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를 보며 웃는 얼굴이 익숙해졌다. 고깝게 보이던 행동들이 자연스러워졌다.
둘뿐인 탑 안에서, 오로지 자신을 향하는 눈동자를 보면 기묘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알버트는 잠든 로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얼굴에는 한 치의 그림자도 없었다.
있던 두통도 사라지는 것 같다. 알버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로제 곁으로 다가선 알버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너는 모든 게 쉽구나, 로제.”
알버트는 로제를 알았다. 그녀는 어려운 듯 파악하기 쉬웠다. 제게 뻔뻔한 얼굴로 키스를 요구해 놓고, 정작 입을 떼었을 때 마주친 눈동자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당황에 물들어 있었다.
알버트는 그게 자신의 착각일 거라 생각했다.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제와 처음 탑에 갇혔을 때, 그녀가 어떤 눈을 했는지 그는 정확히 기억했다. 저열한 소유욕으로 번들거리던 눈동자는 평생 지긋지긋할 만큼 보아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달라졌다.
왜일까. 홀가분할 줄 알았던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것은.
로제는 이곳을 나간 후 그와 거리를 둘 것이다. 어쩌면 다시 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실을 알고 순응할 사람이다. 그들의 신분차가, 살아온 환경이 완전히 다른 것을 알기 때문에.
알버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색색거리며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는 로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로제, 내가 네 몸에 손대는 걸 허락해 주거라.”
계약서 때문에 그는 로제와 접촉할 때마다 그녀의 허락을 구했다. 마법을 쓴 계약은 아니었지만, 알버트는 제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마법을 쓰지 않은 게 이렇게 다행이라 느껴질 줄은 몰랐지만.’
거절당한 적은 없지만 확실히 껄끄러웠다. 계약서에 무턱대고 사인한 제 자신을 원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평생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해 본 것이 손에 꼽았는데도 불구하고.
“으음… 네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로제는 잠꼬대로 허락했다. 알버트는 무심코 웃었다 이내 인상을 굳혔다.
‘평생 다른 사람 앞에서 자게 하면 안 되겠군.’
눈썹을 올리며 그녀의 잠버릇을 상기하던 알버트는 로제의 목 밑에 팔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로제가 그에게 기댔다.
로제를 품에 안은 알버트는 그녀를 침대 위로 옮겼다. 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밤을 새워 간호하느라 바빴을 테니 쉬게 해주는 것이 좋겠지. 알버트는 잠든 로제의 뺨을 살며시 건드렸다.
자꾸 로제의 버킷 리스트가 떠올랐다.
이곳에 와 만난 새끼 드래곤과 할 일도 적혀 있건만, 그의 존재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탑에서 나가면 분명 떨어져야 할 시간이 올 것이다. 알버트는 로제가 위험해지길 원치 않았다.
반란을 일으키고 마탑까지 자신의 손아귀 안에 넣으려면 자연스레 피를 흘리게 될 터. 자신의 그런 모습을 로제에게 굳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로제가 자신의 본모습을 무서워하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로제는 새하얀 도화지에 적힌 글처럼 읽기 쉬웠다. 감정을 감춰도 티가 났다.
알버트는 로제의 턱을 가볍게 그러쥐고 속삭였다.
“이곳을 나가게 되어도, 내게서 너무 멀어지지는 말거라.”
나는 이곳을 나가도 너를 찾을 테니까.
네가 어디에 있든 간에.
속삭이듯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알버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로제의 턱을 놓아주었다.
알버트는 본래 로제가 누워 있었던 자리를 정리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 따듯한 자리는 생각보다 자기 괜찮을 것 같았다.
침대에 떨어진 물수건을 주운 알버트는 대야에 수건을 담근 후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그 순간, 알버트가 인상을 세게 찌푸렸다.
“으….”
두통이 다시 세게 그를 강타했다. 고통이 다시 온몸을 파고들었다.
눈을 감으며 고통을 감내한 알버트는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누웠다.
다시 잠들 시간이었다. 어떤 표정을 해 제 감정을 감춰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
잠잘 때만큼은, 아무것도 그를 괴롭힐 수 없었다.
***
잠에서 깨어난 나는 생각보다 훨씬 폭신한 침대의 감촉에 뿌듯해했다. 내가 침대를 이렇게 잘 만들었다니.
이 카펫 정말 마음에 들어.
…잠깐, 그런데 카펫치고 너무 푹신한 것 같은데. 딱딱한 바닥이 전혀 느껴지지 않잖아?
불안감이 몰려왔다. 눈을 깜빡이던 나는 현실을 깨달았다.
카펫이 침대만큼 푹신한 것이 아니라 그냥 침대에서 잔 거였다.
대체 내가 여기 어떻게 올라온 거지? 내게 몽유병이라도 있던 건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던 나는 알버트가 밑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나를 옮긴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내다보니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꽤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이다.
이러면 밤을 새운 이유가 없는데….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쉰 나는 대야의 물을 갈고 알버트를 깨워 침대로 옮겼다.
날 침대로 옮겨준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인데 왜 나를 챙겨.
…자꾸 설레게 말이야.
나는 속내를 감추기 위해 눈을 한껏 흘겼다.
“아픈 사람은 왕자님이라는 사실 아시지요?”
알버트가 내 말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요즘 대꾸가 길어졌구나, 로제.”
