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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25화 (25/156)

25화.

베르젠 남작은 역시 대단하다 감탄하고 있을 때, 궁금한 게 하나 더 생겼다.

“옷을 갈아입으셨다면 그 전에 입고 계셨던 옷은요?”

“태워 버린다고 가져가더구나.”

“…….”

불에 태우다니, 엔딩이 좀 극단적인데. 아니, 내가 옷에 무슨 마법을 걸었다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베르젠 남작은 아직 내가 마녀라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으니까.

대화 끝에 느낀 건 베르젠 남작의 덕심과 나를 향한 의심밖에 없었지만, 그 덕에 긴장은 풀었다.

드디어 마지막 단추까지 무사히 푼 것이다.

“왕자님, 단추 다 풀었어요.”

내가 뿌듯한 얼굴로 말하자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야겠구나.”

“…다음이요?”

…예?

그래, 일을 하나 끝내자 내게는 더 큰 고난이 찾아온 것이다.

그건 바로-

“이제 내 셔츠를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거라.”

알버트를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히는 일이었다.

단추를 푸는 건 이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다.

“음….”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눈앞의 사람은 환자다. 나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평소보다 흐릿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정신이 들었다.

그의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이 나를 괴롭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자꾸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도 잠시, 그의 현재 상태가 자꾸 날 현실로 끌어당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왕자님.”

그리고 알버트에게 양해를 구하며 대야의 물을 갈았다. 대야 옆에 수건도 두 개 더 가져왔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심호흡을 했다. 내 손이 단추가 풀린 셔츠의 앞섬을 쥐었다. 톡. 목에 흘러내린 땀방울이 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힐끔 시선을 올렸다.

알버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서.”

주문을 말하듯 속삭이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감미로웠다.

또 나를 홀리려는 것처럼.

그의 셔츠를 쥔 내 손이 잠시 떨렸다. 알버트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알버트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버트가 후 숨을 쉬자 손등에 더운 숨이 느껴졌다. 묘한 분위기에 나는 겨우 숨을 삼켰다.

알버트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희미한 미소였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긴장 안 하는 줄 알았더니.”

이 사람은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 상황에 긴장 안 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대체 저를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내 질문에 알버트가 나른한 얼굴로 답했다.

“속내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영혼 없는 미소는 잘도 짓는 충신.”

찔렸다. 알버트에게 내 미소가 영업용인 게 드러날 것은 알았지만 별 상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난 네 그런 미소가 좋구나, 로제.”

“…….”

“난 네 눈치 없는 행동들이 좋다는 말이다.”

할 말이 없었다.

아플 때도 훅 들어오는 건 여전했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급습당한 느낌. 나는 후 숨을 내쉬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나는 알버트를 보며 눈을 가볍게 흘겼다.

“…왕자님은 말의 귀재시네요. 말로도 사람을 홀리실 수 있을 거예요.”

알버트가 미간을 좁히며 입꼬리를 내렸다.

“내 진심을 그리 곡해하면 슬프단다, 로제.”

나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왜 긴장하지 않느냐는 말에서 이런 주제가 나오게 된 걸까요. 혹 왕자님께서 이것까지 의도하신 건 아닐까요?”

사실 농담에 가까웠던 말이었는데, 알버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반쯤은 맞다고 해두자꾸나.”

“그건 무슨….”

알버트의 눈이 무언가 회상하는 듯 짙어졌다.

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긴장하지 않을 줄 알았거든.”

그는 예전의 로제를 떠올리는 듯했다.

“탑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넌 나와 접촉하는 것을 좋아했으니 말이다.”

내가 빙의하기 전의 로제 아티어스.

책은 그녀의 악행을 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었지. 글은 알버트가 그녀를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으로 바로 이어졌다.

나도 그녀가 죽어도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난 로제가 싼 똥을 치우려 무진장 노력 중이란 말이다.

알버트의 얼굴이 한 뼘 더 가까워졌다. 그가 나를 빤히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했지.”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알버트의 말에 나는 방긋 웃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알버트의 턱 밑에서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

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는 끝내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아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구나.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하,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제가 정말 달라 보이긴 하나 봐요.”

웃으며 넘겼지만, 속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알아차렸나?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는 게 여기서는 가능한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 마녀로 몰려서 죽을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여기 사람도 아닌 내가 누군가의 몸에 빙의한 게 좋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나는 이질적인 존재니까.

나는 이게 또 알버트의 시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내가 로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도 어렵다.

지금 내 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까.

내게 마음을 고백한 것과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다른 이야기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알버트를 백 퍼센트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인 것을 들키면 어떻게 될까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알버트는 내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납득할 수 있을까?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진짜 이 몸의 주인 로제 아티어스는 어떻게 되었을지, 현재 내 몸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마지막 로제의 기억은 새하얘지던 시야와 기우뚱 쓰러지던 몸이었다.

어쨌든 이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왕자님, 이제 옷 벗으실 차례예요.”

