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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33화 (33/156)

33화.

“네가 저주를 받을 확률도 생각해 봤는데, 이러면 말이 안 돼.”

“…….”

“저주를 걸기 위해서는, 흑마법사의 영혼과 마법사의 도구, 그리고 저주를 걸 대상이 한곳에 있어야 하니 말이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생각해도 저주를 받는 건 불가능했다. 여긴 나와 알버트만 남은 탑 안이라서 조건이 애초에 성립되지 않았다.

“네가 흑마법사였다면 모든 게 이해가 가거든. 날 싫어하긴 했어도 감히 날 해할 생각은 하지 못하던 로스투라투가 오합지졸이던 마법사들과 갑자기 연합을 한 것도.”

네가 흑마법사였다면 자신의 생명력을 이용해 사람을 조종할 수 있었을 테니까. 뒷말을 덧붙인 알버트의 눈을 마주하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정말 그랬을 수도 있다. 내가 아닌 ‘로제 아티어스’는 정말 흑마법사였을 수 있다. 로제 아티어스의 이야기는 제대로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엑스트라 악역의 사정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법이다.

“흑마법사의 몸은 마법을 쓸수록 망가지고, 정신적으로도 무너진단다. 네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도, 정신 붕괴에서 온 것이라면 이해가 가.”

이 와중에 내가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까지 모두 이유를 붙이고 있다니.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뀐 것에 대한 내 변명은 아무래도 먹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눈을 치켜뜬 알버트가 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뱀처럼 어깨를 기었다.

“하지만 난 기억은 돌아오는 법이고,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단다.”

…책 속에서 로제를 죽인 알버트가 생각났다.

“넌 언제나 날 원했지.”

느릿하게 말을 잇는 알버트가 어떤 결론을 낼지 사실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나를 향한 의심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안 지금에는 더 그랬다.

“나는 사람을 쉬이 믿지 않아.”

나긋한 어조는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내 얼굴 전체를 집요히 훑더니 나를 잡아먹을 듯 가까워졌다.

내 목을 움켜쥔 손이 점차 뺨을 감쌌다. 낭만적이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난 공포에 질렸다.

알버트가 정말 내 목을 조르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 여태 봐온 나를 믿어달라고,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흑마법사의 기억 따위 남아 있지 않다고.

뺨을 감싼 알버트의 손 위에 내 손을 살며시 얹은 나는 슬쩍 말문을 열었다.

“왕자님, 저는 그러니까….”

알버트는 내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다. 변명을 말하려던 입술이 순식간에 다물어졌다.

“내 말부터 듣거라.”

명령과도 같은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 말이 오히려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래, 우선 알버트의 말부터 들어보고 상황을 정리해야지. 심호흡을 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나는 너를 믿어보아야겠다.”

분위기는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쪽으로 흘러갔다.

“…네?”

죽이지만 말아달라 말하려던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에 놀랐다. 알버트가 나를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기에 더욱.

무슨 생각이지?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응시했다.

알버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너를 믿고 이 탑을 다시 나가겠다는 말이란다, 로제.”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애처럼 화사하게 웃는 얼굴도, 날 죽일 듯 노려보던 얼굴도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나를 믿는다는 말이 사실 전부 믿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알버트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와 난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고, 이곳을 나가면 사실 볼 일이 드문 남이다.

알버트는 일생에 수두룩하게 많은 사람을 보고 만났겠지. 그의 지위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런 그가, 겨우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탑을 다시 나가겠다니.

이런 맹목적인 신뢰는 원한 적도, 받은 적도 없기에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나 나 때문에 알버트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었고.

남주인 만큼 쉬이 죽지는 않겠지만, 이야기는 이미 원작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으니까.

“나가면 어디로 가시려는 거예요?”

“같은 북부로 가겠지. 마법사들도 추운 지방은 기피해서 눈을 속이기가 쉽거든.”

그럼 리암 메이슨 공작과 알버트의 열혈팬인 슈버트 베르젠 남작을 다시 보게 된다는 소리다.

나는 알버트가 이곳에 서둘러 돌아왔던 이유를 상기했다. 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간다면 그는 일주일을 누워 있어야 할 테고, 그런 모습을 숨길 수도 없을 것이다.

“괜찮으세요? 그런 모습 보이기 싫다 하셨잖아요.”

“그런 모습 보여도 된다고 누가 말해줬거든.”

“…….”

“그 말을 한 사람의 진심을 믿어보기로 했어.”

내가 한 말이 다시 돌아왔다. 알버트는 항상 내 말을 허투루 듣는 법이 없었다.

“고맙다는 말은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알버트의 엄지가 내 아랫입술을 잡고 부드럽게 눌렀다. 그의 눈길이 묘한 열기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잡는 손을 밀어냈다.

