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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20화 (20/156)

20화.

협박하는 것 같은데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알버트도 겪고 그보다 더한 진상 상사들도 겪었는데 새파랗게 어린 소년의 말뿐인 협박이 무서울 리 없었다.

더군다나 내게는 알버트가 있다.

세상은 원래 인맥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리고 알버트는 이 세계에서 가장 든든한 뒷배다. 지금 내게 무서울 것은 없다.

아까 전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군림하던 알버트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뭔 해독제?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왕자님도 다치셨나요?”

“그분의 상태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나를 깔보는 태도가 말투에서 묻어 나왔다.

자, 두 번째 직장 상사 등장이다. 알버트가 회사 대표라면 여긴 대리님 정도 되려나. 신분제에서 나는 철저한 을이니 공손히 답했다. 하녀가 남작한테 대드는 것처럼 어이없는 일도 없을 테니까.

”대체 무슨 해독제가 필요한지,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슈버트 베르젠 남작이 코웃음을 치다 낮게 말을 이었다.

“평소 내가 책으로 접하고 먼발치서 보아왔던 저하와, 오늘 뵈었던 저하의 모습이 전혀 달랐다.”

…책과 먼발치서만 보아온 나의 우상 같은 건가? 아까 전 모습에서 묻어 나온 덕력이 착각이 아니었구나.

아무튼 슈버트는 알버트의 팬클럽 회장이라도 할 기세였다.

“모두 마녀 같은 네가 쓴 약 때문일 테지.”

아무래도 알버트가 한낱 하녀인 날 위하는 모습을 보고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알버트의 모습을 보면 충분히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나도 그의 태도 변화에 놀랐는데 그의 신하들은 오죽할까.

이걸 어떻게 답해야 하는 거야.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다 답했다.

“우선 전 왕자님에게 그런 걸 드린 적도, 먹인 적도 없습니다.”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슈버트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그에게 너무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남작님, 제가 그런 걸 만들 힘이 있었으면 지금 앞에 계신 분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요?”

내 말에 슈버트가 흠칫했다. 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날 해치운다고?”

서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슈버트가 칼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나를 향했다. 행동부터 앞서는 모습이 역시 혈기왕성한 청소년답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주춤했다.

“아니, 그럴 수 있다면 이미 했을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왕자님께 드린 건 제 요리와 충성심밖에 없어요.”

슈버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옳다구나, 이게 기회다. 나는 은밀한 비밀을 알려주듯 속삭였다.

“제가 왕자님 마음에 든 건 순전히 제 노력 덕이라고요.”

바로 날 경계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슈버트는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가 검부터 휘두를까 봐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베르젠 남작님도 왕자님께서 저 같은 사람에게 순순히 당할 만한 인물이 아닌 것은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양심에 털 난 것 같다. 사실, 알버트가 나 같은 사람한테 순순히 당해준 것이 맞다.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눈빛이 어디서 흔들렸는지 정확히 알았다. 눈치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나는 슈버트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내밀었다.

“알고 싶지 않으신가요? 제가 어떻게 저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지.”

슈버트가 약해지는 키워드는 알버트다. 아까 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슈버트는 칼을 제자리에 집어넣더니 더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리라고?”

“제가 이래 봬도 요리를 꽤 잘하거든요.”

사실 매운 요리, 내가 좋아하는 요리 위주지만….

한국인인 내게는 비장의 무기인 코리안 치킨과 제육볶음도 있다.

이야기 주인공이던 서이나 씨에겐 미안하지만 나도 내가 아는 지식은 써먹어야 마땅하다. 나한테 주인공 버프는 없으니까.

작중에서 서이나에게는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뭔가 능력이 생겼다고 암시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도 없으니 이렇게라도 써먹어야지 않겠는가.

내 말이 솔깃했는지 슈버트가 헛기침을 하다 작게 물었다.

“…무슨 요리지?”

“치킨이라고, 왕자님도 정말 맛있게 드셨습니다.”

슈버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치킨을 알 리 없지. 나는 찬찬히 치킨이 뭔지 설명했다.

“닭을 기름에 튀긴 겁니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아주 일품인 음식이에요.”

한마디로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 할 수 있지.

슈버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난 깨달았다. 아직도 그는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걸.

품 안에 있던 하양이가 바르작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슈버트는 하양이를 힐끔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되었다. 저하에게 충성심은 어떻게 증명한 거지?”

이 질문에는 ‘덕질했다’는 걸 순화해 말해보았다.

“매일 저하의 외모와 능력을 칭송했습니다.”

“…그건 내가 하던 것과 다를 바가 없어. 그리고 외모와 능력에 대한 칭찬은 응당 그분이 받아야 할 것이다. 네가 한다고 뭔가 달라지지는 않아.”

근엄하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열변을 토하는 슈버트에게서 찐사랑의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칭찬을 듣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자님도 지속적인 관심과 제 충성심에 마음을 열어주셨어요.”

한국에서 손에 꼽히게 잘생긴 배우 중 하나인 정X성도 말했다. 잘생겼다는 말은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아. 짜릿해!

