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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31화 (31/156)

31화. [S공금]

얼굴에 뻔뻔한 철판을 깔고 식사를 끝내니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퇴근하고 집으로 대피라도 하겠는데 여긴 탑이었다.

부엌으로 대피하기엔 아직 내가 아팠다. 부엌에 있다가 혼자 쓰러지기라도 하면 위험했다.

고민하던 나는 침대로 대피했다.

침대는 가급적 이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픈 동안에는 침대를 쓰라는 알버트의 뜻을 따랐다.

“윽.”

침대에 누워 베개에 머리를 대는 순간, 견디기 힘들 만큼 두통이 세졌다.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저는… 이만 꿈나라에 가보겠습니다!”

자면 아픈 것도 느끼지 못하고 시간도 잘 가니 얼마나 좋은 생각인가!

하지만 눈을 감은 나는 생각보다 잠드는 게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아프니까 잠이 잘 안 왔다. 마치 다이어트를 할 때면 저녁에 잠이 안 오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잠들려 하니 오히려 잠이 달아났다.

뭐 이런 청개구리 같은 일이….

나는 말똥말똥한 눈을 꾹 감았다. 나는 잔다. 잘 것이다. 잠든다. 양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잔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 필사적인 노력을 이해한 건지, 웃겼던 건지 모르겠지만 알버트가 물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인 걸로 보아서는 두 번째인 것 같긴 했다.

“…자려고 하니까 안 오네요. 몸 상태는 별로인데 잠은 안 오고….”

내가 불평하듯 말하던 순간, 알버트가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네 간호를 해야 할 차례구나.”

제 말이 어떻게 그렇게 변하는 건가요? 나는 얼른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되었다. 너도 괜찮다는 말을 쉬이 하는구나. 고쳐야겠다.”

속내를 숨기는 데 또 실패했다. 옆에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뜨니 침대에 걸터앉은 알버트가 보였다. 내가 그를 간호할 때와 전혀 반대 상황이 된 것이다.

하녀가 어떻게 왕자님에게 뭔가 시키겠어. 나는 눈을 부릅뜨며 알버트에게 단호히 말했다.

“저는 침대를 쓰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황송합니다.”

“헛소리.”

내 진지한 말은 알버트에게 그대로 씹혔다. 헛소리라니, 이건 진심이었는데요.

“밥도 먹여주었는데 뭔들 못 할까.”

알버트의 말에 틀린 건 없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역시 아까 전에 거절해야 했는데, 자본주의가 이렇게 무섭다.

하지만 밥 한번 먹는 대신 내 소유의 땅이 늘어난다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였을 거라고.

어떻게 거절해야 이 왕자님이 내 말을 들어줄까.

안 그래도 두통 때문에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때, 알버트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니, 로제.”

낮은 목소리가 내 몸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몸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뭐부터 시작하면 좋겠냐는 말이 왜 다른 의미로 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 무해해 보이던 얼굴이 위험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불을 코끝까지 올려 덮은 나는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내 말에 알버트가 피식 웃었다.

“그건 곤란하구나, 로제.”

그때, 머리를 반으로 쪼갤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그동안 느꼈던 아픔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엄청난 고통이 나를 덮쳤다.

“아….”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흐으윽….”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전신을 강타했다. 과도한 충격에 순간 정신이 멍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로제?”

알버트의 목소리가 까마득하게 들렸다.

“흐으으….”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울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니었다. 눈가에서 뭔가 흘러내리기 전까지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냥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으….”

나는 이를 아득 물며 신음을 참았다. 너무 세게 물어 이에 금이 가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밀려드는 두통에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싸맸다. 그저 이러고 있으면 고통이 지나갈 것이라 믿어야 했다.

눈을 꾹 감고 있다 뜬 나는 알버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곱게 뜬 두 눈은 속을 알 수 없는 심해처럼 깊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알버트에게 중얼거렸다.

“와, 왕자님은 가서 쉬고 계세요.”

누가 아픈 걸 보고 있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탑이고 날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누군가를 도울 수 없을 때 느끼는 무기력함을 굳이 느끼게 할 필요는 없지. 그러니 알버트와 차라리 멀어지는 게 낫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여기 있으며 알버트랑 멀어질 수가 없다. 알버트를 내 다락방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내가 움직이는 거.

어차피 나중에 부엌에서 음식도 먹어야 하니, 부엌에 내려가 있는 게 낫겠다. 물도 바로 마실 수 있으니 안성맞춤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두통과 씨름한 후 자리에 가까스로 섰다.

“제가 부엌에 내려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실없는 소리.”

알버트는 내 말을 묵살한 후 내 손목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몸에 힘이 다 풀린 상태였던 나는 알버트의 품 안에 쏙 안겼다. 알버트 힘이 얼마나 센지 조금이나마 체감이 됐다.