아직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제가 그렇게 믿기 쉬운 사람인가요?”

“이상한 질문을 하는구나.”

“…아니, 왕자님께서 절 다시 보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믿는다 말씀해 주시니 부담이 확 돼서요.”

그래, 그의 맹목적인 믿음이 부담도 되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순식간에 변한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알버트는 내 무엇을 보고 태도를 바꾼 걸까.

알버트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사람의 본질을 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란다, 로제.”

“…….”

“그래서 나는 너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아.”

나 같은 사람이 뭐라고. 알버트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황송했다.

“네가 내가 기다려 온 사람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

알버트가 속삭이듯 덧붙인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다려 온 사람이라니. 알버트가 평생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말은 원작에도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찰나의 의문은 이내 알버트가 한 말에 금방 사그라들었다.

“부담스러워하라고 한 말도 맞단다.”

“…….”

“이는 네게 족쇄를 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니더냐.”

“…족쇄라니요.”

“넌 아직 내 곁을 떠날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

알버트가 무미건조하게 뱉은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보낼 생각이 없는데.”

나지막이 말을 이은 알버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집요한 시선 안에 찰나의 광기가 보였다.

“…계약은요?”

“계약은 확실히 이행할 거란다. 다만 그게 내게서 먼 곳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넌 그런 것 같아 보여서.”

…언제나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는 왕자님은 당해낼 수 없다. 수도의 땅이 더 비싸기는 할 테지만… 그와 가까이 있으면 오히려 빈부격차가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은데, 그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듯 보였다.

아니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그가 그런 것을 생각할 입장은 아니었을 테니까.

앞에서 대놓고 ‘네, 저는 나가면 왕자님을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고 날 위해 위험을 무릅써 준다는데 ‘네, 저는 평생 왕자님 곁에만 있을 거예요.’라고 거짓말하는 것도 양심에 찔려서 안 되겠고.

뭐, 알버트도 나중에 현실을 차차 깨닫게 될 거라 생각한다. 그는 현명한 사람이니까.

결국 나는 침묵을 택했다. 갑자기 입을 꾹 닫은 이유는 알버트도 충분히 예상했을 터였다.

하지만 알버트의 눈은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듯 나를 보았다.

“침묵도 나쁘지 않아.”

“…….”

“하지만 자발적인 침묵보다는, 내가 주는 것이 더 좋구나.”

내 목 뒤를 잡은 손이 나를 알버트에게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로제.”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건, 무언의 물음이었다.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려 했다.

“너를 위해 쓰러질 사람이란다.”

알버트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내가 이 남자를 이길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락의 뜻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알버트의 입술이 숨을 앗아갔다.

아픈 날 배려하듯 입맞춤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

알버트는 나가기 전 준비를 완벽히 마쳤다. 내가 매주 써야 하는 보고서도 내 필체를 베껴 완벽히 작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사이 나는 병사들과 사이가 좋다는 것을 이용해, 2주 치의 보고서를 미리 전해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알버트는 탑에서 나갈 준비를 마치며 내게 입힌 외투를 다시 한번 꼭 여며주었다. 나는 누가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은 두통에 간신히 서 있는 게 다였다.

“미리 경고하마, 밖에 나가는 순간 몸이 더 아플 수도 있단다.”

“…흑마법이 더 날뛸 수 있으니까요.”

나는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탑 안 정리를 끝낸 나는 하양이를 품에 안았다.

“아… 픈 사라미 바… 뀌었어….”

“응, 하양아. 그래서 나 아픈 거 고치러 가려고.”

알버트는 내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두통도 얼마나 아플지 걱정도 됐다.

“플라이.”

처음 탑을 나갈 때처럼, 알버트가 고요 속에서 주문을 외쳤다.

우리는 어둠 속을 날아올랐다.

“어어…?”

걱정했던 두통은 없었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내가 알버트의 품에 동화 속 공주님처럼 폭 안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는 게 더 빠를 거란다.”

“왕자님께서 허튼 말을 하실 분은 아니지요.”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알버트가 피식 웃었다. 내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내 말을 믿어주니 기쁘구나.”

하양이와 나를 품에 안은 알버트는, 괜한 변명이 아니라는 것처럼 순식간에 움직였다.

사뿐히 뛰어가는 남자는 바람처럼 빨랐다. 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밑에 보이는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하지만 사실 밑의 풍경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알버트의 품에 있으니 긴장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눈을 감으려 했다.

“눈은 감지 말거라.”

알버트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나는 황급히 대꾸했다.

“밑을 보고 있으니 무서워서요.”

“그럼 나를 보면 되겠구나.”

가볍게 말한 알버트는 고개를 숙여 잠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러면 된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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