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나는 반려가 없는데?”
연인도 없는 사람에게 이건 무슨 소리냐. 내 말에 하양이가 무척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탑에 너어어랑… 같이 사느은 남자아….”
목소리는 여전히 느렸지만 속뜻은 확실히 전달되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렸다.
“왕자님이 내 반려라니 큰일 날 소리야.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정말 아까 전 슈버트가 하고 간 말처럼 왕자님을 현혹한 마녀로 알려져 죽는 건 아닐까?
우선 하양이 입단속부터 시키기로 했다.
“하지마안 둘처럼 계속 붙어 있는 인간들은 서로를 그렇게 표현한다구우우….”
음, 설득력 있어. 말이 느릿하지만 하양이는 참 똘똘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졌다. 내가 알버트와 스킨십을 하고 입술까지 부빈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하, 졸리네. 하양아, 우리 잘까?”
원래 불리할 때는 말을 돌리는 거다.
그런데 말하고 나니 정말 졸렸다. 지금 원래 자고 있을 시간이기도 했고, 오랜만에 한 외출, 호화로운 방에 기분이 좋아 그런지 잠이 솔솔 왔다.
결국 나는 하양이를 껴안은 그대로 잠들었다.
***
“로제.”
아직 잠에서 덜 깨 정신없던 순간, 누군가 나를 불렀다.
“…허락해 주거라.”
잠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듯한 손길이 내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손의 주인을 확인했다.
내 입술에 살짝 닿았던 손가락이 떨어졌다. 귓가 가까이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갈 시간이다.”
더 자고 싶다. 한창 잘 자고 있을 때 깨우는 건 반칙이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비몽사몽인 탓에 얼굴이 흐릿했다. 나는 일어나는 대신 이불 안으로 더 파고들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난 이미 네 허락을 구했는데 가만히 있을 참이냐.”
감미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몽롱한 정신 속에 내 허락을 구했다는 말만 잔상처럼 남았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내게 허락을 구할 만한 일이 있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생각만 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던 난 이불을 내리는 손에 흠칫했다.
“추워….”
나는 웅얼거리며 이불을 끌어 올… 리려다 실패했다. 벽난로가 있긴 하지만 탑의 새벽은 춥다. 더군다나 내가 머무는 다락은 알버트가 머무르는 방보다 훨씬 춥다.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차가운 바람은 없었다.
그제야 정신이 흐릿하게 들었다.
어라, 탑 안이 아닌가?
…밖에 나왔다는 사실이 그제야 생각났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나는 내가 누운 침대에 앉아 있는 알버트를 발견했다.
그는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벽녘의 밤하늘처럼 적당히 흐릿한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그늘이 진다. 그의 얼굴에 살짝 음영이 졌다.
내가 그를 올려다보는 거지만 밑에서 보아도 그의 미모에 굴욕 따위는 없다. 굴욕이 뭐지요?
어느 각도에서 보든 알버트는 완벽하다. 매일 보는 얼굴임에도 홀릴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알버트의 손이 내 뺨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손길이 지나간 곳이 홧홧하다. 내가 벽난로에 타고 있는 나무가 된 것 같다.
알버트의 눈길은 따스한 듯 서늘했다. 서로 다른 두 단어가 오묘하게 섞여들었다.
나를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왠지 이럴 때 말을 걸면 혼날 것 같지만….
이건 계약 위반이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 소심하게 말했다.
“…저 눈 떴는데요.”
“말했듯이 나는 네 허락을 받았단다, 로제.”
“…무슨 허락이요?”
“지금 널 만져도 된다는 허락.”
“왕자님, 저는 그런 말에 대답한 기억이 없….”
“지 않겠지. 로제, 다시 한번 말해주마.”
그가 느른히 눈을 내리깔았다. 알버트가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자신의 입술을 가까이 했다. 숨소리가 귓가에 느껴져 몸이 흠칫했다. 알버트가 천천히 속삭였다.
“널 만지고 싶어.”
뜸을 들이며 쉬는 숨이 바람처럼 귓가를 간지럽힌다. 귓가에서 시작된 소름은 목을 타고 올라갔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모습을 보며 알버트는 더 낮아진 목소리로 나지막이 덧붙였다.
“허락해 주거라.”
어, 들으니까 생각났다.
허락해 주거라 부분만 기억났던 게 퍼즐처럼 짜 맞춰졌다. 역시 사람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내 발등을 찍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알버트에게서 슬슬 멀어졌다. 이불 안에 있는 몸을 김밥처럼 둘둘 감아 나 자신을 보호했다.
“수우움…. 수움 막혀어어….”
덩달아 이불 안에 같이 갇힌 하양이가 느릿하게 말했다.
숨이 막힌다는 순간에도 하양이의 말투는 느릿했다. 휴가 나온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래도 하양이의 말은 존중해야지. 나는 이불 안에서 하양이를 잽싸게 꺼내 알버트와 내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혔다.
알버트를 발견한 하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리를 들어 척척 걸었다.
날 지켜주려는 건가!
저 왕자님의 마수에서부터 나를 구해주려는 거구나!
하양이는 새끼 드래곤! 아직 성체는 되지 못했지만 알버트의 마수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는 대단한 동… 물인데.
“하양아, 어디 가?”
침대에서 내려간 하양이는 멀찌감치 있는 벽난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고개를 돌린 하양이가 내 쪽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둘 일으은… 둘이서 해결해애애….”