슈버트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래도 할 말을 잃은 것 같다. 나는 바로 이야기 주제를 돌렸다.

“아, 남작님도 잘생기셨습니다. 주위에 남작님을 사모하는 분들이 많을 거 같아요.”

미소년은 자라서 미남이 되는 법.

알버트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슈버트도 미래가 참 기대되는 상이다.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슈버트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여태 내가 한 말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군. 하긴, 내게 적대심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더 힘들다. 굳이 나를 이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작님. 제가 여태 말한 사실 중 거짓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왕자님께 직접 여쭐 것이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알버트한테 말해보았자 달라지는 건 없는데 눈앞의 소년은 애석하게 그 사실을 모른다. 알버트가 내 주접에 단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저하께 직접 물을 거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남작님.”

같은 말을 반복한 슈버트가 내게서 등을 돌렸다. 심드렁히 대꾸한 나는 베르젠 남작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제야 쉴 수 있겠다.

***

방문을 닫은 나는 슈버트의 행동을 떠올렸다. 내가 생각한 귀족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모습. 철이 덜 들긴 했지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도련님 티가 났다.

“…알버트가 잘생기긴 했나 봐.”

슈버트도 미남인데 별 감흥이 없었다. 나중에 내 연애가 심각히 우려되는 바였다.

침대 위에는 내가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놓여 있었다. 다행히 여기 귀족들이 입는 드레스처럼 속옷과 코르셋을 동반한 것이 아니라 두꺼운 천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것이었다. 혼자서도 갈아입을 수 있는 것.

아까 전 나를 대하던 슈버트의 태도. 여기 가져다 놓은 옷. 아무런 시중도 들지 않는 성의 사람들.

알버트가 대놓고 말하지 않긴 했지만, 슈버트는 확실히 내가 누군지 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맨 처음 마중 나왔을 때 나를 무시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해는 되는 악의였다. 대놓고 무시한 게 납득은 갔다. 오히려 날 대놓고 모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슈버트가 내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탑 안에 있을 때 내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알버트, 그리고 –사람은 아니지만-하양이뿐이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내가 아무리 집순이라도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고플 때가 있다.

하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는다. 내게 티를 내지 않을 뿐, 알버트도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뭐, 그러니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은 어린 도련님은 귀여웠다는 말이다.

“나 쉴래애애….”

하양이가 침대를 보고 품에서 바동거렸다. 방금 전까지 올라왔던 스트레스가 하양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쑥 내려갔다.

“그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하양이를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 내려놓은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불타는 소리가 귓가에 녹아들었다. 추운 지방이라 그런지 방 안은 시린 눈과 대조되는 붉은 계열이었다.

빨간색과 검은색이 오묘하게 조화된 태피스트리, 적색의 이불. 단조로운 단색과 강렬한 붉은빛이 어우러진 방 안은 가을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커튼을 걷어 창밖을 살폈다.

아직 밤이지만 하얀 눈에 반사되어 바깥은 생각보다 잘 보였다. 횃불이 보이고 성 주변 보초를 서는 사람들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보라가 몰아칠 것처럼 눈이 펑펑 내렸다.

하얀 눈이 내리는 밖과 적색 계열의 방 안에 있으니 크리스마스라도 된 것 같았다.

슈버트와의 대화해 보니 탑에서 나간 후 내 앞에 펼쳐질 험난한 길이 아주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로제인 이상, 그들은 나를 좋게 볼 리 없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탑 안은 정말 신비한 곳이었다. 이런 걱정거리 없이 그저 매일 그 순간만 살아가면 되니까.

현실은 또 다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해. 나는 커튼을 다시 닫고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하양이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이불 안에 있어서 그런지 몸이 따스한 게 손난로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벽난로에서 장작불 타는 소리. 푹신하고 따듯한 잠자리. 코끝을 찌르는 기분 좋은 향기. 이렇게 편안했던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현실의 문제가 멀어지니, 바깥에 나오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생생히 느껴졌다.

“좋다.”

가령 이렇게 제대로 된 가구라든가, 방 안을 가득 채운 장식품과 책 같은 것. 탑의 벽이 휑해 보일 정도로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공간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나는 탑 안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있었는지 실감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나가고 싶은데, 나가고 싶지 않다. 모순적인 마음이 충돌했다. 하지만 체념은 빨랐다. 상황을 알고 현실을 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로부터 평생 도망칠 수는 없는 거잖아.

언젠간 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탑 안에서 나가면 많은 것이 바뀌겠지.

나는 탑에서 나간 후의 행복한 미래를 그려보았다. 평생 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내 집 마련부터 생각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평생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니까.

“하양아, 넌 어떤 곳에서 살고 싶어?”

“기분… 좋으으은 곳.”

“기분 좋은 곳이 어딘데?”

“탑….”

“그건 기각. 난 탑에서 나가고 싶어.”

하양이는 탑을 둘러싼 마력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하양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어엄… 너 반려느으은…?”

그 무슨 무서운 소리니. 나는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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