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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4화 (14/156)

14화.

그가 이렇게까지 웃을 줄 몰랐던 나는 자랑스레 헛기침으로 욕을 마쳤다.

“직장에서요.”

“네가 다니던 직장은 궁인데… 궁에서 그런 말을 쓰는 이가 있더냐?”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랍니다, 왕자님.”

로제가 궁에서 누구와 일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여기도 똑같을 거란 생각이었다.

어딜 가나 고달픈 삶은 있는 법이고, 그럼 서로 뒷담화도 하는 법이고. 불공정한 상사라면 더욱더.

“속은 좀 풀리셨어요?”

“…로제 네 덕분에.”

“그러면 우리 먹을까요? 저 오늘 요리는 진짜 오래 준비했어요. 평소에 하던 게 아니라서.”

“그래, 평소보다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놀라게 한 건 미안하다.”

알버트가 내게 사과했다.

하녀에게 사과하는 왕자님이라니, 이거 그림이 좀 이상하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릇 위에 제일 잘 익은 닭다리를 놓아주었다.

“어허, 이제 우리 사과는 그만하는 거로 해요. 자, 왕자님. 제가 제일 맛있는 부위 드릴게요.”

“…다리가 제일 맛있는 부위라는 거니? 웬일로 빨간 음식이 아니구나. 너답지 않게.”

…같이 사는 동안 알버트도 나를 너무 잘 파악했다.

나중에 서이나가 나타나면, 알버트는 한식에 빨간 음식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자랑스럽다. 나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예, 왕자님. 이 치킨에서 닭다리를 주는 건 상대방을 사… 아니, 정말 좋아한다는 의미랍니다. 제가 얼마나 왕자님을 생각하는지 아시겠죠?”

닭다리를 양보하면 찐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양보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사랑이라 장난스레 말하려던 나는 어색해질 분위기가 싫어 말을 바꿨다.

괜히 의식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드시고서 맛있으시면 저한테 땅 더 주시는 것으로.”

“요리 한 번으로 네게 줄 땅을 늘리는 건 말도 안 돼.”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바로 태도를 바꾼 나는 감자튀김도 소개했다.

“이건 감자를 기름에 튀긴 것이에요. 말 그대로 감자튀김인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예요.”

“여태 네가 싫어하는 음식은 못 본 거 같기도 하단다.”

알버트가 턱을 괴며 피식 웃었다. 그는 나를 너무 잘 파악했다. 나는 소심히 항의했다.

“윽, 제가 싫어하는 음식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지. 내 식성은 물어보지도 않았으니.”

“요리는 제가 하는 겁니다, 왕자님.”

알버트의 말에 뜨끔한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탑에서 나가시면 원하시는 요리사 다 들이실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저보다 음식 잘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하지만 너 같은 음식을 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

“그것도 모르죠. 어디서 또 짠 하고 저 같은 음식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 왕자님을 놀라게 할지도.”

“비약이 심하구나.”

하하, 그건 진짜랍니다!

하지만 그때의 알버트는 내가 만든 음식을 처음 봤을 때만큼 충격받지는 않을 것 같다.

아닌가. 서이나는 뭐든지 만들 수 있으니 이야기가 다르려나.

또다시 궁금해진다. 둘이 과연 사랑에 빠지게 될지.

아, 다른 빙의물 로판 속의 여자주인공들처럼 ‘내가 나타났지만 넌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겠지!’ 같은 믿음은 아니다.

내가 나타난 이상 책 속의 내용은 이미 비틀리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서이나는 현명하고 아름답고, 무엇보다 알버트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빠질 수도 있는 법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던 것에는 그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괜히 여주인공 남주인공이 있는 게 아니다.

뭐 서이나가 아니라도 알버트가 마음에 들어만 하면 빠질 사람들이 수두룩하겠지. 저 미모를 누가 거부하겠어.

다만, 그 광경을 옆에서 구경 못 할 거라는 사실이 좀 아쉬웠다.

나는 하양이와 여행을 떠날 테니 탑에서 나가면 알버트를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 테지.

좀 아쉽다. 원래 연애는 남의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는 법인데.

과연 저 우아한 왕자님도 사랑에 빠지는 날이 올까?

과연 그 사랑은 쌍방일까? 혹은 짝사랑일까?

애초에 이 왕자님도 짝사랑이라는 걸 한 적이 있을까?

“왕자님, 왕자님도 첫사랑이 있으신가요?”

“먹고 있는데 할 만한 질문은 아닌 것 같구나.”

“앗, 그럼 저부터 말하겠습니다. 저는 오래되긴 했지만… 첫사랑이 있어요.”

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왕자님에게 견줄 바는… 못 되지만… 잘생겼습니다.”

그렇다. 내 첫사랑은 티브이 속 배우다. 그나마 알버트의 미모에 견줄 만한 얼굴을 가진 사람.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처럼 잘생긴 사람은 보기 힘들 터인데.”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내 첫사랑이 왜 궁금하더냐.”

“그냥 생각나서요. 싫으면 대답 안 해주셔도 돼요.”

의미 없이 한 질문이었고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다.

침묵하던 알버트가 말했다.

“있단다.”

“헉, 정말요?”

이건 정말 놀라운데? 책 속에서도 다뤄지지 않았던 알버트의 첫사랑이라니!

남의 연애 이야기가 나오니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내 변화를 알버트도 눈치챈 건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다. 선한 눈매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만 말해주마.”

하지만 아쉽게도 알버트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나도 눈매 선하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었는데. 알버트의 첫사랑은 대체 누굴까.

“이제 먹자.”

하지만 알버트가 화제를 돌리는데 굳이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포크를 집는 알버트를 보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 이건 손으로 잡고 먹는 겁니다.”

