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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26화 (26/156)

26화.

앞만큼이나 잘 짜인 근육이 탄탄한 등은 내가 기대도 티도 안 날 것처럼 든든했다. 적어도 등을 닦을 때는 내 표정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는 대야에 다시 수건을 담갔다.

쪼르륵. 물 짜는 소리와 그의 몸을 닦는 수건의 작은 소음만 울렸다. 탑 안은 언제나 그렇듯 고요했다.

나는 깨끗한 수건으로 그의 등까지 닦는 데 무사히 성공했다.

“이제 도셔도 돼요.”

알버트가 다시 돌아앉았다. 나와 다시 마주한 알버트가 눈썹을 올렸다.

“로제.”

그가 날 불렀다. 내가 고개를 들자 알버트의 손이 내 이마를 찬찬히 쓸었다.

“땀이 났구나.”

“왕자님의 식은땀에 비할 것은 못 되는걸요.”

“그럴 리가.”

세심하고 느릿한 손길이 내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 손길은 주변에 내려앉은 공기처럼 끈적했다.

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네 상태도 물론 살펴야지.”

이 대화가 어디로 튈지 두려웠던 난 얼른 옷부터 집었다.

“…감사합니다. 여기 새로 갈아입으실 옷이에요.”

나는 그가 또 어떤 말을 할까 두려워 옷 입히는 걸 후다닥 끝냈다. 이윽고 알버트는 내 도움을 받아 새 셔츠를 입는 데 성공했다.

끝났다!

모든 일이 끝났다!

아주 긴 대장정을 거쳤지만, 알버트가 새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이제 이불 안으로 들어가셔요, 왕자님. 지금은 더우실 테니 하체만 살짝 덮으시면 될 것 같아요.”

나는 이야기를 꺼내며 알버트의 침대 위 이불을 살짝 접었다.

“그래.”

알버트가 침대에 편안히 누웠다. 식은땀을 닦아줘서 그런가 아까 전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하지만 안심은 되지 않았다. 알버트는 계속 괜찮다고 말하며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몇 시나 되었으려나….”

열심히 간병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계는 새벽 5시를 향하고 있었다. 알버트가 평소 일어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슬슬 졸렸지만, 아직 알버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니 잘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밤을 새우게 된 거, 나는 아직 열이 내리지 않은 알버트를 위해 간단히 죽이라도 만들기로 했다.

왕자님, 제가 이렇게 성실합니다. 알아주세요.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알버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로제.”

“네에…. 에?”

알버트가 내 손목을 잡고 자기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앗.”

내 몸이 그의 옆자리에 엎어졌다. 폭신한 침대라 아프지는 않은데 놀랐다. 뭐지?

고개를 든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왕자님?”

알버트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배는 고프지 않단다. 다만, 한숨 푹 자고 싶구나.”

…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설마 나하고 같이 자자는 건 아니겠지?

이럴 때는 눈치 없는 척 행동하는 게 제일이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헤헤 웃으며 말했다.

“하긴 침대도 푹신하고 왕자님 몸도 뽀송뽀송하니 자기에는 아주 적당한 시간이지요.”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가 말을 회피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침대가 크더구나.”

왜 내 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역시나, 같이 자자는 말이었다.

알버트가 엎어진 내 몸 위에 이불을 살짝 덮어주었다.

“내 옆에서 간호할 거면, 잠도 이곳에서 자는 것이 좋겠지. 내가 바로 널 부를 수 있지 않으냐.”

날 살살 구슬리던 알버트가 쐐기를 박았다.

“너도 졸릴 테고.”

너무 달콤한 유혹이었다. 수면욕이 괜히 인간의 3대 욕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자는 건 아픈 알버트를 내버려 두는 것과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전 안 졸려요.”

내 단호한 대답에 알버트가 침묵하다 물었다. 옅은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이불을 덮어준 손이 내 앞에 보였다. 알버트가 검지와 중지를 들었다.

“두 가지 선택지를 주마.”

선택지가 두 개나 있는데 나는 왜 불안한 건가. 눈을 굴리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가 내게 선택지를 준다는데 어쩌겠어. 들어봐야지.

“나와 입을 맞추겠느냐, 계속 거짓말을 하겠느냐.”

…선택지가 이상한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야기가 여기로 튈 만한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졸린 왕자님에 대한 이야기가 왜 거기로 튀는 걸까요?”

그 와중에 침대가 푹신해서 기분은 좋다. 얼마 전 빨래를 해서 그런지 뽀송뽀송하다. 청량한 냄새도 좋다.

사실 이 냄새가 알버트에게서 나는 건지, 침대에서 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알버트가 눈썹을 올렸다. 팔짱까지 낀 그는 내 태도가 사뭇 서운하다는 듯 물었다.

“아픈 사람한테 어디까지 물을 참이냐.”

이럴 때는 또 잘도 써먹는다니까. 나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아픈 것을 핑계로 그런 말을 하시지 않을 때까지요.”

“진심을 그리 곡해하면 슬프단다, 로제.”

알버트가 손을 올려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명화를 보는 것 같았다.

깊은 눈매는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올곧아서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알버트와 한참이나 눈을 마주쳤다.

먼저 백기를 든 건 나였다.

“왕자님, 한숨 자고 싶으시다면서요.”

“이대로 계속 있어도 좋을 것 같고.”

“…….”

“너랑 있으면 편하거든.”