사근사근 말하는 알버트를 마주하니 등에 소름이 돋았다.
요즘은 알버트가 무표정으로 있을 때보다 웃을 때가 더 무서웠다.
안 그래도 아파서 예민할 텐데 의미 없는 말싸움을 지속할 이유는 없지. 입을 다문 나는 이야기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내가 어제 정성껏 꾸민 방으로!
“제가 여기 꾸민 거 보셨어요?”
“…그래.”
잠시의 침묵 후에 흘러나온 답.
“…마음에 드세요?”
나는 시험을 치는 학생의 마음으로 물었다. 그의 취향과 전혀 다르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알버트가 날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잘했더구나.”
정말 알버트가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미소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가볍지만은 않은 한마디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졌다.
“다행이다.”
나는 뿌듯한 마음에 활짝 웃었다.
그 후 나는 오늘 새벽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몸을 닦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두 번째로 하는 거라 처음보다 수월하기… 는 무슨 처음보다 더 긴장되어 죽을 맛이었다.
알버트와 하는 신체 접촉은 몇 번을 해도 똑같았다. 내가 그의 외모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처럼.
그 뒤에는 알버트와 먹을 저녁을 만들었다. 죽을 좀 더 만든 후 추가로 감자볶음과 겉절이를 만들었다. 다른 건 빼고 기름에 감자만 채 썰어서 볶았다. 감자볶음은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밥반찬으로 제격이었다.
하양이에게 감자볶음과 죽을 건네준 후 방으로 올라온 나는 알버트와 저녁으로 겉절이와 죽을 먹었다.
겉절이는 어디 넣어도 이상한 법이 없다니까. 죽을 한 숟가락 뜨고 위에 아삭하면서 매콤한 겉절이를 올리니 밥이 술술 들어갔다.
우리 왕자님의 두통은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물론 말로는 언제나 괜찮다 했지만… 확실히 인상을 찡그리거나 주먹을 쥐는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내가 사람을 이렇게 열심히 살피게 된 건 전적으로 알버트 탓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내 몸 상태였다.
알버트가 아팠던 이유가 감기도 아닌데, 전염이 된 것처럼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를 누가 두들기는 것처럼 울렸다. 참을 정도는 되어 굳이 티는 내지 않았다.
나도 참는 것에는 익숙했다. 그리고 뭐, 익숙한 아픔이기도 했다. 직장인에게 이런 가벼운 두통 정도야 대수롭지 않다.
나아질 거라 생각하며 넘겼다.
그래서였을까.
알버트가 괜찮아졌을 때,
“…로제?”
이번에는 내가 앓아누웠다.
***
로제의 체력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 날 당황하게 만든 건 알버트의 과잉보호였다.
알버트는 한사코 거절하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생각지도 않았던 스킨십은 덤이었다.
내가 잠꼬대로 동의한 것도 스킨십에 동의한 것으로 쳐져 억울하긴 했는데, 침대에 눕혀준 건 좋았다.
어쨌든 지금 나는 알버트가 그랬듯 침대에 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알버트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흐음….”
알버트의 손이 내 이마에 내려앉았다. 그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마는 제법 뜨거웠다. 그는 자신의 이마와 내 이마를 번갈아 만지며 온도를 비교했다.
알버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게 옮길 병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구나.”
그 의문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숨을 고르다 띄엄띄엄 말했다.
“적어도 왕자님에게서 옮긴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아픈지는 모르겠네요….”
두통은 점점 심해졌다.
“탑의 마법이 네게 전해지지 않도록 마법을 걸었었는데….”
알버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머리에 왱왱 울렸다. 누가 머리 가까이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모, 몸도 추워요….”
추운 지방에 다녀오는 동안 감기라도 옮은 걸까?
내 증상은 알버트의 증상과 비슷한 듯 달랐다. 식은땀이 나는 것은 비슷한데 나는 열이 없었다.
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아픈 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왕자님은 괜찮아지셨잖아요.”
어쨌든 내 눈앞에 서 있는 알버트는 멀쩡해졌다. 그거면 되었다.
내가 챙기는 사람이 아프지 않으면 마음은 편했다. 심적 고통이 신체적 고통보다 훨씬 잔인한 법이다.
“그걸 말이라고….”
내 말에 헛웃음을 짓던 알버트가 앞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파지직. 순간 정전기가 일었다.
“악! 따가워요, 왕자님!”
내가 항의하자 알버트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섬세한 손길은 도자기라도 만지는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푹 쉬어야겠다. 나는 큰맘 먹고 크게 말했다. 월차 내는 것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왕자님, 저 당분간 파업해요.”
“그걸 또 말이라고….”
내 말에 알버트가 코끝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아야야… 당신, 날 더 아프게 하고 있어.
“왕자님, 아파요….”
내가 온 힘을 쥐어짜 항의하자 알버트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네게 일을 시킬 사람으로 보였느냐?”
그제야 그가 왜 화났는지 깨달았다. 아, 화날 만했다. 갈 곳 없이 돌아다니던 시선이 알버트에게 닿았다.
후 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이는 알버트의 속눈썹이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눈동자는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머리를 정돈해 주던 손가락이 턱선을 쓸었다.
묘한 감정을 담은 손길은 내 턱을 그러쥘 듯 말 듯 움직이다 떨어졌다.
알버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쉬거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잔상처럼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