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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30화 (30/156)

30화.

내게서 등을 돌린 알버트는 대야를 한 손으로 들었다. 내가 두 손을 다 쓰며 낑낑거리던 모습과 확연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물을 떠 오마.”

알버트는 대야를 들고 가는 뒷모습도 우아했다. 나는 알버트의 기품 넘치는 모습에 감탄하다 다시 머리를 싸맸다.

“아… 누가 때리는 것처럼 아프네.”

이런 두통은 난생처음이었다. 내 짬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두통이라니. X이레놀이 시급하다. 현대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문명의 이기를 알면서 가지지 못하는 현실이 슬펐다.

아프니 알버트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체감이 되었다.

“대체 어떻게 참은 거야?”

나보다 더한 고통을 엄살 한번 없이 버틴 알버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기에.

그래도 버킷 리스트에 적어두었던 일 중에 하나는 이루어졌다.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 있기.

만세! 아프지만 이거 하나는 좋다! 집순이에게 누워 있는 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앗, 돌아오셨어요?”

“그래.”

알버트는 물이 가득 담긴 대야를 내려놓았다. 그가 바닥에 대야를 내려놓는 순간 가득 든 물이 출렁였다.

저걸 한 손으로 들고 오다니. 알버트의 악력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역시 사람은 운동을 해야 한다.

정말 숨 쉬는 것도 운동으로 쳐주면 얼마나 좋을까?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있던 때, 배 속이 배고프다 아우성쳤다. 안 그래도 아파 열량 소모가 심할 텐데 확실히 뭘 먹어줘야 했다.

휴, 죽을 많이 만들어놔서 다행이다. 이런 두통을 안고 음식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니까.

슬슬 내려갔다 와야겠다.

부엌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나는 심호흡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시 두통이 머리를 강타했고 순간 난 몸을 비틀거렸다.

“로제.”

알버트가 자연스레 내 손을 잡고 부축했다.

“뭐 하려는 거냐.”

“저녁 먹어야지요.”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로 겹쳐졌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로제, 나는 괜찮단다.”

아프니 만사가 귀찮았지만 가만히 있는 건 혼자 살 때나 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부엌은 나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왕자님은 괜찮다는 말이 입에 붙으셨어요.”

가볍게 눈을 흘기며 중얼거린 나는 그가 혹시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변명을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제가 배가 고파서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그렇구나.”

내가 배고프다는 말에 알버트는 순순히 져주었다. 그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대신 내가 앞까지 데려다주마.”

“감사합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는 통증에 입술을 깨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몸에 힘을 넣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손만 잡으면 되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알버트의 다른 손이 내 어깨를 자연스레 감쌌다.

“편히 기대거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 알버트가 나를 자신의 몸 쪽으로 기대게 했다. 알버트의 몸은 생각보다 더 든든했다.

긴장감이 몰려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 이런 행동에 설레면 안 되는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에게 기대니 한결 편한 건 사실이었다. 나는 결국 부엌 앞까지 알버트의 부축을 받았다.

“정말, 나중에 제가 왕자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왕자님께 보살핌을 받는 하녀가 어디 있겠어요?”

문 앞에 선 나는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그와 내 사이에 있는 격차를 상기시키는 건 덤이었다.

알버트가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내 속내를 다 들킨 것 같았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나를 잘 읽었다.

알버트는 바로 말을 돌렸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안에 들어갔다 오거라. 이곳에서 기다리마.”

그를 기다리게 만드는 게 미안했다. 나는 되레 씩씩하게 말했다.

“좀 걸릴 텐데, 방에 가서 쉬세요.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 웃었다.

“내게 거짓말이 싫다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로제, 네가 알려주련?”

…하지만 알버트는 내 말을 깔끔히 묵살했다.

정말 당해낼 수 없다.

결국 나는 알버트를 앞에 남겨둔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하양이가 총총 나를 따랐다.

부엌 안에 들어간 나는 냄비를 불 위에 올려 데우기 시작했다.

죽이 데워지는 동안에는 벽에 기대어 쉬었다.

“아프지 마아아….”

하양이가 내 걱정을 하며 울먹였다.

“괜찮아, 안 죽어. 봤지? 아픈 사람이 낫는 거.”

나는 하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했다.

이미 알버트가 말짱해진 사례가 있기에 하양이를 다독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이인짜지…?”

“그래, 그래.”

아직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긴 했지만 하양이는 내 말을 이해한 듯했다.

이윽고 죽이 다 데워졌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계란을 깨 간단히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알버트에게 똑같은 음식만 며칠째 먹게 하는 게 좀 걸렸다.

그처럼 체격 있는 사람이 죽만 먹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다른 일에 집중하니 두통이 좀 가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후다닥 고기도 좀 구웠다. 소고기는 그냥 굽기만 해도 맛있으니 대충 굽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이번에 아픈 거 나으면 양푼비빔밥이라도 해 먹어야겠다.

야채와 고추장, 반숙 계란 후라이까지 넣어 먹으면 꿀맛일 텐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나는 트레이에 올려진 저녁 식사를 확인했다.

