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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9화 (19/156)

19화.

나는 알버트의 말에 헛기침을 하다 하양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양이는 내 품 안에서 색색 자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웠다.

“하양아, 우리 밖에 나왔어. 자지만 말고 하늘 좀 봐. 하늘이 정말 예뻐.”

“하느른 언제나아아 예뻐어어….”

하양이는 잠꼬대하듯 중얼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하늘이 전혀 인상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하양이는 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원할 때 나갈 수 있는 입장이지.

그러고 보면 알버트의 태도도 하양이와 비슷했다.

들뜬 나와 다르게 알버트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나는 그가 탑에서 최대한 빨리 나오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책 속에서도, 나와 처음 만났을 때도 밖에 나가기 위해 계약까지 해가면서 애를 쓰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그래도 탑은 갑갑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처럼 큰 저택과 궁을 오가던 사람에게는 더욱더.

결국 나는 알버트에게 묻고 말았다.

“왕자님은 밖에 나온 게 기쁘지 않으신가요? 비록 잠시뿐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 그리 큰 변화는 없는 것 같구나.”

무심히 대꾸한 알버트는 지팡이를 들었다.

알버트는 지팡이를 이용해 바닥에 큰 마법진을 그렸다. 동그란 마법진 안에 그려지는 기하학적인 무늬와 모양은 예술 작품 같았다. 선 하나하나가 촘촘히 맞닿아 태양과 달을 그렸다.

“마법의 핵심은 이 마법진이란다, 로제.”

“오오….”

“이 마법진에 마력을 얼마나 잘 흘려 넣고 그려낼 수 있느냐, 그리고 주문을 얼마나 잘 시전할 수 있는지가 제일 중요해.”

내가 아까 전 주문에 대해 물어본 것을 기억했던 모양이다.

마법진을 보며 나는 마법은 포기하기로 했다. 나가면 은퇴 후의 삶까지 보장받으니 원하는 거 다 해볼까 했는데 포기다.

너무 어려워 보였다.

애초에 난 마법사와 거리가 멀기도 했고.

“이리로 와, 로제.”

마법진 한가운데 선 알버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손을 잡고 마법진 안에 섰다. 알버트와 자연스레 접촉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어,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어 무의식적으로 잡긴 했다만….

아까 전처럼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스킨십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나 고백받은 사람인데.

…혹시 이거 의도된 거야?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법진의 선 하나하나에 황금색 빛을 불어넣는 알버트를 응시했다.

“왕자님, 우리 손을 꼭 잡아야 하는 건… 가요?”

물어보는 게 또 자의식 과잉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 말끝을 흐렸다.

이게 다 알버트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뭔가 흑심이 있어서 이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우아한 행동은 신관이 신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마법진을 다 그린 알버트가 내 손을 좀 더 세게 그러쥐었다. 그가 날 내려다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알 수 있을지 긴가민가했는데 이 정도 눈치면 만족스럽구나,”

“…….”

대놓고 시인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소리 내어 웃던 알버트가 주문을 외웠다.

“텔레포트(Teleport).”

마법진 주위가 빛났다. 그때, 깊게 잠들어 있던 하양이가 눈을 떴다.

“기분 좋은 마력이다아아….”

하양이의 졸린 목소리와 함께 눈앞의 광경이 뒤바뀌었다.

***

봄인데도 불구하고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채우는 함박눈은 눈앞에 자리한 성과 더불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의 여왕이 살았다던 곳이 이런 느낌일까?

거대한 고성은 나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거대했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북부는 처음인 모양이구나.”

저 멀리서 병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왔구나.”

스무 명 정도 되는 병사들과 함께 우리 앞에 선 남자는 알버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 생각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라 놀랐다.

많이 잡아봤자 20대 초반.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얼굴은 아직 어린 티가 났다.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고동색 눈동자가 어울리는 남자는 파릇파릇한 소년이었다.

그의 눈은 오로지 알버트를 향해 있었다. 알버트를 흡사 사모하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나는 이 소년을 단박에 이해했다. 암, 알버트가 어떤 사람인데.

그는 남녀노소 따질 것 없는 마성의 매력을 가진 남자였다.

소년은 감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 슈버트 베르젠 남작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와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공작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알버트를 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했다.

베르젠 남작이라는 사람은 오로지 알버트만 보고 있었다. 나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알버트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상태는 아직인가?”

“된통 당하셨던 모양입니다.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 건지 저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 불러올 만한 사람도 전무하고요.”

둘 사이에 빠르고 진지한 대화가 오고 갔다. 베르젠 남작이라는 사람은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아니, 관심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내 존재조차 부정당하고 있는 것 같아 좀 민망했다.

결국 나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괜히 하늘만 올려보았다.

현실과 갑자기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밖에서 내가 어떤 취급을 받을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알버트와 병사들밖에 마주치지 않아 몰랐는데 현실은 역시나 녹록지 않다.

이게 하녀의 현 상황이다. 공기같이 있는 듯 없는 취급을 받아야 하는 사람.

약간 서러웠지만, 이 정도 무시는 참을 만했다.

사실 무시와 별개로 문제가 또 있었다.

추웠다.