부엌에서 나 혼자 올라가라고 하던 하양이의 모습이 데자뷔처럼 오버랩됐다. 하양이와 나의 유대감이 와장창 깨졌다.
“나느으은… 저 사람 무서워어….”
내 흔들리는 눈빛을 본 건지 하양이가 변명하듯 말했다.
“살면서 드래곤 새끼에게 칭찬을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구나.”
팔짱을 낀 채 내 행동을 느긋하게 바라보던 알버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알버트를 보며 애써 태연히 대꾸했다.
“그 말 취소하겠습니다, 왕자님. 취소할게요.”
“그럴 줄 알았다.”
내 우려와 달리 알버트는 깔끔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순순히 내 말을 들어주니 왠지 아쉬….
아냐, 아쉬우면 안 돼. 이게 알버트식 플러팅이라고.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넘어가는 거다.
눈을 부릅뜬 나는 잡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무념무상. 무념무상.
“아쉬우냐?”
“아뇨, 그럴 리가요.”
알버트의 말에 난 단숨에 대답했다. 로봇처럼 나온 답은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가 눈매를 곱게 휘며 웃었다.
“애석하구나, 로제. 나는 아쉽거든.”
알버트가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빨리 말해주지 말 걸 그랬어.”
잠시 침묵이 흐른다. 내가 슬쩍 그의 눈을 피하자 알버트가 찬찬히 말했다.
“어서 돌아갈 채비를 하거라.”
“벌써요?”
알버트가 눈썹을 올렸다.
“이곳이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방이 크고, 예뻐서 좋습니다. 탑의 제 방은 삭막하거든요.”
“지금은 돌아가야 해. 하니 방을 잘 봐두거라. 나중에 내게 청구해도 봐주마.”
“정말요?”
“내가 두말한 적은 없는데.”
“왕자님, 사랑, 아니 감사합니다.”
또 습관처럼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뻔했다. 친구 사이에도 잘 쓰는 말이고, 주접이라 나도 모르는 사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래도 나한테 고백한 사람인데, 이러면 안 돼. 나는 그가 내 말을 처음부터 들었나 싶어 눈치를 보았다.
알버트의 얼굴은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듯 태연했다.
괜찮은 줄 알고 넘어가려던 참이었다.
“왜 말을 하다 바꿔. 하던 말은 계속하거라.”
주접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거면 모르는데 이렇게 대놓고 하라 하시면 상당히 부끄러운데요.
“…왕자님.”
“네가 아무 생각 없이 뱉는 말이라는 거 알아.”
“…….”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한마디만 해.”
아까 전과 말의 무게가 전혀 달라졌다.
알버트는 가만히 날 응시했다.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게 그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알 수 없는 행동과 말 속에서 느껴지는 그의 진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래서 더 못 하겠다.
“왕자님, 제가 말로는 못 하고….”
꼼지락꼼지락. 이불 안에서 나온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 앞에 섰다.
“이걸로 대신하겠습니다.”
나는 머리 위로 두 손을 올려 커다란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사랑의 하트. 적당한 뜻을 담고 있으면서 너무 무겁지 않게.
“사랑을 뜻하는 하트예요.”
“…대체 그 손짓이 어떻게 같은 뜻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자매품으로 이것도 있어요.”
나는 엄지와 검지를 맞대 손 하트를 만들었다. 이게 바로 한국인의 손 하트다 이겁니다!
“그것도 모르겠고.”
알버트는 무심히 대꾸했지만 확실히 아까 전보다 분위기가 유해져 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의 미소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진심으로 보였던 얼굴 위에 가면이 한차례 덧씌워졌다.
마치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누구지?”
“저하, 메이슨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알버트가 숨을 내쉬며 턱을 쓰다듬었다.
“푹 쉬라고 했거늘, 어이하여 일어난 건지 모르겠어.”
“저하를 이대로 보내드릴 수 없다며 오셨습니다.”
메이슨 공작이라면 알버트를 이곳에 오게 한 장본인인데.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꽤 신경 쓰는구나.”
“그럴 리가요. 왕자님을 모시면서 제가 어디 한눈을 팔겠어요. 그저 사람 대 사람의 예의를 차리는 것뿐이랍니다.”
첫 만남이 이불에 돌돌 말린 모습이면 저도 민망하다고요. 나는 뒷말을 덧붙이며 능청스레 대꾸했다. 알버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만이 이유가 아닌 것 같다면 내 착각이겠지.”
“왕자님만큼 잘생기신 분이 어디 있다고.”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알버트의 말에 좀 찔렸다. 공작과는 첫 만남이라 기대하는 것도 있었다.
로맨스 소설에서 공작은 남주인공 혹은 서브남이 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알버트와 가까운 사이면 나중에 서이나와 만났을 확률도 높아지고… 서브남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로맨스 소설에서 남주인공이 잘생기지 않은 적은 없잖아? 슈버트가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소년이라면 리암 메이슨 공작은?
어떻게 생겼을까?
미남 만세!
“들라 하마.”
“넵.”
두근두근. 나는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문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자 리암 메이슨 공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하.”
공작의 목소리는 알버트의 감미로운 목소리보다 허스키했다.
리암은 짧은 흑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었다. 슈버트보다 확실히 나이가 있어 보였다. 다부진 체격에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은 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제 자리를 주장하는 이목구비는 한참을 봐도 안 질릴 것 같았다.
…역시 로맨스 소설 남주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