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럼 음식 만들고 오겠습니다.”
나는 알버트가 나를 붙잡을세라 후다닥 내려갔다.
알버트의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왜 그에게 끌려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이게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건가?
알버트가 금방이라도 따라올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발걸음을 옮겨 부엌으로 들어갔다.
알버트가 들어올 수 없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달아오른 얼굴과 긴장을 가라앉혔다.
하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얼굴이… 사과 같아아….”
“그런 건 못 본 척해주는 거란다, 하양아.”
“어떻게에… 본 것으을 못 본 척해애애…?”
하양이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우리 하양이는 순수 그 자체였다.
그건 말이지. 내가 왕자님의 행동에 설레서 그런 거란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인걸?
하양이에게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판단한 나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흠흠, 쌀이 어디 있더라….”
그리고 죽을 만들 재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창고에서 쌀, 파, 당근, 양파와 호박을 챙긴 나는 우선 쌀을 불리기 시작했다.
쌀을 한쪽에 따로 놔둔 후에 도마 위에서 야채를 잘게 다졌다.
파는 죽에 넣을 것보다 더 많이 다졌다.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 계란말이를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알버트 간호를 하며 밤을 새웠더니 나도 배가 고팠다.
나는 그릇 안에 계란을 다섯 개 넣어 열심히 풀었다. 아까 썰어놓은 파를 좀 집어넣고 소금 한 꼬집 넣어 대충 간을 했다.
불 위에 팬을 올리고 기름을 두른 후에는 잠시 기다렸다.
치이익.
한껏 달아오른 팬 위에 달걀물을 부으니 기분 좋은 소리가 울렸다. 무려 달걀 다섯 개나 넣은 계란말이다.
나는 주걱을 이용해 얇은 계란을 층처럼 쌓았다. 초록색 파를 넣었더니 알록달록한 계란말이가 완성되었다.
김이 나는 따듯한 계란말이를 살살 썬 나는 한 개를 내 입안에 집어넣었다.
입안에 달짝지근한 계란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겹겹의 계란이 적당히 짭쪼름했다.
툭툭. 뭔가 내 발을 건드렸다.
“응?”
“나도오오….”
“아, 여기.”
옆에서 하양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길래 하양이의 입에도 하나 집어넣어 주었다.
하양이가 계란말이를 우물우물 씹었다. 처음 작았던 눈이 점차 동그래졌다.
“마이써….”
“그치? 되게 간단한데 맛있어.”
김치찌개랑 먹어도 맛있는데. 역시 나가서 서이나를 만나면 김치 담그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푹 익힌 배추김치로 하는 김치찌개는 환상이니까.
와,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더 먹고 시퍼….”
“자, 여기 있어.”
나는 하양이에게 남은 계란말이를 전부 내밀었다. 하양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가 잘라둔 계란말이를 하나씩 우물우물 씹었다. 하양이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피어났다.
알버트를 위한 계란말이는 다시 하면 된다. 아직 쌀을 불리기 위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다시 계란을 풀었다. 하양이가 계란말이를 먹으며 중얼거렸다.
“저어어번에도 붉은 거어 맛있었다아아….”
제육볶음을 말하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나중에 또 해줄게.”
여기 와서 요리하는 데 취미를 붙이게 된 것 같다.
“지이인짜…?”
“그래.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비록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 대부분이긴 할 테지만.
하양이가 입을 헤 벌리다 조심스레 말했다.
“매이리… 기다려져….”
“…….”
“나한테느은… 아무 의미도 없었는데에….”
하양이의 중얼거림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
새끼 드래곤으로 500년 가까운 시간을 사는 건 하양이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기간과 의미가 비례하지 않았다.
하양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도 하양이에게 정이 갔다.
내 음식이 하양이가 사는 데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게 보람찼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탑 안에서, 내가 마음 붙일 수 있는 아이… 아니, 드래곤.
팬을 불 위에 올려놓은 나는 하양이를 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치킨도 한 번 더 해 먹고, 제육볶음도 좋겠다.”
하양이가 헤벌쭉 웃었다.
“그래애애….”
“…….”
“아직 안 주글 테니까아아….”
하양이가 확신에 차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그 변화가 나는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아주 많이.
***
나는 다시 요리에 돌입했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불린 쌀을 한 번 볶았다. 미리 해둔 밥이 없으니 쓰는 방법이었다.
적당히 물을 넣어가며 쌀을 불린 나는 야채를 넣은 후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소금을 넣어 간을 하고 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휘휘 저었다.
죽이 다 완성된 이후에 미리 준비해 놓은 계란물을 부어 계란말이까지 모두 만든 나는 트레이에 음식을 차례대로 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과 계란말이.
음, 완벽해.
역시 아플 때는 간호해 줄 사람이 있는 게 좋다. 가족이나 친구 같은.
어릴 적 추억과 혼자 살 때의 기억이 교차했다.
추억이 싫지는 않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런 추억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우울한 생각은 하지 말자. 살아 있는 건 좋은 거야. 축복인 거다.