“기대거라.”

그는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눌렀다. 단단한 가슴은 마치 돌덩이 같았다. 살짝 서늘한 느낌이 있어 두통이 가시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아직 눈물도 채 닦지 않았으면서 가긴 어딜 가.”

나지막하게 말한 알버트의 손이 눈가에 채 가시지 않은 눈물 자국을 쓱 닦아냈다. 커다란 손은 섬세했다. 눈물을 닦은 손가락은 내 코뼈를 쓸고 결국 입술까지 어루만졌다.

고개를 살짝 올린 나와 반대로 고개를 살짝 내린 알버트의 시선이 닿았다.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얼굴 위에 부서져 내렸다.

“네게 뭘 묻는 건 부질없는 짓이겠구나. 이 입술에서 나오는 말에 솔직한 것은 없으니.”

“…왕자님도 뭔가 할 수는 없으시잖아요. 그래서 배려해 드리려….”

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아니, 난 알버트를 생각해서 말한 거였는데 그렇게 받아들이면 억울했다. 나는 내가 아는 만큼, 배려하려 한 것뿐이다.

내 말을 싹둑 자른 알버트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태도도 보거라. 내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데 일가견이 있어.”

…그건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는데요.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은 금방이라도 내 목을 뎅겅 벨 것 같다. 그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굳었다.

그의 표정은 항상 날 그렇게 만든다. 저게 제왕의 모습이겠지. 의도하지 않아도 사람을 절로 긴장하게 만드는 모습.

탑 안에서의 알버트와 탑 바깥에서 마주하게 될 알버트는 정말 다른 인물일 거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시 다가온다. 나는 그 차이를 느끼게 될 날이 조금 두려웠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 아니게 될 날이.

바깥에 나가 자유로워지는 날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날은 알버트에게도 나에게도 터닝포인트가 될 테니까. 나는 흘끔 시선을 돌려 침대 밑에서 나를 걱정스레 응시하는 하양이를 봤다.

내가 부러 시선을 외면하는 것을 알기라도 한 건지, 알버트가 얕은 숨을 내쉬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내려가겠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나를 타박한 알버트는 자신의 품에 반쯤 기대 있는 나를 바로 들었다. 흡사 드라마에 나오는 공주님 안기 같은 장면이었다. 알버트와의 말싸움에서 내가 이길 수도 없고, 두통에 지쳤던 나는 더 이상의 반항을 포기한 채 알버트에게 몸을 맡겼다.

알버트는 나를 다시 침대에 데려갔다. 예전에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지 같았던 곳이, 이제는 마치 내 침대처럼 익숙했다. 그는 나를 침대 한가운데 눕히고 이불까지 고이 덮어주었다. 목 끝까지 덮은 이불은 내게 어디 갈 생각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말싸움은 의미 없다는 사실을 용케 깨달은 모양이야. 그러면 어디가 아픈지 말해보거라.”

알버트는 의사처럼 내 증상을 물었다. 그가 의사가 아닌 것은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괜히 남자주인공이 아니잖아. 알버트가 정말 지금 내 상태를 호전시킬 방법을 알 수도 있는 법이다.

나는 살짝 눈을 감은 채 어디가 아픈지 느끼려 애썼다.

“뒤통수가 제일 아파요. 마치 누가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뒤통수라.”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던 알버트가 내게 다가왔다. 알버트는 왼쪽 손으로 내 목을 받친 후 오른손으로 내 뒤통수를 살짝 만졌다. 그의 손가락이 내 얼굴을 훑었다. 이마, 눈, 코, 입술. 목과 팔 주변까지 살짝 훑는 손길은 햇빛처럼 따스했다.

“이곳?”

“…조금 더 아래요.”

그래서일까. 밀려오는 두통에도 그의 말에 대답할 정신은 있었다. 이상하게 긴장도 됐고.

“이곳이냐.”

“…네.”

후. 가까이서 내쉬는 알버트의 숨결이 내 콧등 위에 내려앉았다. 살짝 뜬 눈 사이로 그의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가슴이 순간 세게 뜀박질을 했다.

…당신은 왜 이렇게 매력적이야?

이런 사람이 나에게 구애하는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 전에 탑을 나가 그에게서 멀어지는 게 그에게 넘어가지 않는 방법일 거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인상을 살풋 찡그린 알버트가 내 뒤통수를 어루만지다 중얼거렸다.

“…증상이 이상하구나.”

헉, 왜 이상하다는 거지. 덜컥 겁이 났다. 설마 이 로제라는 하녀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불치병이라도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곤란한데?

알버트의 얼굴이 심각한 것을 보아서는 정말 뭔가 더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마음의 준비를 한 후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알버트가 나를 뚫어져라 보다 답했다.

“마치 흑마법에 당했을 때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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