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아픈 건 나인데 네가 더 단호하구나.”
알버트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윽, 찔렸다. 나는 하양이를 내려놓고 알버트에게 다시 다가갔다.
“왕자님, 일어날 수 있으시겠어요?”
알버트가 그제야 눈을 떴다.
적색의 눈동자가 오로지 나를 향한다.
그의 몸 상태와 상관없이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던 날처럼.
우리가 입을 맞추던 날처럼.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로제.”
그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이마가 불타는 걸 확인했는데, 행동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저게 사람인가 싶다.
대체 어떤 삶을 살면, 저 정도의 정신력을 지닐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살아야 저 정도의 오기와 기품이 탑재될 수 있는 걸까.
내가 아는 알버트의 과거는 편린에 불과하다. 고자인 왕에게 우습게 보일 정도로 보잘 것 없었던 생. 모든 걸 잃었던 유년 시절.
고작 말 몇 마디로 끝내기에는 너무 비극적인 서사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모든 걸 가지고 제위에 올랐다.
그가 날 재촉하듯 말했다.
“내려가자.”
알버트가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난 주머니와 하양이를 들고 그를 뒤따랐다.
자신의 방으로 내려온 그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말 그대로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은 채 몸만.
평소 저러지 않을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정신이 확 들었다.
오늘 잠자기는 글렀다.
“왕자님, 제가 세수하실 물을 준비해 올게요.”
우선 지금 상태로 일어나는 것은 글렀으니 목욕은 못 할 테고 얼굴이라도 깨끗이 닦고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줘야겠다.
나는 욕실로 가 수도꼭지를 돌렸다. 탑 안에는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이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깔끔하고 물도 잘 나오는 욕실이 딸려 있었다.
우선 적당한 크기의 천을 찾아 물에 담갔다가 짜낸 나는 대야에 물을 가득 담고 수건을 준비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알버트에게 대야를 내밀려다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눈을 감은 알버트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러면 잠시 일어나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내가 온 걸 본 알버트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저은 후 입을 열었다.
“왕자님.”
“말하거라.”
“제가 왕자님을 만져도 될까요?”
사람이 계약보다 먼저다.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다.
“이거 되게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알지만 전 정말 사심 없이….”
“왜 네 행동을 변명하려 하느냐.”
“…….”
“네가 날 간호하려 하는 건 바보라도 알 터인데.”
그의 말에 이상하게 찔렸다. 그래, 굳이 변명할 때가 아닌데 나는 왜 하고 있었지?
알버트가 선선히 말했다.
“마음대로 해.”
“넵, 감사합니다.”
나는 바로 답하며 물수건을 들었다.
우선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에 수건을 올렸다.
알버트의 눈이 점차 감겼다.
성자가 된 기분으로 나는 그의 얼굴의 식은땀을 천천히 닦아냈다. 조각상을 닦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깊은 눈매와 코, 그리고 입술까지.
그와 대면하고 살기 위해 계약을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가 내게 얼굴을 맡길 만큼 서로 믿는 사이가 되었다니.
얼굴을 찬찬히 닦던 나는 처음 탑에 나갈 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왕자님.”
“그래.”
“왜 숨기셨어요?”
분명 리암은 쉬고 가라 말했다. 슈버트도 알버트를 충실히 따랐으니 그가 아프다고 말했다면 분명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곳은 성이었고 여긴 둘밖에 없는 탑이다. 이곳 환경이 훨씬 열악하다.
약을 따로 챙겨놓은 것도 아니고, 그를 치료할 의사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탑을 택했다.
“탑에서 나왔을 때도 아픈 거 숨기셨잖아요. 계속 무리하시는 것 같았는데… 왜 그러셨어요.”
나는 그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아까 언질해 주셨다면 약이라도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그의 이마를 다시 한번 닦고 있을 때, 알버트가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난 그러면 안 되기 때문이란다.”
“…네?”
내가 되묻는 순간, 알버트가 눈을 떴다.
그가 날 응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난 그러면 안 되는 사람이란다, 로제.”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지금 알버트가 한 말도 그랬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걸친 채 넋두리하듯 이야기했다.
“나 하나에 건 기대와 부담을 생각해서라도. 훗날 내 지위를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돼.”
“…….”
“차라리 혼자 아픈 것이 낫다.”
혼자 살 때 아픈 것만큼 서러운 일이 없었다.
누구한테 아프다고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다 서러워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알버트는 그런 걸 감당하는 게 오히려 더 나은 것이다.
그는 외로움에, 부담감에 무뎌진 사람이다.
아니, 무뎌졌다는 말보다 익숙해졌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픈 걸 알면 공작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고.”
“…메이슨 공작님 때문이군요.”
설마 했는데 맞는 모양이었다.
“마력도 많이 소모하셨고 제게 걸린 흑마법을 풀어 몸 상태도 좋지 않으실 텐데, 왜 무리해서 가시려는 겁니까.”
