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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7화 (17/156)

17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난 긴장한 채 그의 답변을 기다렸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로제.”

낮은 목소리로 말한 알버트가 턱을 괴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게 명을 내리마.”

“…예?”

“내 질문에 먼저 답하라는 말이야.”

그는 이야기의 주제를 자연스레 그에게서 나로 변경했다.

평소 쓰지 않던 권위를 이용하는 알버트의 모습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게 그가 여태 살아온 방식일 터였다.

“로제, 너는 어떠니.”

알버트가 마주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 거란다.”

내 앞에 선 그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지금 네 표정이 좀 낯설거든.”

“…….”

“평소와 다른 얼굴과 진지한 태도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얘기하는 것 같아서 더.”

그는 정말 눈치가 더럽게 빨랐다.

내가 머리를 굴릴 시간도 없이, 알버트가 내 말을 재촉했다.

“숨길 생각 말거라. 나는 네 생각보다 널 잘 읽거든.”

어스름하게 진 그늘 사이로 알버트의 눈이 빛났다. 먹이를 찾는 맹수가 내 목을 물어뜯으려 다가왔다.

“네 생각을 먼저 들어보고 싶구나.”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는 몸을 덜덜 떨었다. 방금 전까지 로맨스를 찍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호러였다.

…무엇보다 알버트는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으면 나를 거의 죽일 기세였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예쁜 것에 호감을 가진다. 유전의 영향이라고 들은 적도 있는 것 같다. 좋은 걸 물려받아 생존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나는 알버트가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그의 얼굴은 신이 빚어놓은 것처럼 완벽하다. 그에게 호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호감과 사랑은 다르다.

사람은 복합적인 동물이다. 첫인상과 외모가 호감을 높게 살 수는 있어도 그 뒤는 모르는 것이다.

알버트도 내게 딱 그랬다.

귀족으로서 살아온 티가 나는 오만한 말투나 기품 있는 몸짓은 그가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시켰다.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라 더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 앞에서 무얼 하든 딱히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실제로 알버트는 내 주접이나 푼수 같은 행동에 딱히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결론은 나는 알버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는 건데.

“왕자님?”

그거 말하면 죽을 것 같은데요.

“로제,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구나.”

그때, 책상 위 지팡이가 구세주처럼 반짝였다.

지팡이가 경찰차 경고등처럼 반짝이는데 알버트는 흘금 시선을 주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팔짱을 낀 채 내 앞에 선 그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자리를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쯤이면 알 수 있다. 아니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다.

알버트는 나를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내가 그에게 가진 호감보다는 깊다.

그 앞에서 보였던 부끄러운 행동들을 떠올리던 나는 침묵했다.

내가 알버트라면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며 외계인 보듯이 봤을 것 같긴 한데….

대체 내 무엇이 그의 마음에 든 걸까?

지팡이가 구세주라 말했던 것 취소한다. 애초에 알버트가 신경 쓰지 않으면 구세주고 구원이고 아무 쓸모도 없는 거였다.

말을 꺼내면 죽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넘길 수도 없었다. 내 대답을 듣기 전까지 알버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그냥 좋아한다고 할까?

더 문제는 오늘 대화가 끝나고 나서도 나는 그와 꽤 오랜 시간 같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에게 아, 저는 왕자님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와 나는 한 번 보고 말 타인이 아니라 계속 서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사이다.

매일 아침 보고-하양이 PT를 부탁한 걸 나는 처음으로 후회했다-, 밥을 같이 먹는 사이.

하지만 문제를 피한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다. 내가 알버트를 좋아한다 말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문제였다.

하녀와 왕자님 사이의 사랑은 소설에서나 허용되는 것이다. 보통 나라에서 그를 따르는 가신들이 ‘난 지금 하녀와 사귀고 있소~’ 했을 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그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결국 나는 솔직히 답하기로 했다.

나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왕자님, 저희 처음 계약했던 때 생각나세요?”

나는 알버트에게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진담 반, 농담 반을 담아 묻던 말. 내가 재촉해 얻어냈던 답.

그래,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했다.

“나는 널 사랑하지 않을 거란다, 로제.”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던 사람은 대체 어디 갔을까.

“저한테 반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

“왕자님께서도 저보고 왕자님께 반하지 말라는 듯 말씀하셨고요.”

“…….”

“저는 왕자님의 명을 따르는 거예요.”

나는 문제의 화살을 그에게로 돌렸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만 말하면 정말 알버트의 살벌한 눈빛에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이 문제의 초점이 알버트가 맞기도 했다.

“저는 그때 당시 왕자님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너무 잘 알거든요. 그래서 감히 왕자님께 다른 마음을 가질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알버트는 로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로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비록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난 그의 마음을 존중했다.