봄옷을 입고 왔는데 순식간에 도착한 곳은 눈이 펑펑 오는 겨울이다 보니, 사실 얼어 죽을 것 같았다.

다만 사람의 생사를 논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 추워요~ 이러는 게 경우 없었기 때문에 참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이라도 걸치십시오, 왕자님.”

베르젠 남작은 이야기를 하면서 알버트에게 병사가 들고 온 두꺼운 털코트를 건넸다.

나는 품속을 파고드는 하양이만 더 꼭 안았다. 그나마 하양이는 좀 따듯했다.

처량한 얼굴로 알버트가 받은 털코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휙 돌렸다. 갑자기 시선이 마주쳐 깜짝 놀랐다.

“베르젠 남작,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은 상관없는데 옆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거든. 그대에게도 소개하지.”

알버트는 내 앞에 오더니 병사가 준 털코트를 직접 걸쳐주었다.

“로제, 춥겠구나.”

직접 코트를 여며주며 나른하게 눈을 치켜뜨는 모습은 조각상 같았다.

“평소답지 않게 조용히 있기에 사실 놀란 참이다.”

목소리가 봄처럼 따스했다. 나는 알버트의 배려에 기뻐 잠자코 있었다.

“해서 나처럼 괜찮은가 했더니… 입술이 시퍼렇게 변하는데도 가만히 있었구나.”

이렇게 걱정해 주는 건 반칙이다. 설레잖아.

알버트는 베르젠 남작과 병사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와의 체격 차이 때문에 나는 완전히 가려진 상태였다.

알버트는 우리 둘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필요한 게 있다면 바로 말하거라. 혼자서 참지 말고.”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린 알버트는 베르젠 남작과 마주했다.

“인사하지, 이쪽은 로제 아티어스. 탑 안에서 나와 함께 지내고 있는 내….”

알버트는 소개하다 말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나를 무어라 부를까 생각하는 중인 것 같았다.

“충실한 신하.”

그는 굳이 나를 하녀라 부르지 않았다.

베르젠 남작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탑 안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인간은….”

베르젠 남작은 내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사실 베르젠 남작이 이상하게 보아도 할 말은 없었다.

알버트와 남작의 눈이 마주쳤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암묵적인 무언가가 오고 갔다. 이내 베르젠 남작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보았다. 고개를 숙이기 전 꿈틀거리던 그의 눈썹을.

“죄송합니다. 제가 공작님 때문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죄송하다니! 하녀가 남작에게 들을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고개는 또 왜 숙여?!

알버트가 내 신분을 제대로 밝히지 않아 일어난 불상사였다. 이걸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데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남작, 그럼 안으로 들까.”

알버트는 자연스레 대화를 주도했다.

“알겠습니다. 안으로 드시죠.”

자연스럽게 나와 베르젠 남작의 대화는 차단되었고, 해명할 기회도 사라졌다. 나는 하양이를 꼭 안은 채 알버트와 함께 고성 안으로 들어갔다.

알버트는 내 옆에서,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걸었다. 아까 전 둘이서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걸으며 그러했던 것처럼.

***

안으로 들어간 나는 미로같이 얽혀 있는 복잡한 구조에 더 놀랐다. 나는 손님방으로 안내되었고 알버트는 메이슨 공작을 만나러 갔다. 같이 가고 싶냐 물어보는 알버트를 난 한사코 거절했다. 안 그래도 그와 단둘이 왔다고 여기저기서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통에 지친 상태였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알버트는 자신의 생각을 더 밀어붙이는 대신, 이따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내일 돌아갈 테니 준비하고 있거라.”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심지어 이미 돌아갈 생각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님방으로 안내된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와….”

정말, 탑 안은 나와 알버트에게 너무도 좁았다.

아무리 공작의 성이라지만 이곳은 손님방이고, 궁과 규모도 다르다. 알버트가 이곳보다 훨씬 큰 곳에서 살았으면 살았지 그 이하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하루 종일 걸어도 모자랄 궁에서 살던 사람이 원룸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책 속에서 알버트의 분노가 다시 이해되는 것 같다.

앞으로 알버트의 사생활은 더 존중해 줘야겠다. 나는 그가 운동하는 모습을 살피거나 일하는 모습을 감상하던 때를 떠올리고 반성했다. 왕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베르젠 남작님?”

내 앞에는 아까 알버트와 함께 자리를 피했던 슈버트 베르젠 남작이 서 있었다.

키도 나보다 훨씬 큰데 압도적이기보다는 그냥 잘 큰 남동생 보는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인상이 알버트와 전혀 달랐다.

알버트가 섹시하고 나른한 미남이라면 이쪽은 온기를 가득 담은 온미남이었다. 아직 이목구비가 덜 자리 잡긴 했지만 크면 여자 수백 울릴 상이다.

그는 아까 전 알버트를 볼 때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상을 굳히고 눈썹을 찌푸린 것이, 나 싫다는 티를 팍팍 낸다. 누가 봐도 경계하는 거다.

물론 그의 행동은 납득 가능하다. 나라도 그랬을 거다.

경고라도 하러 온 건가.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려 저하를 구슬린 것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안 통할 거다. 순순히 해독제를 내놔라.”

내 생각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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