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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22화 (22/156)

22화.

내 시선을 느낀 리암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날 빤히 응시하더니 무심히 고개를 까닥였다. 알았다는 것처럼.

눈빛에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호감도 아니었지만.

그의 눈빛은 뿌연 안개처럼 읽기 어려웠다.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는 슈버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이쪽은 말씀해 주신 충신이겠군요.”

“그래.”

“저하를 잘 부탁하네.”

내게 알버트를 부탁한 것은 의외였다. 슈버트처럼 대놓고 적개심을 보이지는 않아도 내게 말은 걸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내가 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자, 이제 본경기 시작할 시간!

나는 뒤로 슬슬 물러났다. 리암과 알버트가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서로 대치하듯 서 있는 알버트와 리암을 구경했다. 여기 팝콘이 없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팝콘 아니면 그냥 먹을 거라도 좋은데.

리암을 따라 슈버트가 방으로 들어왔다. 졸졸 따라 들어오는 모습이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따르는 것 같았다.

나를 보며 흠칫하던 슈버트의 눈빛은 알버트를 향하는 순간 반짝반짝하게 변했다.

흡사 지킬과 하이드 수준이다.

저게 진정한 덕후. 나는 슈버트의 모습을 보며 내 얕은 덕심을 반성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한참 멀었다.

리암은 한숨을 내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안색이 새하얀 게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마력도 많이 소모하셨고 제게 걸린 흑마법을 풀어 몸 상태도 좋지 않으실 텐데, 왜 무리해서 가시려는 겁니까.”

리암이 먼저 붙잡았다.

알버트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도 나았으니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구나.”

내가 자는 동안 알버트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군.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겠지만 괜히 머쓱했다.

알버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탑의 마력에 손을 대두긴 했지만 불안정해. 언제 들킬지 모르니 돌아가는 것이 낫다.”

알버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실을 늘어놓았다.

“내가 가는 게 너에게도 좋을 거란 말이다, 리암.”

리암이 입술을 꾹 깨물더니 알버트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제가 어떤 말을 하든 가실 것 압니다.”

알버트가 피식 웃었다.

“걱정은 이해하나 쓸데없는 짓이다. 자리 털고 일어나면 몸도 살펴가며 일해. 하루아침에 로스투라투를 끌어내릴 수 있는 건 아니야.”

“예, 이번 일은 제 불찰입니다. 나중에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야기만 들으면 둘이 연인 같다. 헤어지기 싫어 절절한 한 쌍의 연인.

정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 서로 다른 매력의 미인이긴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난 이 조합 찬성이다.

열심히 구경하던 나와 알버트의 눈이 마주쳤다.

음, 리액션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손 하트를 그려 보였다. 알버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음에 들었다는 표시.

알버트는 잔잔한 얼굴로 다시 리암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말한 것은 가지고 왔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리암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버트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안에 뭐가 들었을지 궁금했다. 나중에 알버트에게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던 찰나-

“로제, 받거라.”

알버트가 그 주머니를 나에게 휙 던졌다. 나는 얼떨결에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왕자님, 이건 무슨…?”

알버트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렸다.

“네게 여기 있는 것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마.”

…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시 그에게 물으려던 찰나, 알버트가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안이 늘어나는 마법의 주머니다. 원하는 것은 뭐든 집어넣고 꺼낼 수 있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주머니에 그렇게 큰 비밀이?

“챙기거라. 새벽이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하니까.”

알버트는 아까 전부터 돌아가자는 말을 반복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정말 탑에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왔다는 게.

자지 말걸. 좀 더 돌아다닐걸. 어차피 돌아가면 방 안에만 있게 될 텐데.

숨이 막혔다.

내가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라 해도 작은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쉬운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밖에 나와 다시 이 세계가 얼마나 크고, 자유로운지 느끼게 되면 더.

후회가 밀려왔지만 늦었다.

그렇다면….

꿩 대신 닭이라고 했다.

난 결연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제가 원하는 건 다 챙겨도 되나요?”

“그래.”

“왕자님께서 허락해 주신 거예요.”

“그래, 네 마음대로 하거라.”

“네.”

침대 가까이로 쏜살같이 달려간 나는 작전을 개시했다.

***

나는 이불을 차곡차곡 갰다. 주머니 안에 어떻게 들어가지 싶었는데 가까이 가져다 대니 이불이 쑥 들어갔다.

질량보존의 법칙은 어디로 가고 이런 신비한 물건이…? 역시 마법은 신비하다.

나는 이 방 살림살이를 다 가져가겠다는 의지로 거의 모든 걸 챙겼다.

액자나 꽃병, 베개와 내 손으로 들 수 있는 테이블 등등. 책장에 꽂혀 있는 책도 모조리 쓸어 담았다.

알버트, 리암, 슈버트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난 꿋꿋했다.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잖아.

지금 잘 챙기면 탑 안의 감금 생활과 내 심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거다.

몸을 빠르게 움직인 덕에 일은 빨리 끝났다.

마지막으로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까지 주머니 안에 넣은 나는 알버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왕자님, 제가 왕자님의 명을 착실히 받들었습니다.”