나는 그가 말을 이어가기 전, 앞섬을 양쪽 손으로 쥐어 옷을 훌러덩 벗겼다.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다는 의지가 내 부끄러움을 앞섰다.

그의 어깨부터 맨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알버트가 운동을 할 때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다. 테이블에 앉아 운동하는 모습을 잠시 구경하는 게 다였으니까.

멀리서 봐도 선명하던 복근과 팔뚝은 가까이서 보니 더 그림 같았다. 잘 짜인 근육은 마치 조각상을 보는 것처럼 정교했다.

군살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그의 생활 반경과 패턴이 읽혔다.

잘생긴 얼굴에 이런 몸이라니.

신께서는 알버트에게 남주인공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게 분명하다. 아니 주시다 못해 넘쳤다.

진정하자. 지금 난 그를 간호해야 한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의 몸을 살폈다.

역시나 식은땀이 잔뜩 흐른 몸은 옷과 같이 흠뻑 젖어 있었다.

알버트가 몸을 씻으러 욕실에 갈 수는 없으니 내가 그의 맨몸을 닦아줘야 했다.

나는 수건을 손에 꼭 쥐었다.

“왕자님, 땀 닦아드릴게요.”

아, 그의 의견을 묻는 걸 깜빡했다.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싫으시면 하지 않을게요. 직접 하셔도 좋고요.”

그때, 알버트와 시선이 맞닿았다. 알버트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거절할 것 같으냐, 로제?”

알버트와 함께 있다 보면 이렇게 시험당하는 것 같을 때가 많다.

하지만 난 이럴 때 눈치가 빠른 편이다.

나는 단호히 답했다.

“아니요.”

내 말이 정답이었는지 알버트가 빙그레 웃었다.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서 뭐 하러 물었느냐.”

“동의는 구하는 게 마땅하니까요.”

날 물끄러미 보던 알버트가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좋은 말이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주인 앞의 강아지가 된 기분인걸. 그래도 정답을 찾아 칭찬받는 건 좋다. 내 능력을 인정받는 거니까.

나는 물에 담갔던 수건을 꽉 짜 그의 몸 위에 올렸다.

알버트와 더 가까이 앉은 나는 그의 목부터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다.

목울대부터 넓은 어깨, 쇄골까지.

물론 아까 전 단추를 풀 때처럼 내 시선은 오로지 수건에 향해 있었다.

수건을 쥐고 있었지만 어찌하다 맨살이 닿으면 불이라도 붙은 듯 손이 달아올랐다.

무념무상의 마음으로 계속 닦으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끝이 났다.

하지만 내 양심은 아직 등이 남았다 소리쳤다.

사실 등에 땀이 제일 많이 났을 텐데, 그게 걸렸다.

결국 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왕자님, 뒤돌아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가 내 말에 고분고분 따라주는 날이 올 줄이야. 감개무량했다.

감개무량도 잠시 내 숨이 멎을 뻔했다.

“어….”

갑작스레 몸을 일으킨 알버트와 그의 몸을 닦느라 가까이 있었던 나의 거리가 너무 순식간에 가까워진 탓이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알버트의 품에 거의 파묻힐 뻔했다.

평소 알버트의 체구가 큰 것은 알았지만, 아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빨리 끝내고 자고 싶다.

몸을 슬슬 뒤로 물린 나는 그와 간격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맨몸인 상태로 나를 응시하던 알버트가 팔짱을 끼며 웃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구나.”

낮은 목소리에 왠지 장난기가 섞인 것 같다.

나는 하하 웃으며 대꾸했다.

“평소 왕자님의 맨몸을 닦는 일은 없으니까요.”

“이런 얼굴도 썩 나쁘지 않은 것 같고.”

난 단박에 항의했다.

“저는 나빠요. 왕자님께서 아프신 상황이 싫습니다.”

“퍽 기쁘구나. 걱정하는 것이냐.”

내가 걱정하는 게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인가 서운했다.

아니, 알버트는 이런 걱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걸까? 왜 내 행동을 생소하다는 듯 받는 걸까.

나는 입꼬리를 축 내리며 내 감정을 표현했다.

“이렇게 아파하시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알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간을 좁히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 아파한 적은 없는 듯한데.”

난 팩트로 승부를 봤다.

“식은땀과 고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 계속 아프지 않다고 말해보았자 하나도 안 통한다고요. 이 패턴 이제 안 통해요!

“이런데도 말하지 않으시는 건 아까 저랑 하셨던 약속 위반이 아닐까 싶습니다, 왕자님.”

나는 사근사근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왕자님께서 제게 거짓말하지 않으실 거라 꿋꿋이 믿고 있답니다.”

알버트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나를 응시했다. 내 말에 찔린 걸까, 아니면 어이가 없는 걸까 모르겠지만.

“마저 하자꾸나.”

피식 웃은 알버트가 등을 돌렸다. 그가 진 건지, 져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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