의 저지에 순식간에 끌려갔다.

다시 우리 둘과 하양이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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