휑해진 방 안을 살핀 알버트가 피식 웃었다. 그가 날 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착하구나, 로제.”

알버트 뒤로 알 수 없는 표정의 리암과 경악한 슈버트가 보였다.

첫인상은 확실하게 심어준 것이 분명했다. 다만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거 들고 갈 수 있을까요?”

나는 위를 꽉 묶은 주머니를 응시했다. 안에 들어간 것이 얼마나 많은데… 들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마법을 믿어보거라.”

알버트의 말에 난 주머니를 슬쩍 들었다.

그의 말대로 주머니는 텅 빈 것처럼 가볍게 들렸다.

“그럼 가자꾸나, 로제.”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신하들을 등진 채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햇살처럼 눈부셨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내가 했던 감상이 부질없어졌다.

그를 뛰어넘을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를 대체할 사람도.

나는 또 홀린 듯 손을 올렸다. 손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손을 빼려는 찰나, 알버트가 내 손목을 가볍게 그러쥐며 속삭였다.

“내 방법이 이번에도 먹힌 모양이구나.”

자신의 장점을 알고 제대로 쓸 줄 아는 알버트에게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자애로이 웃고 있는 얼굴이 어쩐지 얄미워졌다. 내 반응이 어떨지 다 알고서 하는 행동 같아서.

그래서 나도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이번에도 몸만 넘어갔네요.”

어감은 이상하지만, 알버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한 복수였다.

내 말에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동자가 짙게 빛났다.

“몸과 마음 중 벌써 반은 넘어왔다는 거구나.”

…애초에 이건 내가 이길 수 없는 말싸움이었다.

나는 다시 내 품에 돌아온 하양이를 꼭 안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

주머니를 가지고 성을 빠져나온 나와 알버트는 다시 그의 마법을 통해 탑과 가까운 숲으로 돌아왔다.

숲에서 다시 허공을 걸어 탑 다락으로 돌아온 나는 고요한 내 다락방을 살폈다. 내 흔적만 남아 있는 방에 다른 이의 기척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방.

꿈을 꾼 것 같다.

바깥에 나갔다 오는 꿈.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아쉽고 답답한 감정이 가득 들어찼다.

…이겨내야겠지. 다시 나가게 되는 그날까지.

속으로 다짐한 나는 품에 있던 하양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하양아, 이제 너도 자러 가.”

“으으응….”

내 품에서 반쯤 잠들었던 하양이가 어기적어기적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잘 시간이다. 나는 알버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왕자님, 왕자님도 이제 가서 쉬시는 게….”

그 순간, 내 옆에 서 있던 알버트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멍청히 물었다.

“…왕자님?”

뭔가 이상했다.

그가 숨을 내쉬는 소리가 유독 길고 거칠었다. 동굴처럼 낮아진 목소리로 알버트가 나와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답했다.

“괜찮다. 이제 쉬거라, 로제.”

“괜찮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알버트가 이유도 없이 자리에 주저앉았을 리 없다.

나는 알버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가 흠칫 놀랐다.

“왕자님, 대체 언제부터 이러신 거예요?”

이마가 뜨거웠다. 열이 들끓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알버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평소보다 붉었다.

“설마 빨리 돌아오시려던 이유가….”

“네게 몹쓸 꼴을 보이는구나.”

알버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여태 몰랐던 게 신기할 정도로 그는 아파 보였다.

아까 전 본 리암의 얼굴보다 훨씬.

알버트가 완강히 돌아오려 한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프다. 하지만 신하들에게 그 사실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그가 이토록 급하게 탑으로 돌아온 이유였다.

나는 반성했다. 알버트랑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그의 현재 상태도 제대로 알지 못하다니, 하녀 실격이다.

알버트만 받든다고 했으면서, 밖에 오랜만에 나가 들떴었다. 정작 나가게 해준 당사자는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다니, 내 잘못이다.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나는 알버트의 이마에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 내 이마를 짚어 온도를 비교했다. 내 이마에 비하면 마치 불을 때는 것처럼 펄펄 끓었다.

이 정도 열이면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숨겼지?

모습이나 행동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알버트가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여기 오기까지 정신력을 끌어모아 버틴 모양이었다. 하양이가 나와 알버트를 보다 내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무스은 일이야아아…?”

“왕자님께서 아프셔.”

아프다는 말에 하양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 손을 올려 입을 막은 하양이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럼 주거어…?”

“아냐, 안 죽어!”

내가 말을 단호히 자르자 하양이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마안 우린 아프면 죽는데에…?”

하양이의 말을 들으니 드래곤 새끼에 대해 설명하던 알버트가 떠올랐다. 성체가 되기 위해서 겪는 고통의 시간. 대부분의 드래곤은 그 시간을 넘지 못하고 죽는다고.

그게 하양이가 봐왔던 세상이겠지.

난 하양이를 품에 안았다. 꼼지락거리는 생명체가 너무 작았다.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동물이 나중에 사람의 몇 배에 달하는 거대한 드래곤이 될 수 있는 운명을 지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난 단호히 말했다.

“안 죽어.”

하양이가 입꼬리를 축 내리며 눈을 깜빡였다.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아프면 죽는 게 하양이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파도 죽지 않는 모습, 내가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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