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알버트가 지팡이를 잡자, 목소리는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왔다.
[왕자님, 베르젠 남작입니다. 메이슨 공작님께서 흑마법사에게 공격을 당하셨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좋지 않다라….”
[직접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한시가 급합니다! 정말입니다…!]
다급한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알버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공작가라.”
짧게 중얼거린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제, 갑작스럽지만 외출을 해야겠구나.”
“…외출이요? 밖에 나가는 건가요?”
생각지도 못한 외출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탑을 나갈 수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위에 겉옷을 걸쳤다.
“준비하거라.”
상사한테 고백을 받자마자 바로 일하러 가는 사람은 적응이 안 되는데…?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하양이가 떠올랐다. 하양이를 탑 안에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양이도 데리고 가도 되나요?”
“마음대로 하거라.”
나는 부엌으로 내려가 고롱고롱 자고 있는 하양이를 조심스레 안았다. 그러고는 밑에서 알버트가 내려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려올 낌새조차 없었다.
결국 다시 계단을 올라가자 알버트가 지팡이를 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가 꽤 느리구나. 그럼 가자.”
“아니, 왕자님께서 늦으신 건데요? 저는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알버트가 당연히 탑의 마법을 풀고서 문을 통해 나갈 줄 알았다. 그는 천재니까. 마법을 풀어 이제 욕실도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었는걸.
“미친 게 아닌 이상 그 문을 통해 가지는 않는단다.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지 않니.”
알버트는 1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다락, 즉 내 방으로 올라갔다.
“…왕자님. 실례지만 우리 문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요?”
“난 아직까지 부엌에 드나들 수 없단다. 탑에 모든 마법을 풀면 마법사들에게 현 상황을 들키게 되거든. 그러니 이 길밖에 없다.”
평소 알버트를 몰랐다면 난 지금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을지도 모른다.
…대체 이 다락에서 어딜 간다는 건가요?
“우리는 하늘을 통해 갈 거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 전에 알버트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때 다락의 지붕이 희미해졌다.
깜깜한 밤하늘. 무수한 별이 박힌 하늘이 보였다.
“로제, 내 손을 잡거라.”
알버트가 내미는 손을 잡자, 그는 나와 함께 별이 빛나는 하늘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알버트가 지붕을 없앤 것이 그저 눈속임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말 그대로 지붕 위에 서 있었다.
바깥에 나온 게 대체 얼마 만이지?
오랜만에 나온 바깥 공기는 내 생각보다 훨씬 달고 상쾌했고,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무수히 박힌 별은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본 때가 언제인가 싶었다. 야근하고 돌아오며 보는 밤하늘은 익숙했지만 이건 전혀 달랐다.
“와… 너무 예쁘다.”
하, 나는 온몸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에 들어차는 공기에 뼛속까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밖에 나오고 싶었는지. 익숙해졌다 여겼던 그 생활이 얼마나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는지.
미소가 절로 나왔다. 온몸으로 신선한 공기를 만끽하던 나는 곁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알버트를 깨닫고 민망해졌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내 생쇼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도 너그러우신 왕자님. 덕분에 제가 삽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잠시 그를 외면했다가 시선을 마주쳤다. 알버트가 내 행동에 피식 웃었다.
“이제 끝난 거니, 로제?”
“넵,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에게 인사를 올리느라 고개를 숙였던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밑에 펼쳐진 광경이 할 말을 잃게 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탑 위, 어두운 밤하늘에 가려 완벽한-거의 완벽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하양이는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에게는 하얀색으로 보이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위장을 한 상태였다.
탑 주위를 감싼 병사들이 보였다. 보초를 서는 이들이 겹겹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 좁은 시야 안에서도 보이는 병사들의 수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시야가 제한적인 탑 안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자 왕의 경계는 내 생각보다 훨씬 살벌했고 촘촘했다.
“왕자님께서 괜히 문으로 나가지 말자고 한 이유가 있으셨군요. 역시 똑똑하셔.”
이제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아부가 튀어나왔다. 사실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진짜 문으로 가다가는 빼도 박도 못 하고 들킬 뻔했잖아?
이제 여기서 어떻게 가는 거지? 공작은 어디 있는 거고? 알버트에게 질문을 하려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이곳에서 빠져나간 후 순간이동을 쓸 거란다. 메이슨 공작은 북부에 살고 있거든. 여기서 단숨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순간이동밖에 없어.”
공작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지만, 포지션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북부에 사는 공작. 내가 책에 빙의된 것이 맞구나. 그래서 그런지 궁금해졌다.
“무뚝뚝하신 편인가요?”
“…살가운 편은 아니다만 그게 왜 궁금하니, 로제?”
왜냐면 무뚝뚝한 북부 대공, 하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하겠지는 아주 전통적인 클리셰거든요. 차가운 도시 남자와 비슷한 계열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라고 말하면 미친 여자 취급받을 것을 알기에 나는 말을 아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저은 나는 중요한 질문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앗차, 까먹을 뻔했다. 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잘생겼나요?”
잘생긴 얼굴을 보는 건 눈이 즐거우니까. 알버트 덕질도 하는데 메이슨 공작 덕질도 못 할쏘냐.