“…굳이 손으로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

“포크로도 드실 수는 있는데… 음, 먹기 좀 불편하실 거예요. 뼈 발라내면서 드시려면. 저는 이 방법을 추천드립니다.”

나는 손으로 닭날개를 집어 들었다.

좀 두껍지만 바삭한 튀김옷과 짭조름한 살이 같이 씹혔다.

그뿐인가? 겉에 촉촉하게 배어든 간장 소스는 또 어떻고! 정말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행복해!

“왕자님, 전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났어요.”

“주접도 이제 수준급이구나.”

“주접떠는 실력도 늘었다는 거죠? 감사합니다. 노력해 봤어요.”

맛있는 걸 먹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알버트를 조심스레 살폈다. 치킨 싫어하는 사람 없다지만 사람 입맛은 다른 거니까.

알버트가 치킨을 손에 쥐었다. 그가 바삭한 치킨을 한입 깨물었다.

바사삭. 튀김옷이 뜯기는 소리가 예술이었다. 사실 알버트 얼굴이 더 그랬다.

“어, 왕자님 입꼬리 올라갔어요.”

저건 알버트가 기분 좋을 때만 나타나는 표정!

“맛있는 거 먹으니까 기분이 좋아지지 않으세요?”

“글쎄.”

“아까 전보다 분위기가 편안해지신 거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느껴지니?”

“네, 아주.”

“아무렴 너만 할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게 편안했다.

나는 알버트가 내 말을 피하는 걸 깨달았지만, 굳이 꼬투리를 잡진 않았다.

기분이 나아졌으면 된 거고, 바로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감정을 갈무리할 시간은 누구나 필요한 법이다. 시간은 큰 도움이 된다.

알버트는 짧은 식사를 마친 후 손을 닦고 돌아왔다. 그는 입이 짧은 편이었다.

그래도 내가 먹는 모습을 보며 옆에 있어 주는 게 고마웠다.

나는 치킨을 먹으며 얼굴에 기쁜 감정을 마구 표출했다.

한참 구경하던 알버트가 놀라운 듯 턱을 괴며 물었다.

“넌 어떻게 그렇게 솔직하지?”

“솔직해도 되는 곳이니까요, 여긴.”

“여기가 어떤 곳인데?”

날 떠보는 듯한 말투. 나는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굳이 이런 것까지 감출 이유는 없으니까.

“음, 다른 이들의 시선이나 제가 응당 갖춰야 할 예절, 사회적인 태도 같은 것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곳.”

내가 다른 책 빙의 인물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곳에 있는 영애들과 다른 것도 아니다.

나는 탑에 있기에 이렇게 솔직할 수 있는 것이다.

장소가 주는 마술이었다.

하녀와 왕자.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두 남녀의 만남.

오로지 둘만 존재하는 공간이기에 나는 때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

아, 물론 그가 나를 죽이지 않는다는 계약도 마찬가지다.

밖이었다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고개를 조아리고 덜덜 떨었을지도 모른다.

그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두려움에 떨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겠지.

“솔직히 밖이었고 계약도 안 했다면 저는 지금 왕자님께 이미 목이 잘리고도 남았을걸요. 이렇게 오만방자한 하녀를 누가 놔두겠어요.”

“네 상황 파악은 기가 막히게 하는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나는 알버트의 말에 헤헤 웃은 후 감자튀김을 물었다.

아직 따뜻한 감자튀김은 속은 촉촉하고 겉은 바삭했다.

역시 튀긴 건 겉바속촉! 나는 감자튀김을 우물거리다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지금 먹는 음식이 왕자님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티 내지 않는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니까.”

알버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구나.”

이럴 때마다 나는 그가 키우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내 말을 좋게 받아들여 준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게 알버트가 내게 전할 수 있는 적정선의 스킨십 같아서.

아, 오늘 안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왕자님, 그거 아세요?”

“무어냐?”

“왕자님은 오늘도 잘생기셨어요.”

“하하.”

알버트가 또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그를 웃게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

저녁이 되었다.

로제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고, 알버트는 자신의 공간에 혼자 남았다.

작은 창으로 달이 보였다.

죽은 이들은 겪지 못하는, 보지 못하는 나날들을 그는 살아가고 있었다.

알버트는 그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의 얼굴을 허공에 그렸다.

알버트는 시간 속에 이 분노와 증오가 사라지지 않길 바랐다.

그는 잠시 눈을 감으며 애도했다.

“부디 평안하길 바라.”

훗날 그의 나라에서 가장 먼저 기리게 될 이들을 위하여.

지팡이 끝이 반짝거렸다. 리암이 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알버트는 기도를 마친 후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의 주변에서 마력이 웅웅거렸다.

지팡이에서 흘러나온 빛은 허공에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다.

“마탑은?”

[저하를 가두는 데 가담했던 마법사들 리스트는 모두 모았고, 반 정도 처리했습니다. 나머지도 수색 중입니다.]

“수고했다.”

알버트의 말에 리암은 고개를 숙였다.

리암 메이슨.

메이슨 공작으로도 알려진 그는 본래 중립 세력이었으나, 로스투라투의 도가 넘는 행동들에 분노하여 알버트 쪽으로 돌아선 이였다.

그리고 현재, 그는 알버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오늘 일로 상심이 크실 것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밖으로 나오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그쪽은 걱정 말고 일에 집중하도록.”

[예, 저하. 다만….]

리암이 잠시 주저했다. 알버트는 바로 물었다.

“무어지?”

[조만간 밖에 잠시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버트는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짓누르던 책임감이 새롭게 느껴졌다. 거의 단절되어 살았던 시간을 뒤로하고, 그의 원래 삶으로 돌아갈 시간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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