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알버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의 턱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려하고 매끈한 선이었다.
그가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명이라면 하겠느냐.”
저 말에 내가 대놓고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내 의사를 돌려서 표현했다.
“제가 왕자님의 명을 거부한 적 있던가요.”
“그렇지.”
알버트가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긴 싫구나.”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침대 옆에 쭈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상체를 살짝 일으킨 알버트와 시선이 맞닿았다. 짙은 눈빛이 강렬했다.
사랑은 우연과 타이밍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적당한 타이밍이 계속되지 않으면 식는다.
짧은 외출이었지만 그의 상황에 대해선 충분히 느꼈다. 알버트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보며 많은 걸 깨달았다.
탑이란 특수한 위치가 아니었으면 정말 내가 만날 생각도 못 했을 사람이라는 사실부터, 서로의 생각이나 씀씀이도 많이 다를 거라는 사실까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재벌과의 로맨스는 드라마에나 나온다. 그게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 알기 때문이다.
왕자와 하녀도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장애물이 없는 탑 안에서야 낭만적일 수 있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다.
사람은 끼리끼리 논다. 그게 현실이다.
“왕자님, 전 제 분수를 아는 사람이에요.”
“분수라.”
그는 씁쓸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할 말 없게 만드는구나.”
내가 그 말에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나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제가 선을 그을게요.”
알버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단호히 중얼거렸다.
“그러지 말거라.”
“…….”
“긋지도, 멀어지지도 마.”
“…….”
“그냥 그 자리에 있으라는 말이다.”
상처받은 눈으로 그런 말을 하면, 나도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잖아.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네가 달라진다면,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으니까.”
내가 침묵하는 걸 보면서 알버트가 낮게 덧붙였다.
“명이다.”
“…….”
“듣거라, 로제.”
명이라고 하는 말이 이상하게 애원으로 들려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함인지, 알버트가 목소리 톤을 바꿨다.
“확실히 내가 아프긴 한 모양이구나. 생각지도 않았던 말들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이야기 주제가 바뀌었다. 알버트가 나를 배려해 준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병간호를 제대로 해주는 거겠지.
나는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물을 좀 가져올 수 있게 놓아주시겠어요?”
알버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와 대화를 하는 동안 이마에 다시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마를 한 번 더 닦아주었다.
“금방 돌아올게요.”
내 손목을 잡은 알버트의 손을 가볍게 밀어낸 후, 나는 하양이와 함께 밑에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하양이는 알버트가 걱정되는지 그가 있는 방 쪽을 흘끔흘끔 응시했다.
부엌에 도착한 나는 우선 커다란 물통에 알버트가 마실 물을 가득 담았다.
식은땀을 계속 흘리고 있으니 물을 당연히 보충해야 마땅했다. 부엌에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한 번에 끝내는 것이 나았다.
나는 낑낑거리며 물통을 가지고 올라갔다. 누워 있는 알버트에게 다가간 나는 물통을 내려놓고 컵을 쥐었다.
컵 안에 물을 가득 담아 알버트에게 내밀었다.
“왕자님, 여기 물 드세요.”
알버트는 컵을 손에 쥔 후 숨을 깊게 내쉬었다. 나는 알버트의 상태를 다시 살폈다.
침대에 기대어 몸을 일으킨 알버트의 셔츠는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세상에….”
물통을 가지러 다녀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알버트의 상태는 아까 전보다 훨씬 심해져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괜찮다. 아무래도 한숨 자야겠구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데, 그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평소의 나른한 얼굴에 혈색이 사라져 창백했다.
정말 알버트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는 이 이야기의 남주인공이지만 내가 들어온 지금 책의 내용은 바뀌었다.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알버트는 이미 탑을 나갈 방법을 알고 있고, 실제로 나가 자신의 충신을 흑마법으로부터 구했다.
원래 이 시기에 나가는 게 아니었다면… 그 여파로 인해 정말 알버트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책 속에서 그가 아팠다는 묘사는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다. 그는 믿음직스러운 남주인공일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알버트가 남주인공으로 보이지 않아서.
그냥 한 사람으로 보여서 더 우려가 되었다.
나는 후 숨을 내쉬었다.
알버트가 잘못되지는 않을 거다.
괜히 남주인공이 아니잖아. 이런 곳에서 죽을 리 없다.
하지만 그가 아픈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니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 있다, 로제.”
가까스로 물을 마신 알버트가 내게 빈 컵을 내밀었다.
컵을 든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약은 없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가져다달라 요청할 수도 없다.
끄응. 할 수 있는 게 없다.
감금되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단다, 로제.”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알버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사흘 정도 앓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루도 아니고 사흘이요?!”
