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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28화 (28/156)

28화.

알버트가 잠드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생각해 보니 그가 자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평소 그는 나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잠들었고, 언제나 나보다 먼저 일어났다. 나와 생활 패턴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인가, 이 상황이 신기했다.

눈을 감으니 훨씬 자세히 보이는 얼굴은 몇백 번을 말해도 모자랄 정도로 잘생겼다.

평생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미모였다.

사실 알버트가 언제 잠들었는지 알긴 어려웠다.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이, 평소와 너무 다를 바가 없어서.

점차 내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풀리는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드디어 놓아줬네.”

알버트도 사람이라 잠든 후 무의식의 힘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식은땀 때문에 더울 수 있으니 이불은 조금만 덮어주었다.

해가 뜨는지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커튼을 얼른 쳐 알버트 주위의 빛을 막았다.

확실히 알버트의 식은땀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나아질지, 아니면 중간에 나빠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옆에서 당분간 상태를 살펴봐야 했다.

하지만 계속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건 곤란했다. 하는 일도 없고, 자칫하다간 나도 바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이참에 나는 성에서 가져온 짐을 정리하기로 했다. 알버트가 일어났을 때 방이 화사하게 바뀌어 있으면 기분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내 기분도 마찬가지였다.

밖에 나갔다 와서 그런지 바깥을 향한 갈망은 더 심해졌다. 한 번 나갔다 와서 해소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겨우 잊었던 감각은 한 번의 외출로 되살아났다. 쌀쌀하지만 시원한 공기를 들이켜며 걷는 것이 얼마나 상쾌한지, 자연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도.

다시 돌아온 탑 안은 너무 좁고, 숨 막혔다. 하지만 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상황을 버티게 해주는 건, 언젠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실한 희망이다. 지금을 버티면 내게 주어질 부와 새로운 생활이 보장되어 있다는 희망.

그게 아니었다면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알버트가 혼자 갇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혼자 갇힌다 한들, 미치거나 우울증에 걸리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고개를 저은 나는 방을 한 바퀴 빙 돌며 살폈다.

탑 안에 있는 방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다소 삭막한 감이 있었다.

책 속의 하녀 로제는 인테리어나 소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하녀라는 신분으로 방을 꾸밀 수 있을 리 없으니 이해는 되었다.

나는 현실과 타협해 내가 이곳을 더 좋아할 수 있게 꾸미기로 했다.

나는 내가 가져온 주머니를 바닥에 슬쩍 내려놓았다. 깃털처럼 가벼워서 놓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머니를 열고 손을 쑥 집어넣었다.

제일 먼저 손에 잡힌 건 책이었다.

책이 한 권, 두 권, 세 권…. 무려 열 권이나 나왔다. 열 권의 책 이후에는 책상에 간단히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책장이 나왔다.

나는 알버트의 책상 위에 책장을 올려놓고 지금 꺼낸 책을 차례대로 정리했다. 책의 높이와 크기에 맞춰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정리했다. 무채색이던 책상이 알록달록해졌다.

그다음에는 내가 머물던 손님방에 깔려 있던 적색 카펫이 나왔다.

나는 돌돌 말려 있던 카펫을 펼쳐 침대 옆에 깔았다. 알버트가 일어나 발을 디딜 곳이 푹신푹신해졌다. 눈이 즐거운 색감은 덤이었다.

여분의 카펫은 나중에 다락방에 가져다 놓으려고 놔뒀다.

카펫 다음에는 차례대로 조그만 액자들이 나왔다. 화가의 작품이 담긴 액자들의 크기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가장 작은 걸 책상 한쪽에 올린 후 가장 큰 풍경화를 벽에 기대어 놓았다.

굳이 벽에 걸지 않아도 풍경화는 존재만으로 방을 화사하게 만들어줬다. 보기 좋았다.

방에서 챙겨온 이불과 베개도 나왔다.

이건 나중에 내 방에 가져다 놓고 알버트가 일어나면 바꾸면 될 테고….

이불과 베개를 꺼낸 후에는 작은 책장이 몇 개 더 나왔다.

책장들을 한곳에 모아 올리니 마치 한 개의 거대한 책장처럼 보였다. 꾸미면 꾸밀수록 뿌듯함도 늘어났다.

나는 장식품들을 이용해 탑 안을 꾸미기 시작했다.

벽난로 위에는 크리스마스 때 쓰는 트리 같은 장식을 올려놓고 등을 두었다. 책상 위는 꽃병, 침대 가까이 있는 서랍장 위에는 별 장식을 뒀다.

주머니 안에서는 커튼도 나왔다. 방 안의 커튼을 적색의 커튼으로 바로 바꾸고 싶었지만 내 힘으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중에 알버트에게 부탁해야겠다 마음먹는 수밖에 없었다.

아, 물론 작업을 하면서 알버트의 상태도 확인했다. 중간중간 식은땀을 닦아주며 쉬는 시간도 가졌다.

드디어 인테리어가 끝났다.

방 안은 훨씬 아늑하게 변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모두 내 덕분이니까. 끝나고 나니 보람도 느껴지고, 내심 기대도 되었다.

알버트가 보면 뭐라고 할까?

나는 뿌듯한 마음을 안고 알버트의 상태를 확인했다.

식은땀도 확실히 줄었고 가빴던 숨소리도 한결 편해졌다.

이틀은 더 아파야 한다고 했었지….

오늘처럼 밤을 새워야 하나. 고민에 잠겼던 나는 입을 벌리며 하마처럼 하품했다.

꽤 오래 버티긴 했지.