리암도 그가 아플 것을 예상은 한 모양이었다. 다만 이렇게 끙끙 앓을 줄은 몰랐겠지.
“…탑에서 나가실 때는요?”
나는 탑에서 나가는 순간부터 긴장하던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내 말에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다. 탑에서 멀어질수록 내 몸은 타격을 입어.”
탑에서 멀어진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모양이다. 겪은 적 없으니 그의 고통을 알 수는 없지만, 로스투라투가 만든 덫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알버트가 날 천천히 응시했다.
“이렇게 네게 순순히 털어놓다니, 나도 꽤 풀어진 모양이구나.”
“…….”
“평소라면 티를 전혀 내지 않았을 터인데.”
나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그런 것에 놀라워하지 마세요.”
수건을 다시 대야에 담갔다 물기를 짜낸 나는 알버트의 이마에 수건을 얹었다.
이 남자를 어떡해야 해?
이렇게 약한 면을 보여주면, 위로해 주고 싶어진다. 그도 사람인 걸 알기 때문이다. 나도 비슷한 걸 겪어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민하던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왕자님, 저는 왕자님께서 티를 낸다고 해서 부담스러워하지 않아요.”
알버트가 설핏 웃었다.
“알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답이, 마음을 울렸다.
…흔들리지 말자. 나는 지금 그를 위로하려는 것뿐이니까.
나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탑 안에서 알버트가 보여줬던 모습뿐이다. 그의 단면에 불과한 모습.
그래서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주세요.”
내 눈빛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알버트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힘없는 대답을 듣자니, 어쩌면 내가 지금 그에게 하는 이야기는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주세요.”
“…그래.”
속내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이 사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
“저는 눈치가 없어서 왕자님이 말해주시지 않으면 몰라요.”
변명할 이유가 없다면, 그 이유를 만들어주면 되는 거다.
“왕자님께서 가지고 계신 주군의 덕목은 알지만, 눈치 없는 하녀를 위해서 조금만 신경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과연 알버트가 남한테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기나 할까?
말하지 못한 것이 응어리졌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건 생각이 아니라 확신이다. 살아온 세계도, 삶도 다르지만 이건 알 수 있다.
“그럼 왕자님, 지금 상태가 어떤지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미 알지 않느냐, 로제.”
눈을 가늘게 뜬 그를 보며 내가 생글생글 웃었다.
“아니요, 말했듯이 저는 눈치가 없어서.”
이럴 때는 내가 하녀라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알버트는 나에게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다. 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숨길 이유도 없다. 그와 같은 선에 서 있는 귀족이 아니니까.
“아프다고 한마디 해주세요.”
“나보다 네가 더 듣고 싶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한마디 해주세요.”
설핏 웃은 알버트가 찬찬히 말했다.
“아프구나.”
떼쓰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처럼 선뜻 한 행동이었지만, 거기에서 끝난 건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 나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동자가 주위를 배회하다 다시 나를 향했다.
묘한 시선이었다.
“말이란 건 참 신기하죠. 그저 내뱉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변하잖아요.”
알버트가 정확히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면 생소했을 거라는 사실은 추측할 수 있다.
아프면 아프다, 슬프면 슬프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는 알버트에게 그 사실을 조금이나마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날 여전히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강렬한 시선에 부끄러웠다. 나는 애써 눈길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왕자님께서 드실 물 좀 가져올게요.”
그때 알버트가 내 손을 잡았다.
평소 알버트가 나를 대하는 것처럼, 세지도 가볍지도 않은 힘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누운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생소했다.
내가 그를 올려다본 적은 많아도 반대의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마치 머리를 자르던 그날처럼.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아프다는 걸 왜 말하라는 건지 모르겠구나, 로제.”
“이미 깨달으신 눈치인데요.”
“눈치가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 정도 눈썰미는 있지요.”
내 말에 알버트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말문이 막힌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내가 아픈지 왜 알고 싶니, 로제.”
“왕자님을 곁에서 모시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알버트는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해가 지기 전 노을처럼 짙게 내려앉았다.
목소리가 마치 사슬처럼 나를 옥죄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덫 같았다.
“왜 내가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길 원하는 거고.”
그는 제대로 된 답을 원했다.
결국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인간성이니까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행동이기도 하고요.”
당연히 알버트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일 터였다.
물론 알버트가 어떤 마음으로 질문을 했는지 알고 있다.
평소 나를 대하는 행동에 별다른 것이 없어 까맣게 잊다가도, 그의 이런 돌발 행동에 깨닫게 된다.
그가 나를 이성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남녀 사이에 언제나 이성적인 관계만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니다. 앞으로 스킨십을 자제한다면, 적당한 사이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낭만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그가 내게 다가오는 건 쉽지만, 내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은 어렵다.
“끝까지 내가 원하는 말은 하지 않는구나.”
알버트가 흐릿하게 웃었다. 즐거워 웃었다기보다는 자조적인 미소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