적당히 돌려서 말했는데 괜찮았으려나! 나는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두근두근.

하지만 알버트의 얼굴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싸늘했다. 작게 숨을 뱉은 알버트는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게 네 답이냐, 로제.”

“제가 왕자님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저는 왕자님이 인간적으로 멋있는 분이라 생각하고….”

“한마디로 좋아하지 않는단 소리구나.”

내 변명은 알버트의 철벽에 바로 무산되었다.

열심히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쓰는 나 자신이 처량했다.

알버트가 유한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하면 한 가지만 더 묻자꾸나. 키스는 왜 한 거니?”

“…정말 솔직히 말해도 되는 건가요? 지금 저 죽일 것 같은 표정이신데….”

“…….”

알버트가 잠시 침묵했다. 나는 그 침묵이 정말 무서웠다. 정말 날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아서.

…방금 말이 내가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던 건 아닐까?

나는 내 권리를 얼른 외쳤다.

“왕자님, 저희 계약에 저 죽일 수 없다고 써놓으신 거 기억나시죠? 전 여기서 나가 평온한 노후를 맞이할 거예요!”

똔똔똔! 쯔쯔쯔! 똔똔똔! 모스 부호로 구조 메시지를 보내듯 나는 급박하게 외쳤다.

턱을 괸 알버트가 느릿하게 말했다.

“…죽이지 않는단다, 로제. 그저 네가 왜 그런 오해를 했나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야.”

당신, 살벌한 얼굴로 변명을 잘도 하는군! 하지만 난 그의 말에 감히 반박하지 않았다.

“역시 왕자님이 그러실 리 없다는 거 알았어요.”

알버트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내가 그럴 리 없다는 거 잘 알고 있겠지. 그러니 대답하거라.”

울며 겨자 먹기였다, 이건. 알버트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게 너무 잘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왕자님께서 거부할 수 없게 만드시거든요.”

사실 이건 알버트가 제일 잘 알 거다. 그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얼마나 큰 영향력을 선사하는지.

알버트가 허탈한 듯 웃었다. 자신의 이마를 짚던 알버트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속삭였다.

“로제, 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재능이 있구나.”

“…….”

“꽤 훌륭해.”

“…죄송합니다, 왕자님.”

알버트를 거절하지 못한 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키스 때문에 오해했다면 그건 미안했다.

하지만 알버트가 무슨 생각으로 내 감정을 물어보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애초에 그의 감정이 순수한지부터 의심스러웠다.

말했듯이 여긴 탑이라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우리가 평생 여기서 살 것도 아니고, 알버트는 그저 한때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곳에 여자는 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책 속의 로제와는 달리 나는 상식을 가진 멀쩡한 사람이니까.

…사실 내가 그러길 바라고 있는 거긴 했다.

아직도 빤히 날 내려다보는 알버트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나도 그를 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얼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숨을 내쉬던 내 귓가에 알버트의 목소리가 박혀들었다.

“그래, 나도 대답을 해야지.”

…예?

아니, 굳이 확인 사살을 한다고?

나는 정말이지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생각을 대놓고 말하기에는 내 간이 좀 쪼그라든 상태였다. 결국 나는 알버트가 말을 끝내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잠자코 있는 나를 보며 마음에 든다는 듯 웃은 알버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네가 신경 쓰여.”

고백받았다.

그것도 이 나라 왕자님께.

무려 돌직구로!

이건 눈치가 없다며 변명할 수도 없게 만드는 촌철살인이다.

“생각나고 만지고 싶어. 로제, 이건 신경 쓰이라고 하는 말이란다. 들었니?”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처음 단어를 가르치듯 알버트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널 죽일 수는 없으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나 정말 죽을 뻔한 거 맞구나…?

생사를 넘나드는 생존 스릴러. 주연은 나 로제 아티어스… 아니, 유정인.

“어쩌겠느냐.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것을. 하지만 난 혼자 하는 짝사랑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란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알버트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나와 거리를 줄였다.

키스하기 전처럼 숨소리가 들렸다. 알버트가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날 사랑하게 만들겠다는 말이야, 로제.”

알버트답게 오만하고도 감미로운 고백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알버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돌려 말하면 네가 알아듣지 못한 척 넘어갈 걸 알고 있기에 얘기한 거란다.”

확인 사살까지 하는 알버트의 철저함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넌 지금 내 얘기를 들었어.”

나를 파악했다더니 그 말이 진짜였다. 눈치 없는 척 넘어가려던 것까지 모조리 읽힌 나는 오픈북이었다.

그는 내게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았다. 고개가 점차 멀어졌다.

알버트가 지팡이를 흘끔거렸다. 아까 전보다 빠른 속도로 반짝이는 지팡이는 꽤 긴급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후 한숨을 내쉰 알버트는 드디어 지팡이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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