죽과 겉절이. 계란말이와 소고기까지. 이 정도면 확실히 노력했다. 잘했어, 로제.

역시 나는 먹는 것에 진심인 한국인이다.

“혼자 들고 가기에는 좀 많은데.”

고민하던 나는 우선 부엌문을 열었다. 벽에 기대 있던 알버트가 눈썹을 올리며 나를 마주했다.

“죽만 만드는 줄 알았더니.”

“왕자님께 어떻게 죽만 드리겠어요. 대신 도와주세요. 저 혼자는 못 들겠어요.”

나는 음식이 그득 담긴 트레이를 알버트에게 내밀었다. 알버트는 트레이에 든 음식을 훑은 후 날 응시하다 물었다.

“배고픈 건 네가 아니었더냐.”

“왕자님도 마찬가지이실 거 알아요. 저도 왕자님을 읽을 수 있는 건 마찬가지랍니다.”

사람이 어떻게 배도 안 고플 수 있어? 그것도 불과 며칠 전까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아팠던 사람이.

“…기다리거라.”

내 말에 늦게 대답한 알버트는 트레이를 들고 나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내가 평소 걸어 다니는 속도가 아닌데? 같은 계단을 올라가는 게 맞는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순식간에 내 앞으로 돌아온 알버트는 숨 한번 헐떡이지 않았다.

“자, 가자꾸나.”

그가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두통이 아까 전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혼자 걸을 정도는 되었지만….

왜일까.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밖에 나가면 모든 게 바뀌고, 알버트도 지금 같지 못할 텐데. 내가 원하는 걸 억눌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애초에 이 남자가 유혹하는데 넘어오지 않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나는 단호히 없을 거라 자부한다.

아프니까 내 강철 멘탈도 평소보다 말랑해진 모양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로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내가 이상했던 건지, 알버트가 속삭이듯 내 이름을 불렀다.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버트가 대신 내 손을 꼭 쥐었기 때문이다.

“어서 가자.”

알버트가 다시 날 그에게 기대게 했다. 그의 온기는 생각보다 훨씬 따듯했다.

***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뀐 것은 정말 마음에 든다. 나는 알버트와 트레이에 담긴 죽을 두고 마주 앉았다.

허여멀건 죽과 계란말이, 소금만 대충 친 고기를 먹고 있는 알버트를 보니 사그라졌던 죄책감이 되살아났다.

알버트의 팬인 슈버트가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하려나.

감히 우리 왕자님에게 이따위 음식을…! 이라고 말하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올지도 모르겠다.

슈버트를 본 건 한순간뿐인데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머릿속에 속속히 그려졌다.

나는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죽을 열심히 휘저었다. 그래, 이거 내가 정성을 담은 맛있는 죽이야.

특급 요리사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맛있는 요리라고.

“왕자님, 여기서 나가면 맛있는 거 많이 드세요.”

“네가 정말 아프긴 하구나. 이야기가 갑자기 왜 그렇게 되는 거야?”

…알버트는 내 충성 어린 조언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억울해져서 항의했다.

“아니…. 제가 할 수 있는 음식 위주로만 해드리는 게 죄송해져서요.”

“…괜찮다. 나도 너처럼 맵고 단 음식에 익숙해지는 참이란다.”

침묵하다 답한 알버트의 목소리에 민망해졌다. 왕자님을 맵단에 입문시켜 버리다니.

하지만 할 수 있는 음식이 그것뿐이었는걸!

민망한 마음에 헛기침을 한 나는 시선을 회피했다. 어쨌든 죽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들려던 순간이었다.

“자, 들거라.”

알버트가 내 앞에 죽을 뜬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뭐죠, 이건?

“아프지 않으냐, 내가 대신 먹여주마.”

“…제 손발은 멀쩡한데요.”

“아픈 사람이 굳이 손발을 쓸 필요는 없지.”

말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건데요? 아픈 것과 손발 쓰는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나는 질세라 내 숟가락을 들었다. 빨리 먹어 알버트에게 내 손발은 말짱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참이었다.

알버트가 미간을 좁혔다. 숟가락을 든 손이 흔들렸다.

“손이 아프구나, 로제. 먹지 않을 참이냐?”

방금 전 계단에서 날듯이 돌아다니던 사람 어디 갔나요?

“명인데.”

물론 나도 알버트에게 밥을 떠먹여주기는 했다.

하지만 아픈 알버트에게 밥을 먹여준 것과 내가 밥을 얻어먹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단호히 거절하려 하….

“네게 하사할 땅의 크기를 늘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냐, 넘어갈 수 없어. 내가 아무리 자본주의의 노예래도!

“아, 거기 요리사가 황궁 다음으로 디저트를 잘 만든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님.”

…지 않았다. 합. 나는 알버트가 내민 숟가락을 덥석 물었다. 나는 역시 자본주의의 노예였다. 땅 만세. 음식 만세!

“그래, 보기 좋구나.”

알버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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