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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6화 (16/156)

16화.

이렇게 앞에서 보니 알버트의 앞머리도 제법 자라 그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이때까지 그대로 둔 게 용했다.

나는 망설이다 알버트에게 제안했다.

“왕자님, 앞머리도 잘라드릴까요?”

“어느 정도?”

“으음…. 잠시만요.”

나는 의자에 앉은 알버트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살짝 숙였다. 알버트가 고개를 올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그를 올려다본 적은 많아도 내려다본 적은 없었는데.

그래서 이런 구도로 그를 본 적은 전혀 없었는데….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알버트의 얼굴은 오늘도 아름다웠다. 이 얼굴을 나만 보는 건 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잡생각은 이제 그만하자.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뜬 나는 진지하게 알버트의 머리 길이를 가늠했다.

“눈썹에서 약간 위 정도면 될까요?”

“그렇게 말하면 모르겠구나.”

“모르는 척하시는 거 아니고요?”

“내가 굳이 왜 그러겠느냐.”

그 말에 또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알버트가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너무 자연스러운 접촉이라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가 내 손을 자연스레 그의 머리카락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번 잡아서 보여주는 것이 좋겠구나.”

얼떨결에 나는 그의 손길을 따라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알버트의 이마, 아니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알버트에게 그 소리가 들릴까 조마조마했다.

부러 고개를 돌린 나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지금 당황한 걸 들키면 알버트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걸 테니까.

자의식 과잉은 안 돼.

안 돼.

알버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할 리 없다.

초인적으로 주문을 되뇐 나는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러고는 상사를 앞에 둔 부하 직원의 마음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진지하게 길이를 쟀다.

“이… 정도요.”

나는 검지와 중지를 펴 그의 머리카락 중간 정도의 길이에 멈췄다.

알버트의 시선이 내가 잡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보였다.

그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괜찮구나.”

“그럼 가위를 가져올게요.”

나는 가위를 핑계로 알버트에게서 자연스레 빠져나왔다. 책상 위에 뒀던 가위를 집어 들었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느릿느릿 걸었다. 일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자유는 찰나에 불과했다.

의자에 앉은 알버트 앞으로 돌아온 나는 가위를 잡고 심호흡을 했다.

“망쳐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 말 취소하시면 안 돼요.”

시작하기 전 알버트에게 다시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알버트의 선선한 대답과 함께, 내 첫 미용이 시작되었다.

“그럼 눈을 감아주시겠어요, 왕자님?”

머리카락이 날리지 않도록 앞으로 고개를 숙인 알버트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기다란 속눈썹이 드러났다.

알버트가 눈을 감은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살짝 밝힌 불에 그늘진 얼굴은 성자처럼 성스러웠다.

내가 손을 대면, 성자를 타락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착각이지만.

나는 조심스레 알버트의 앞머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알버트 앞으로 다가가 조금씩, 아주 쥐꼬리만큼씩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서걱. 알버트 주위에 회색 머리카락이 떨어졌다.

서걱.

밑에 떨어지는 회색 머리카락이 마치 은하수 같았다.

“후… 저 잠시만 쉴게요.”

내가 잠시 가위를 놓고 쉬고 있을 때, 알버트가 눈을 떴다.

숨 쉬는 것마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알버트의 눈이 맑다고 생각했다.

그가 날 한참이나 응시했다. 짙게 내려앉은 눈빛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처럼.

민망한 마음에 웃으려던 차였다.

“로제, 우리 키스할까.”

그가 물었다.

나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못 들었다고 변명할 것을 아는 것처럼 다시 한번 말했다.

“우리 키스할까.”

그 말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난 지금 네게 키스하고 싶은데.”

매번 알버트의 말에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거부할 수 없다.

그의 얼굴이.

목소리가.

분위기가.

알버트의 모든 것이 날 끌어당겼다.

지금 이 말은 당신에게 무슨 의미일까.

찰나의 충동일까?

혹은 그 이상일까.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대신 나는 눈을 감았다.

알버트가 내 목을 감싸 쥐고 천천히 끌어당겼다.

따스한 입술이 맞닿았다.

***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나는 알버트와 처음으로 키스했던 때를 떠올렸다.

내가 이 책에 막 빙의했을 무렵, 로제가 알버트를 이용해 제 사리사욕을 채우던 순간이었다.

그때 알버트가 나를 보던 눈빛을 기억한다.

나는 알버트에게 내가 당당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눈조차 감지 않았다.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었던 나날이었다. 나는 이번 키스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순간의 충동으로 넘어갈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밤이 깊은 탓일까?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렸던 나를 눈치라도 챈 듯, 알버트는 내 뒤통수를 부여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가벼운 키스가 아니었다. 다른 손은 자연스레 내 허리를 감쌌다.