세상에! 너무 길잖아! 아프면 안 그래도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데 사흘이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알버트가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호들갑 떠는 나에 비해 알버트는 조용했다. 순간 아픈 사람이 알버트가 아니라 나인가 헷갈릴 정도였다.
식은땀을 잔뜩 흘리면서도 고고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알버트가 신기했다.
알버트가 땀이 흐른 이마를 한 번 닦으며 속삭였다.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란다. 이 정도면 가벼운 대가지.”
내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난 모양이다. 알버트가 나를 다독이듯 말하는 것을 보면.
괜찮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벼운 대가인가요? 평소 아픈 거 티 하나 내지 않으시는 분이 이렇게 아파하시는데.”
“원체 밖에 나갈 수 없던 몸이었고, 리암의 상태가 생각보다 나빴단다. 내 몸이 잘 버틴 거지.”
“…은근슬쩍 자기 자랑 하시는 거예요?”
알버트가 잘난 건 하늘도 알고 땅이 아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알버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걸 생각해내려 머리를 잽싸게 굴렸다.
알버트가 숨을 가쁘게 내쉬다 말했다.
“옷을 좀 갈아입어야 할 것 같구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는 얼굴에서는 처연미까지 보였다. 건장한 남자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알버트는 정말 어떤 것이든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벌어지는 입을 다문 나는 잽싸게 움직였다.
“얼른 가져올게요!”
알버트의 웃옷이 식은땀에 흠뻑 젖은 것은 사실이었다.
서랍장을 연 나는 알버트의 셔츠를 꺼냈다. 다소 거친 감촉은 아까 내가 손님방에서 받았던 것과 전혀 달랐다. 슈버트나 리암이 입고 있던 외투와 겉옷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재질도 좋아 보였고 화려했는데.
…알버트도 그런 게 어울리고 익숙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잘 접은 셔츠를 꾹 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냐. 일을 한 건 로제지, 내가 아니잖아. 나와 로제를 너무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낸 나는 알버트에게 셔츠를 건넸다.
곱게 접힌 셔츠와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번갈아 보던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좀 돕거라.”
“예?”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달라는 말이다, 로제.”
아니, 그걸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닌데….
피식 웃은 알버트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적당히 땀에 젖은 모습이 위험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킬 정도로.
그가 내 손에 셔츠를 다시 얹는 순간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찰나의 접촉이 나를 긴장시켰다.
“내 몸을 본 게 한두 번이더냐.”
제가 왕자님의 몸을 감상한 적은 있지만, 이건 좀 다른 이야기잖아요…?
이건 좀 거절하고 싶었다. 그의 맨살을 보고 만지는 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나는 바로 거절하기로 마음먹고 얼른 입을 열었다.
“왕자님 저는….”
하지만 난 보고 말았다.
고열에 덜덜 떨리는 알버트의 손을.
…겨우 내 부끄럼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알버트는 환자다.
지금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
지금 알버트는 평소의 알버트가 아니다.
나 자신을 세뇌하듯 중얼거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장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알버트가 상체를 세워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답답하다는 듯 단추를 풀던 그가 후 숨을 내쉬며 말했다.
“목에 단추부터 좀 풀어주거라.”
알버트는 요구를 읊은 것뿐인데, 왜 내 얼굴이 달아오른 걸까. 이제 시작인데 왜 내 무덤을 판 것 같은 기분이 들지?
하지만 이제 와서 도망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온 힘을 끌어모아 비장하게 대답했다.
“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그의 셔츠 목 쪽의 단추에 손을 올렸다. 단추 밑 셔츠 사이로 그의 맨살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았다.
그의 목젖에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알버트가 고개를 치켜올렸다.
시선을 마주하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단추만 응시하기 시작했다. 내 열렬한 시선에 단추가 닳아 없어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알버트는 내게 모든 걸 맡긴 채 가만히 있었다. 단추를 다 푼 나는 고개를 슬쩍 올렸다.
살짝 치켜뜬 눈매에는 깊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사람을 홀릴 듯 아름다웠다. 오만하지만 고귀한 성자 같았다.
얼굴을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아직도 멍하니 알버트의 얼굴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가 정말 사람 같지 않아서.
고개를 저은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건 처음 보는 옷 같네요.”
알버트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베르젠 남작이 갈아입어 달라며 가져다준 거다. 금방 갈 거니 괜찮다 했는데도 고집하더구나.”
“아하.”
알버트를 끔찍이 생각하는 슈버트라면 그럴 만했다.
탑 안에서 알버트가 입고 생활하는 옷이 그의 눈에 찼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알버트의 체격에 맞는 옷을 바로 가져오다니! 그의 덕심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걸 보여주는 행동 같았다.
혹 알버트를 만나기만을 기다리며 모았던 것은 아닐까?
역시 난 베르젠 남작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