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나는 알버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시선은 아름다웠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요요히 빛났다. 조각상을 가져다 놓은 것처럼 완벽한 비율의 얼굴에 순간 넋을 잃었다.
그리고 역시 알버트와 거리를 두어야겠다 다짐했다.
내가 알버트에게 빠지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와 나는 너무 거리가 먼 사람이다. 탑은 그와 내 사이를 순식간에 좁혀줬지만, 다시 말해 탑 밖으로 나가면 순식간에 멀어질 수 있는 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능성으로 따지자면, 탑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우리 사이가 유지될 가능성보다 순식간에 멀어져 알현도 못 할 사이가 될 가능성이 훨씬 컸다.
알버트는 왕이 될 사람이다. 지금이야 눈에 콩깍지가 씌어 내게 구애하고 있다지만 밖에 나가 다시 현실을 경험하고 나면 나를 가차 없이 버릴 수도 있는 법이었다.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관계를 이어가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와의 관계를 가볍게 즐기기에 나는 정에 약하다. 그러니 애초에 시작부터 하지 않는 게 좋다.
…물론 시작부터 하지 않는다는 전제는 이미 깨져 버린 듯하지만!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지만!
내 자신에게 변명하자면,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인 셈이다.
그 와중에 알버트는 왜 이리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다.
“…이상하구나.”
알버트의 말은 불안감을 자아냈다.
마치 의사 앞에서 불치병 진단을 기다리는 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알버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말을 쉽사리 잇지 않았다. 중간에 계속되는 침묵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알버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통을 이겨내기 위해 앙다문 입술에서 금방이라도 피가 흐를 것 같았다.
내가 갑작스레 몸을 돌리자 알버트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상해.”
말소리가 음률을 탄다.
알버트의 눈동자가 끈적이는 피처럼 짙었다. 섬뜩한 기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차갑게 눈을 번뜩이는 모습이, 처음 키스할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의 말대로 뭔가 이상하다.
이건 평소 알버트의 모습이 아니다. 아까 나를 부축하던 얼굴도 아니었고 내게 불꽃 플러팅을 날리던 모습도 아니었다.
뭔가 그의 경계심을 자극했다. 그의 태도를 변하게 만들었다.
내가 알버트의 생각을 읽지 않는 이상 정확한 답은 알 수 없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변하는 분위기는 언제 보아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알버트가 그만큼 자신을 잘 감추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알버트에 대해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그에게 묻는 것뿐이다. 그가 알아차린 사실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문제를 알아야 풀 수 있기에, 나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뭐가 이상한 건지 알려주세요.”
알버트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왕자님, 제 생각에는 왕자님께서 지금 절 의심하고 계신 것 같거든요.”
“없다던 눈치가 갑자기 생긴 것 같구나.”
이런 눈치는 또 빠르거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이건 목숨과 직결된 문제 같아서요.”
내 말에 알버트의 주변 공기가 느슨히 풀어졌다. 어쩌면 내 지금 말이 그의 의심을 푸는 유일한 해답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면서 솔직히 대하는 모습이.
“로제.”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은 언제나처럼 달았다. 내가 답하려던 순간, 알버트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길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내 목을 움켜쥐고 뒤통수를 감쌌다. 그가 살짝 힘을 넣는 순간, 나는 그의 가슴에 안겼다.
방금 전까지 살벌한 시선을 보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손길이었다.
“…왕자님?”
“잠시만 이렇게 있거라.”
“이건 허락도 받지 않으신 접….”
“흑심 때문이 아니니 있어 보거라. 확인할 게 있어.”
알버트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랐다. 볼 수 없지만, 아까 전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얼굴을 숨긴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알버트의 품은 시선과 달리 따듯했다.
난 내가 그동안 봐왔던 알버트를 더 믿기로 했다.
“…제가 무서워하는 거 아셨어요?”
“가만히 있으래도. 말을 안 들어, 넌.”
나지막이 말한 그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였다.
그의 손길 때문이었을까, 두통이 살짝 사그라들었다. 숨 쉬기도 한결 편해졌다. 역시 아파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법이다.
“로제.”
“…네.”
“흑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느냐?”
마법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흑마법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름에 ‘흑’이 들어갔으니 좋지 않을 거라는 가정은 할 수 있지만….
아는 게 없다 해도 무방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세계에 대해 정말 아는 게 없다. 탑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배우려는 노력이라도 했을 텐데 탑은 나를 이 세계에 적응하지 않아도 괜찮게 만들어준다. 여기는 다른 세계 같으니까.
“아니요, 없는데요.”
“그럴 것이라 생각했어.”
알면서 물어보는 건 무슨 심보인가요. 항의하려던 나는 순식간에 돌아온 두통에 신음했다.
“흑마법은 매일 네 생명을 좀먹고 들어가. 하지만 그만큼 상대의 영혼이 타락하는 마법이란다.”
“…….”
