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리암은 알버트의 침묵에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하, 항상 괜찮다 말씀하시는데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리암은 언제나 괜찮다고 말하는 알버트가 안타까웠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탑에서 나오시는 즉시 그 하녀도 바로 없애 버릴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
말을 이어가려던 리암은 눈을 가늘게 뜨는 알버트를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하? 제가 혹시 못 할 말이라도….]
너무 주제넘은 말을 한 것일까. 리암은 안절부절못했다.
알버트는 의자 뒤편에 기대어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 로제에게 보이던 것과 다른 냉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섬뜩했다.
“리암, 나를 생각해주는 건 알겠으나 앞으로 로제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말거라.”
[…그 하녀 말씀입니까?]
“그래.”
생각에 잠긴 알버트가 눈을 나른하게 치켜떴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아이는 네 생각과….”
로제를 떠올리는 알버트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어렸다.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다르거든.”
[…예?]
리암은 더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알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만 하자꾸나.”
다독이듯 다정한 말이었지만, 이게 알버트의 선이라는 걸 리암은 너무 잘 알았다. 자신이 넘을 수 없는 선.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주군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특히 그게 알버트라면.
리암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리암과 통신이 끝난 후 알버트는 침대에 누웠다. 내일 제시간에 일어나기 위함이었다.
규칙적인 생활에 따분하다고 할 수 있는 일상.
평범함과 거리가 멀던 알버트는 요즘 자신의 생활에 생기가 도는 걸 느꼈다.
답답하기만 할 줄 알았던 일상이 한 사람으로 인해 바뀌고 있었다.
평생 겪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변화였다.
이 변화가 그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모르지만, 한번 몸을 맡겨보고 싶어졌다.
***
기분 좋게 치킨을 먹은 후 올라간 나는 알버트를 걱정하다 고개를 저었다.
알버트의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차라리 신경을 끄는 게 나았다.
“그럼 하양이를 위한 계획이나 세워볼까.”
종이와 펜을 꺼낸 나는 바닥에 종이를 펼치고 앉았다.
“으음….”
나는 하양이가 무사히 성체 드래곤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써 내려갔다.
먹는 것도 사람과 비슷하니 체력을 키우고 강해지는 것도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을 것 같았다.
탑에서 나간다면 제대로 된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 존재하는 책은 동화책과 서적 몇 권뿐이다.
당연히, 그중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 빗대어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하양이의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X튜브에서 보던 홈트레이닝 동작 몇 개와 숨쉬기뿐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아주 적합한 인물을 생각해 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몸이 좋은 사람.
알버트 그레이!
운동할 때 그는 온몸을 체계적으로 썼다. 내가 알지 못하는 운동법도 꽤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알버트는 하양이에게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알버트가 하양이를 맡아줄 것 같지 않다는 거다.
왕자님에게 반려동물 체력 키워달라는 하녀가 말이 되나.
“어떻게 하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나는 우선 알버트와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물론 그가 운동하는 시간에 맞춰서.
나는 종이와 펜을 한쪽에 치우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빨리 일어나야 했다.
***
새벽에 겨우 눈을 뜬 나는 아직 졸린 눈을 비볐다.
반쯤 감긴 눈으로 옷을 갈아입은 다음, 턱이 빠질 것처럼 큰 하품을 했다.
“흐아암….”
역시 일찍 일어나는 건 힘들어. 아직 몸이 잠에서 깨지 못한 게 느껴졌다.
“…이럴 때는 커피가 없다는 게 아쉬워.”
아침에 멍한 정신에 들이켜면 확실히 정신이 드는데, 이럴 때일수록 커피 한 잔이 절실했다.
나는 거북이처럼 어기적어기적 사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졸린 눈을 비빈 나는 웃옷을 벗은 채 운동에 열중하던 알버트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 당장 화보 촬영을 해도 될 것처럼 완벽하게 짜인 근육이 나와 인사했다.
…저 몸엔 체지방이라는 게 존재할까?
침을 삼킨 나는 시선을 슬슬 위로 올렸다.
목에 걸고 있는 수건으로 얼굴을 한 번 닦은 알버트가 물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지, 로제?”
“제가 하양이한테 운동을 시켜보려 합니다, 왕자님.”
내 말에 알버트가 미간을 좁혔다.
“…네가?”
나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양이 드래곤 만들기 프로젝트 제1탄. 체력 키우기예요.”
“흐음, 체력이라….”
“그런데 제가 아는 운동이 별로 없어서요. 왕자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은데….”
나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며 알버트의 눈치를 살폈다. 알버트는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하녀가 무려 왕자에게 드래곤 새끼를 버리고 도망가겠다는 거니.”
“…….”
“로제, 넌 참 무정하기 짝이 없는 주인이구나.”
알버트가 팩트(fact)로 나를 쐈다! 효과는 굉장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알버트가 내 말을 들어줄까.
곰곰이 생각하는 내게 알버트가 먼저 제안을 했다.
“이렇게 하자, 로제.”
그리고 난 그걸 덥석 받았다.