정말 알버트에게 빨려들 것 같았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숨을 공유하는 시간.

나를 탐험하듯 넘나드는 알버트는 내 모든 걸 가지려는 사람 같았다.

감고 있던 눈을 뜬 나는 알버트와 코앞에서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나른하게 반쯤 감겨 있었다.

그도 나만큼이나 지금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진 나는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알버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하나 알버트는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고개를 비튼 만큼 자신의 고개를 비틀었다.

잠시 열렸던 틈은 알버트가 입술을 부드럽게 붙이며 나를 장악하는 순간 사라졌다.

나는 이제야, 하녀 로제가 알버트의 아무것도 가지지도, 겪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술만 붙이고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리던 남자는 없었다.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이어지는 키스가 너무 숨 막히게 강렬하고 달콤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행위 자체에 집중해야 했다.

숨이 막혀 얼굴이 빨개질 즈음, 알버트가 입을 뗐다. 나는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긴 앞머리에 가끔 가렸던 눈매가 선명히 접혔다. 그의 여유가, 만족감이 너무 여실히 보였다.

나른하게 치켜뜬 눈매, 나만 바라보고 있는 시선. 숨을 헐떡이는 나와 다른 여유로운 모습은 마치 권태로운 폭군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가만히 쓸었다. 입술이 화끈거렸다. 여유로운 표정은 같았지만, 지금의 알버트는 적당한 선을 지키던 평소의 모습과는 뭔가 달랐다.

폭군.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가지고 군림하는 왕. 한 번 잡은 것은 놓지 않는 맹수.

입술을 쓸던 손은 내 턱 끝에서 멈췄다. 나는 알버트가 내게 다시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키스가 조금 두려웠다.

…대체 왜 바뀐 거지?

난 계약으로 묶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물론 나도 알버트처럼 키스하겠냐고 물을 수 있지만, 그건 나에 대한 알버트의 신뢰를 잃게 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 반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알버트가 내게 묻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나는 시선을 올려 그를 응시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한 욕망이 비친 것 같았다.

내가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가 숨겨왔던 걸까.

원을 그리듯 내 턱 밑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떨어졌다. 하지만 내 허리를 감싼 손은 남아 있었다. 키스가 끝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품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로제.”

알버트가 빙그레 웃었다.

평소 그의 얼굴이 겨울 같았다면, 지금 그는 봄이었다. 지금 막 꽃을 화사하게 피운 봄.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절.

알버트가 언제나 그랬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구나.”

평소하고 다른 분위기와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는 지나치게 섹시했다.

“어쩌면 이 계약의 갑은 너일지도 모르겠어.”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저는 왕자님의 명을 따른 죄밖에 없는데요.

속으로 꿍얼거린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제 이건 자의식 과잉이라 치부할 수 없다.

정말 이 남자는 날 홀리려고 다짐한 게 분명했다.

이제 더 이상 그가 내게 관심이 없다 넘길 수 없었다.

키스하고 싶다고 말하던 순간부터, 서로 공유하던 숨까지.

알버트가 나를 그냥 하녀로 보지 않는다는 건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녀와 왕자님. 서로 별것 없는 계약 관계, 혹은 갑을관계. 가볍게 내리던 관계의 정의가 달라졌다.

균열이 갔다.

“왕자님.”

“그래.”

“우리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보던 알버트가 선선히 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요?”

나는 이미 한 번 그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려다 포기한 적이 있다. 그의 행동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 또한 네 선택이겠지.”

눈치 빠른 그가 내 말뜻이 무언지 몰랐을 리 없었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얼굴을 부여잡고 마른세수를 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 여기 정리할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머리 자르는 건 우리에게 이미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알버트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평소의 장난기를 지우고 대화에 온전히 집중했듯, 그도 똑같이 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치운 후 가위를 다시 서랍장 안에 넣었다. 그 순간에도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나는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 알버트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나를 응시했다. 그 손길이 나에게 닿았던 순간의 감촉이 뇌리를 생생히 파고들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왕자님에게 대놓고 질문하는 것은 너무 무례한 것 같아 몇 가지 가설을 준비해 봤거든요.”

“로제, 그냥 내게 질문하는 것이 어떠니.”

“아니요, 괜찮아요. 제 가설에 답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가 왜 이러는지에 대해 나는 장렬히 고민했다.

사실 꽤 여러 이유가 떠올랐다. 책 속에서 그가 하녀 로제에게 그랬듯 나를 이용하기 위한 연기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가장 적절한 이유는 하나였다.

다소 갑작스러운 감이 있지만, 달라진 그의 행동과 나를 향한 눈빛을 모두 이해시켜 줄 수 있는 이유.

그의 입으로 직접 듣기에는 부담스러운 진실.

“왕자님, 혹시 저 좋아하시나요?”

좋아한다는 감정.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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