“넌 지금 흑마법에 걸렸어.”
세상에, 나는 로제를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대체 그녀는 어떤 삶을 산 걸까?
어쩌면 로제가 내 생각보다 깊은 사연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버트와 같이 탑에 들어올 수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로스투라투가 로제를 고른 것도 좀 수상하기는 하다. 왜 하필 로제였을까?
이게 모두 우연일까?
“이번에 달라진 것이라면… 아무래도 나와 탑 바깥에 나갔다 온 게 흑마법이 발동한 계기가 된 것 같구나.”
이 탑 안은 마법을 쓸 수 없게 여러 마법사들이 친 결계가 있다. 알버트를 가두기 위한 덫은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흑마법사는 자신의 영혼을 이용해 본래 실력보다 더한 힘을 보여줄 수 있지만, 흑마법도 마법이다.
결계가 있는 곳에서 발동될 수 없었던 흑마법이 내가 탑을 나가게 되며 기회를 얻어 발동한 것이다. 이미 발동된 흑마법은 탑에 돌아와서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어쨌든 마법을 무효화하는 탑 안이라 두통으로 끝난 모양이었다. 물론 언제까지 두통이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생명을 갉아먹는다니! 이대로라면 내 행복한 미래는 안녕이다. 이 와중에 두통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알버트와 이야기하기 위해 두통을 참고 있긴 하지만, 이 대화도 얼마 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이 대화를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해서 신속하게 결론을 내기로 했다.
심호흡을 한 나는 알버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그를 부드러이 밀어낸 나는 알버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흑마법은 어떻게 없앨 수 있나요?”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알버트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회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눈을 나른하게 치켜뜬 알버트는 날 한참이나 응시하다 느리게 답했다.
“다시 탑을 나가야겠지.”
간단명료하지만 제일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흑마법이 발동되었다면 없어.”
“…….”
“흑마법은 발동된 순간부터 네 몸을 좀먹지. 비록 탑 안에서는 단순히 두통에 그칠지 몰라도 네가 목숨을 잃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목숨과 직결된다니.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좀먹는 병은 생각보다 더 무서웠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원작과 너무 달라진 이야기에 혼란스러워진 건 덤이었다.
원래 로제는 죽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원작에서도 초반에 알버트와 로제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하게만 나와 있었다. 혹시 책 속의 로제에게도 이런 증상이 있었던 걸까? 비중이 낮은 캐릭터라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뿐일까?
…아니면 그녀의 몸에 빙의한 내 존재가 무언가 바꿔놓은 걸까.
갑자기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이대로 죽기는 싫다.
알버트에게 계약서에 적힌 땅도 못 받고, 연금도 못 받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다. 그래서 살아남는다. 간단히 결심을 마친 나는 결연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저는 무얼 해야 하나요?”
알버트는 다시 한번 내 목 뒤에 손을 얹고 나를 그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어느새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는 어슴푸레 빛이 났다.
“흑마법을 정화하는 데 필요한 건 반대 속성의 마법사란다, 로제. 넌 내 치료가 필요해.”
“그러면 왕자님은 또 무리하셔야 하겠군요.”
알버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사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단다.”
“…문제요?”
“시기가 너무 공교롭지 않으냐.”
가까이 느껴지는 숨결 사이로, 알버트가 낮게 속삭였다.
“흑마법을 없애려면 이곳을 오래 벗어나는 게 필수적인 조건이다. 꽤 오래 자리를 비워야 하는 만큼 큰 힘을 써야 하고, 그 뒤 가서 널 치료하는 데도 배의 힘이 들 테지. 그 모든 일을 하고 나면 일주일은 누워 있어야 할 테니 나는 이 며칠 동안 아팠던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울 거다.”
알버트의 말에 요 며칠 아파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버렸다. 말하지 않아서 더 가늠하기 힘든 고통의 깊이가 차마 예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진지하게 물었다.
“이걸 제게 세세히 말씀해 주시는 이유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기 위해선가요? 안 그래도 지금 왕자님께 도움을 요청해도 되나 심각히 고민 중인데요.”
“아니, 내 말은 다르단다.”
그의 손은 어느새 내 턱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시간에 나는 네가 내게 어떤 짓을 하든, 받아들여야 할 거란 말이야.”
“왕자님께 뭘 하기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도 제 목숨이 소중한데.”
“네가 흑마법사라면 다른 이야기겠지.”
“…흑마법사요?”
알버트가 서서히 손을 들었다. 내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한 것을 깨달은 알버트는 검지와 중지를 들었다.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사람이 흑마법에 걸리는 경우는 두 가지거든.”
그가 중지를 접었다.
“첫 번째, 타인이 건 저주를 받았거나.”
다음으로 그가 검지를 접었다.
“두 번째, 자신이 흑마법사거나.”
그제야 나는 서늘했던 시선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의심했던 거다.
내가 흑마법사일 수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