“예! 어떻게 할까요, 왕자님!”
“너도 함께 운동하는 것으로.”
“…저도요?”
이거… 알버트가 던진 미끼를 내가 물어버린 건가?
나는 슬슬 뒤로 물러섰다.
평생 숨쉬기가 운동의 전부였던 제게 무슨 끔찍한 말을 하시는 겁니까. 당신은 악마가 틀림없어.
팔짱을 낀 알버트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네가 한다면, 이 새끼 드래곤도 도와주도록 하마.”
“…왕자님, 제가 땅 좀 덜 받을 테니 그냥 해주시면….”
운동을 피하고 싶은 내 마음은 절실했다. 내 몫의 땅을 줄여서라도 피하고 싶을 정도로.
“기각. 그럼 없던 일로 하자꾸나.”
“왕자님, 제가 운동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세요? 와, 너무 하고 싶다. 저는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알버트는 가차 없이 나를 쳐냈고,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새벽에 일어나 그의 방에서 함께 운동하기로 했다.
이게 뭐야, 마치 출근하는 것 같잖아…! 8시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럼 오늘부터 시작하지.”
“아니요! 저는 내일부터 하겠습니다. 하양이는 오늘 부탁드립니다, 왕자님! 사랑합니다!”
부리나케 외치고 부엌으로 피신 온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원래 오늘 할 일은 내일의 나에게 미루는 거라 했다. 내일의 나, 애도를 표한다.
“어, 그러고 보니 사랑한다고 해버렸네.”
우스갯소리지만 알버트 앞에서 말하면 농담이 아니게 될까 봐 일부러 조심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만큼 알버트가 편해진 모양이었다.
옆집 잘나가는 엄친아를 보는 느낌이랄까. 근데 알고 보니 그 엄친아가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고위 귀족!
자고로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최고라는 소리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왕자님이 착각할 리도 없을 테고.”
알버트한테 사랑한다 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겠어? 안부 묻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도 앞으로는 입조심에 각별히 신경 써야겠다. 말이 씨가 된다고, 나도 조심해야지.
속으로 다짐한 나는 아침 만들 재료를 가져오기 위해 창고로 향했다.
***
아침은 밥에다 계란프라이를 올리고 간장에다가 비벼 먹었다.
어제 치킨을 만드느라 모든 정신과 체력을 소비한 내게 극한의 귀차니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점심은 어제 쓰고 남은 기름에다 감자튀김을 하고, 고기를 좀 썰어서 굽는 것으로 때웠다.
고기는 굽기만 해도 맛있어서 정말 좋다.
저녁은 간단히 계란볶음밥을 해 먹었다. 요리를 하면서 나는 달걀의 중요성을 몇 번이나 깨달았다.
하루에 맛있는 거 하나씩만 해 먹자가 내 모토였는데, 어제의 치킨 때문에 예외가 생겼다.
저녁까지 먹고 난 후 나는 오늘도 책상에 앉아 연구와 공부에 집중하는 알버트를 슬그머니 응시했다.
…그의 침대 위에 누워서.
내가 아무리 침대 체질이 아니라 하지만, 계속 딱딱한 바닥에서 자니 침대가 그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늘 알버트의 머리를 잘라주기 전 그의 침대를 점령한 것이다.
사실 알버트가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는 알았다며 흔쾌히 답했다.
이불 안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았고 그냥 침대 위에 눕기만 했다.
“와, 푹신하다.”
로제가 좋은 것으로 주문했었던 모양인지 적당히 푹신해서 자기에 딱 좋았다.
며칠만 써볼 걸 그랬어. 나는 알버트와 계약을 체결한 즉시 다락으로 올라간 내 자신을 원망했다.
“좋으니?”
일을 거의 끝낸 알버트가 모노클을 고쳐 쓰며 물었다.
나는 침대 위를 한 번 뒹굴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침대를 선호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바닥이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것도 맞는 말이어서 나는 바로 수긍했다. 난 둘 다 좋다.
“바닥도 나쁘지 않아요. 일은 다 끝내셨어요?”
“그래, 넌 준비되었니?”
나는 심호흡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준비되지 않았지만 왕자님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거짓말을 쳐볼게요.”
“망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지 않니.”
자리에서 일어난 알버트는 의자를 휴지통과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자리에 앉은 그가 나를 보며 검지를 까닥였다. 손짓 하나에도 우아함이 묻어났다.
“이리로 와.”
어찌 보면 낭만적인 소리가, 이렇게 무섭게 들릴 줄이야.
“왕자님, 저 이번 보고서에는 왕자님을 손가락만 가지고 까딱 못 하게 했다고 쓸래요.”
나는 침대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오며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알버트에게 할 수 있는 소소한 복수는 왕에게 전하는 보고서에 내가 알버트를 고문했다고 상상해서 적는 거였다.
알버트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피식 웃었다.
“마음대로 하거라. 그 왕이 퍽 좋아하겠구나.”
하지만 알버트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드디어 문제의 시간이 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치 면접이라도 보러 온 것처럼.
나는 심호흡을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