내 쪽으로 몸을 숙인 알버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픈 것은 익숙한데, 이렇게 편한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이 기분을 더 유지하고 싶구나.”

아픈 것보다 편한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삶이라.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 잠시 누워 있기로 했다.

“그럼 이대로 조금만 있다가 일어설게요.”

아픈 알버트가 내게 뭘 하려는 것도 아니고, 침대 안에 들어간 것도 아니니까. 서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나를 눕게 하는 데 한몫했다.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말을 잘 듣는구나.”

“평소에도 잘 듣습니다.”

“그래, 눈을 감아도 좋단다.”

내가 항의하자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신빙성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누가 들어도 날 재우려는 수작이잖아. 나는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감습니다.”

“내가 널 이렇게 보고 있는다 해도 그럴 것이냐?”

알버트가 제 눈을 더 크게 키웠다.

가까이서 보는 눈동자는 마치 붉은 노을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밝은 적색과 짙은 적색이 뒤섞여 오묘하게 퍼져 나갔다.

알버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는 눈싸움에서 진 적이 없거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는 그를 열심히 흘기다 말에서 모순을 집어냈다.

“왕자님과 감히 눈싸움을 하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알버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들켰구나, 전적은 없단다. 그러니 모두 이긴 거지.”

알버트의 뻔뻔한 태도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서 더. 정말 말의 귀재다, 알버트는.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알버트와 시선을 계속 마주치고 있는 건 확실히 부담스러웠다. 깜빡이는 빈도수조차 나와 전혀 달라서, 눈을 뜰 때마다 그의 시선이 따라왔다.

그에게 뭐라 해야 할까 고민하던 때 알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담스러워하는구나.”

“…….”

“말하지 않아도 보여.”

알버트가 팔을 올렸다. 그의 손이 내 눈두덩이를 조심스레 가렸다. 커다란 손은 거의 내 얼굴의 반을 덮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 이러면 감아주는 것이 어떠니.”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에 내 눈두덩이를 덮은 손. 그리고-

“아픈 사람 소원 들어주는 셈 치거라. 여기서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키스하는 것으로 아마.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거든.”

그의 목소리까지. 모든 게 따듯했다.

…알버트는 한다면 진짜로 할 사람이다.

하지만 이대로 자는 것은 난처했다.

나는 내 눈을 가린 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나와 알버트가 골격부터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알버트를 내가 먼저 만지는 경우는 드무니까.

하지만 알버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슬며시 밀어냈다. 눈가에서 어둠이 걷히고 알버트가 다시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여전히 반짝였다.

밝은 빛을 응시하며,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제가 죽 만들어 올게요.”

팔짱을 낀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죽이 무언데.”

일부러 말꼬리를 돌린 걸 모를 이가 아닌데 내가 말을 피하는 것을 알면서도, 순순히 받아주었다.

“아플 때 먹는 수프 같은 건데, 쌀을 이용해요. 저는 야채죽을 좋아하니까 그거 해 올게요.”

부엌에선 요리사를 따르는 법이지. 한식과 배달 음식만 섭렵했던 난 여기 음식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고로 아플 때 먹는 음식도 수프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야채를 넣고 간장을 살짝 뿌린 죽은 고소해서 아프지 않아도 해 먹던 것 중 하나였다. 만드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간단하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웃었다.

“달거나 짠 음식은 아니고?”

“제 식성을 정확히 파악하셨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아니에요.”

죽 전문점에서는 매운 죽도 판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아플 때 매운 거 먹는 건 저도 안 하는 일이랍니다.

알버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억울했지만 한 번 더 강조해 말했다. 맵지 않아요. 저어언혀 매운 음식이 아니랍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해주는 법이 없구나.”

“음, 평소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것 위주지만 오늘은 아프시니까 물어보는 것으로….”

물론 물어본다고 모두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주문을 받는 것으로 알버트에게 성의를 표하기로 했다.

“혹시 드시고 싶은 것 있으세요?”

알버트가 슬며시 미소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먹고 싶은 것은 없다고? 나는 연이어 물었다. 좋아하는 것은요? 그것도 없단다. 그의 답에 나는 황당해했다.

“…왜 좋아하는 거 물어보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셨어요?”

왕자님, 지금 대답 난해한 클라이언트 같았어요…. 원하는 게 없다면서 또 뭔가 제안하면 거절하는 사람.

알버트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야기 주제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좋겠구나.”

“…처음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했지 않느냐.”

“말 안 해주셨잖아요.”

“네가 좋아하는 것.”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란다, 로제.”

알버트의 목소리가 꿀처럼 사르르 녹았다. 목소리도, 내용도 모두 사람을 홀리기엔 충분했다.

…알버트의 플러팅은 날이 갈수록 세지는 것 같다. 지금도 내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 같고.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는 건 위험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구나.”

알버트의 짓궂은 눈을 보며 나는 뜨끔했다. 그러고 보니 눈을 감고 한숨 자지 않으면 입을 맞추겠다고 했었지.

순간 긴장했다. 알버트가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입을 맞추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나는 먼저 경고했다.

“왕자님, 지금 제게 키스하시면 아픈 걸 옮기실지도 몰라요.”

“그래, 해서 하지 않을 거란다.”

“…네?”

…그럼 여태 말한 건 모두 장난이었다는 건가요?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내가 멍하니 그를 응시하는 순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아프게 할 수는 없으니까.”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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