날이 밝으니 점점 눈꺼풀이 감겼다. 다시 잠의 고비가 찾아온 것이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루를 꼬박 새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지 않으니 두통도 점점 찾아왔다. 알버트의 병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나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우선 일어나면 알버트가 먹을 게 있어야겠지. 알버트는 부엌에 내려갈 수 없으니 미리 가져다 놓아야겠다.

나는 비척비척 계단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물론 자고 있는 하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죽을 데운 나는 그릇에 예쁘게 죽을 담고 트레이에 숟가락과 함께 놓았다.

식어도 괜찮은 반찬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간단히 계란을 삶았다.

죽과 계란이면 간단히 배를 채울 정도는 될 것이다. 다음 요리는 그의 몸 상태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아니면 나도 죽으로 때우는 거고.

아픈 사람 옆에서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음식을 먹을 생각은 없었다.

죽을 책상 위에 올려두니 다시 하품이 몰려왔다. 이제 자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락의 내 방에 올라가서 자고 싶지만, 그러면 알버트가 일어났을 때 나를 찾기 불편할 테니 안 되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위에 가지고 올라가기 위해 개켜둔 이불과 베개를 발견했다.

마침 침대 옆에 푹신한 카펫을 깔아둔 참이었다.

고민하던 나는 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침대 옆에 자리 잡았다. 서랍장 아래 침대 옆 공간에 베개를 놓고 이불을 깔았다. 바닥에서 자는 건 익숙했다.

푹신한 카펫은 뭐로 만들어졌는지 몰라도 간이침대 같은 느낌이 나서 좋았다. 나중에 위에 깔면 당분간 침대를 그리워할 필요 없겠다 싶었다.

나는 알버트의 상태를 살피며 깨어 있을 수 있게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뭐라도 쓸 작정이었다. 그러면 잠들지는 않겠지.

알버트 옆 내 잠자리에 자리 잡은 나는 바닥에 책을 놓고 그 위에 종이를 올려놓았다. 바닥에서도 펜을 쓸 수 있도록 임시방편으로 깐 것이었다.

그림이라도 그릴까, 낙서를 할까. 고민하던 나는 펜으로 바깥에 나가 하고 싶은 것들을 적기로 했다.

너무 좁고, 할 것 없는 이곳을 벗어나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일종의 버킷 리스트.

펜에 잉크를 묻히기 무섭게 나는 리스트를 써 내려갔다.

뭔가 하고 있는데도 눈이 자꾸 감겼다.

아무래도 잠시 자고 일어나야 할 듯했다.

나는 새로 마련한 간이 잠자리 안에 몸을 뉘었다.

“와… 너무 좋아.”

눕기만 했는데 피로의 반이 풀리는 것 같다.

역시 사람은 누워야 해. 나는 눈을 끔뻑이다 결심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야지.”

딱 5분만 자고 일어나 알버트의 상태를 확인해야겠다. 굳게 다짐한 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원망스럽게도 5분의 마법은 나를 배신했다.

5분은 언제나 30분이 되고 한 시간이 되는 법이니까.

***

알버트는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강렬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깼다. 어제저녁처럼 흠뻑 젖은 등이 축축했다.

몸도 천근만근 무거워 기분은 더 곤두박질쳤다. 하루를 맞이하기에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후 숨을 내쉰 알버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이마에서 물수건이 툭 떨어졌다.

알버트는 주위를 둘러보다 뭔가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감싸는 공기가 예전과 달랐다.

삭막했던 방이 아늑하게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 비해 훨씬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자신의 책상은 서재라도 되는 양 고풍스레 꾸며져 있었다.

책상 위 가지런히 정리된 책과 액자, 그리고 잉크가 어디 집무실이라도 가져다 놓은 모양새였다.

가운데 위치한 소파에는 리암의 저택에 있던 것인지 처음 보는 쿠션이 포인트처럼 놓여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처음 보는 장식이 그를 반겼다. 장식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명화가 방에 완벽히 스며들고 있었다.

리암의 성에 있던 것들이었지만 이곳에 가져다 놓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

자신이 잠든 사이 이 모든 걸 해놓을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이곳에 그와 함께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자신과 계약한….

“로제.”

알버트는 로제가 자신의 침대 옆에서 카펫을 깔고 이불을 덮은 채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든 로제의 옆에는 잉크가 번진 종이와 펜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알버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종이를 집었다.

안에 적힌 것을 확인한 알버트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로제를 닮은 동글동글한 글씨로 적힌 문구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바깥에 나가면 하고 싶은 일 버킷 리스트.

‘산책하기’처럼 간단한 말로 시작된 말은 로제의 염원이 담긴 리스트였다.

돌아다니기, 사람들과 말하기, 옷가게 가서 새로운 옷 사보기, 또래 친구 사귀기, 여행 가기, 하양이와 같이 맛있는 음식 먹기, 한 달 동안 요리 안 하고 요리사 쓰기….

평범하지만 이곳에선 이룰 수 없는 소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리스트는 그녀가 이곳을 얼마나 나가고 싶어 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알버트는 잠든 로제의 얼굴을 응시했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을 테지.’

그걸 알지만, 이곳에 있는 것이 좋았다.

때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이곳에만 있고 싶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지위와 의무를 벗어던지고 그저 한 인간일 수 있는 곳에.

처음에는 치가 떨리게 싫었던 로제의 행동들이,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계약을 한 후 점차 익숙해지고, 끝내 제게 스며들었다.

순수한 칭찬을 듣는 것이 익숙해졌다. 좋아하지도 않던 매운 음식이 점점 입맛에 맞았다.

굳건했던 벽을 무너뜨린 건 잔잔히 스며드는 비였다.

마치 그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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