힘든 순간을 이겨내다 보면 어느 순간 살아 있길 잘했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올 테니까.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 점에서 하양이는 걱정이 많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삶과 바꾸고 싶은 고통 앞에서 하양이가 무슨 선택을 할지.
계란말이를 모두 먹은 하양이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양아, 오늘도 여기서 잘 거야?”
“…으응.”
하양이는 언제나 그랬듯 테이블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나는 하양이의 등에 따듯한 담요를 덮어주었다.
“잘 자, 하양아.”
“잘 자아….”
하양이에게 인사를 한 후 불이 잘 꺼졌는지까지 확인한 나는 트레이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왕자님, 저 왔어요.”
소리 내어 내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며 안으로 들어선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고 있는 알버트를 발견했다.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이 그가 얼마나 피곤한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 옆 서랍장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알버트의 상태를 살폈다.
순간 그냥 이대로 자게 둘까 고민했지만, 식은땀도 계속 흘렸고 먹은 것도 없어 속도 비었을 텐데 이대로 재우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했다. 역시나 식은땀의 흔적이 다시 남아 있었다.
일단 먹이고 재우는 것이 낫겠다.
나는 그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흔들었다.
“왕자님.”
알버트가 고개를 젖히고 눈을 살짝 떴다.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잠에 취한 듯 보였다.
아직 덜 깬 것 같아 나는 목소리를 속삭이듯 낮추었다.
“죽 가지고 왔어요. 드실 수 있겠어요?”
후. 긴 숨을 내쉰 알버트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구나.”
확실히 지친 모양이었다. 원래 아플 땐 손가락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긴 하지….
고민하던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원래 이러는 사람은 아닌데….
거리 둬야 하는 것도 맞는데….
아픈 사람 앞에서 그 거리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모를까.
“제가 직접… 드릴게요.”
그래도 직접 말하려니 민망했다.
그건 알버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가 눈을 깜빡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가 뭘 하겠다고?”
헛기침을 하던 나는 다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먹여드릴게요.”
“…….”
“몇 숟갈만이라도 드시고 주무세요. 이대로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채 잠드실 순 없잖아요.”
“…그래.”
희미하게 미소 지은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늘게 뜬 눈매가 묘하게 섹시했다.
평소보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이, 퇴폐적인 분위기가 고혹적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 그가 입을 벌렸다.
순간 입술에 눈길이 갔다. 적당한 두께에, 맞닿았던 감촉….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나는 시선을 돌린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을 한 숟갈 떴다.
나는 알버트의 입안에 숟가락을 넣었다. 알버트가 죽을 씹다 삼켰다.
“하하, 잘 드시네요. 왕자님.”
“네가 한 요리 중에 가장 심심한 맛이구나.”
“나으시면 매운 음식 다 섭렵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이게 원래 내 입맛에 더 맞긴 한데.”
내가 준 죽을 먹는 알버트를 보니 하양이가 생각나서 기분이 묘했다.
무엇보다 이런 심심한 요리가 입맛에 더 맞는다는 알버트의 말에 양심이 찔렸다.
내가 할 줄 알고 좋아하는 요리만 하다 보니 알버트의 입맛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문득 책 속에서 알버트와 사랑에 빠지던 서이나가 떠올랐다. 나보다는 서이나가 알버트의 입맛을 잘 맞출 테니까.
그녀가 섭렵한 요리는 나처럼 맵고 빨간 음식에 치중되어 있지 않을 테고.
“탑에서 나가면 저 말고 왕자님 입맛을 완벽히 맞출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나는 계란말이를 숟가락에 올렸다.
“이상한 소리.”
“…….”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알버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숟가락에 올린 계란말이를 받아먹었다.
아기 새에게 모이를 주는 어미 새가 된 느낌이었다.
알버트는 정말 죽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식사를 만족스럽게 끝냈다. 나는 그가 식사를 끝낸 후 얼굴을 한 번 더 닦아주었다.
소화를 시키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었던 알버트가 드디어 누웠다.
나는 트레이를 내려다 놓은 후 서랍장 위에 다시 물이 가득 담긴 대야와 마른 수건 두 개를 가져다 놓았다.
“너도 자야 하지 않느냐.”
“저 정말 안 졸려요.”
중간에 졸린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기를 지나니 쌩쌩했다. 이참에 짐 정리도 좀 하고 알버트 간호도 계속할 참이었다. 밑에 부엌에 설거짓거리도 좀 있었고.
나는 알버트의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왕자님 먼저 주무세요.”
“…로제.”
“무슨 말을 하셔도 안 통해요. 지금 안 주무시면 저 부엌 내려가서 잘 거예요. 어서 눈 감으시고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자 알버트도 지친 모양인지 눈을 감았다. 나는 그가 눈을 감은 모습을 보며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알버트의 손이 나를 붙잡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 손목을.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잠들 테니 그때까지만 옆에 있어주렴.”
“…….”
“농이 아니라 진심이란다, 로제.”
눈도 감고 있는데, 대체 눈치는 왜 이렇게 빠른지 모르겠다.
보이지 않아도 내 표정이 다 읽히는 건가 싶어 더 신기했다.
결국 나는 그의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