어쩌면 메이슨 공작은 내가 읽지 못한 책 속의 서브 남주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로맨스 소설에서 공작이란 지위를 가졌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
“메이슨 공작이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긴 하지만, 로제.”
옆에 서 있던 알버트가 손을 잡은 채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마주 선 채 고개를 숙이더니 얼굴을 아주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까 전 동의하에 서로 손은 잡고 있었지만, 그밖에는 아무런 접촉도 없었다.
다른 쪽 손을 올린 알버트는 자애로이 웃으며 내 입술 가까이 자신의 검지를 가져다 댔다.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둔 채 그가 쉿 소리를 냈다.
“내 앞에서 물을 말은 아닌 것 같구나.”
자의식 과잉인 것 같은 말이, 순수 100퍼센트 사실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알버트를 뛰어넘을 외모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니 관심을 가질 거면 내게 더 주는 것이 좋겠어.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야긴 하지 말고.”
“…….”
“그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데 등에 소름이 돋았다. 따스한 목소리인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살벌했다.
알버트가 슬쩍 시선을 내려 나와 잡고 있는 손을 응시했다. 내가 헛소리를 계속하면 이 손을 놓아버린다는 협박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우아하고 상냥한 말투가 이렇게 무섭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나는 애써 말을 돌렸다.
“세상에, 순간이동이라니….”
주의를 돌리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말하고 나니 확실히 가슴이 벅찼다.
하늘을 걷는 것도 모자라서 순간이동이라니. 내가 살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 나는 그 힘을 겪게 되는 거였다.
“왕자님, 전 준비 끝났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알버트가 뭔가 해내길 기다렸다. 무서운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알버트의 입에서 작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로텍트(Protect).”
단어가 나오는 순간 자그마한 빛들이 내 주위를 감쌌다.
단어는 영어였기에 알아듣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 하는지.
하지만 내가 무어라 묻기도 전, 알버트는 두 번째 주문을 시전했다.
“플라이(Fly).”
알버트가 말한 순간, 하늘에서 제자리에 떠 있기만 했던 몸이 자유로워졌다.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마치 신발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가벼웠다. 토끼도 이처럼 가벼울 수는 없으리라.
이게 마법이구나. 나는 알버트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열심히 놀렸다. 신기해서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천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탑 안에서 그의 능력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지팡이에 걸린 마법을 풀기 바빠, 탑 밖의 조력자들과 소통하는 일 외에는 마법을 쓰지 않았으니까.
“방금 전에 외우신 게 주문인가요?”
“그래.”
“저도 주문을 외우면 그런 힘을 쓸 수 있나요?”
사실 조금 기대했다. 주문이 영어였거든. 제2의 외국어가 영어인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에서 자란 나는 단어에 빠삭했다. 비록 외국인과 대화를 할 때 머리가 새하얘지긴 했지만… 이게 한국인의 암기력이다.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 웃었다. 내 꼼수가 다 들킨 것 같아 조금 민망했다. 사실, 많이.
“주문은 마법의 끝마무리 같은 거란다. 주문을 외운다 해서 모든 일이 일어났다면 이곳 사람들 모두가 대마법사가 되었겠지.”
“…그렇죠? 농담이었어요.”
나는 애꿎은 하양이만 바라보았다. 하양이는 나와 알버트의 말소리가 시끄럽지도 않은지 잠을 잘만 잤다. 고롱고롱 작게 코를 골며 자는 하양이에게서 시선을 내리니 순찰을 도는 사람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우선 위로 올라가야겠구나.”
알버트가 내 손을 꼭 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몸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같이 손을 잡고 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별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
하늘이 금방이라도 내 손에 닿을 것 같았다.
“라이트(Light).”
알버트가 주문을 외자 그의 손 위에 반딧불이 같은 작은 빛이 생겼다. 빛은 어둡기만 한 하늘을 밝히고 길을 인도했다.
우리는 별빛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평소에 걷는 것보다 속도는 훨씬 빨랐다.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내가 힘쓰지 않아도 탑이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즐겁게 걷던 나와 알버트의 시선이 순간 마주쳤다.
알버트가 인상을 찡그린 것 같았다.
“왕자님, 어디 아프세요?”
“…괜찮다.”
알버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고통의 흔적을 온전히 숨길 순 없었다.
…탑 바깥에도 그를 제어하기 위한 마법이 걸려 있던 건 아닐까?
“왕자님, 뭔가 숨기고 계신 건….”
내가 말을 이으려던 때,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지금은 일에 집중하자꾸나, 로제.”
알버트는 내 말을 완벽히 차단한 채, 사뿐히 내려섰다.
우리는 순식간에 탑 주위에서 벗어나 숲 한가운데 공터에 도착했다.
스산할 정도로 고요한 숲이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너무 고요해 무서웠지만 숲에서 나는 냄새가 좋았다.
정말 내가 살아 있는 느낌.
하지만 밖에 나온 기분을 온전히 즐기기만 하는 건 불가능했다.
…알버트의 말이 걸렸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으니 우선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밖에 나온 이유는 따로 있으니까.
다시 미간을 찌푸린 알버트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그럼 나중에 여쭈겠습니다.”
순순히 넘어가지 않는 내 말에 알버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네 관심은 마음에 드는구나.”
자그마한 미소였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그는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