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아무런 의욕도 없는 하양이를 보며 나는 울컥했다.
“하양아,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는 많아.”
“…….”
“내가 같이 만들어줄게, 그 이유.”
하양이에게 남은 1년여의 시간. 그 시간 안에는 무조건 탑을 나갈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이곳을 나간 후엔 하양이와 여행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각성의 고통을 견뎌낼지는 하양이의 마음일 터였다.
사실 계약자가 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좀 무서웠다. 죽을 만큼의 고통은 상상이 가지 않았으니까.
하양이를 살리고 싶은 마음과 나도 살고 싶다는 모순적인 마음이 충돌했다.
책에 빙의해서도 아득바득 알버트와 계약을 한 건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우리 여행을 가자.”
건물주는 한곳에 있지 않아도 되거든. 어딜 돌아다니든 돈은 꼬박꼬박 들어와서.
물론 알버트는 이 계획에 없었다.
이게 내 계획에서 가장 큰 오류였던 셈이다.
이 당시의 나는 그가 밖에 나갔을 때 어떻게 변할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
하양이와 눈물겨운 이야기를 마친 나는 치킨 만들기에 돌입했다.
먼저, 이미 손질되어 있는 닭고기를 물에 씻었다.
깨끗해진 닭고기에 칼집을 낸 나는 우유를 가득 넣은 볼 안에 고기를 담가두었다. 잡내 제거를 위해서였다.
치킨은 많이 만들어본 요리가 아니긴 했다.
사실 기름도 엄청 튀고 주위도 더러워져 사 먹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도전해 본 적은 두 번 정도밖엔 없었다.
하지만 치느님을 만드는 방법을 잊어버릴 수는 없잖아? 치킨집이 있는 것도 아닌 이 세계에 이 레시피라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닭을 재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나는 그 시간에 하양이와 함께 낮잠을 잤다.
하양이는 내가 마련해 준 잠자리에서, 나는 벽에 기대어서.
알버트가 내려올 수 없는 곳에서 자는 잠은 꿀잠이었다. 진심으로 잠자리를 여기로 옮길까 고민했다.
잘 자고 일어난 나는 부스스한 얼굴로 밑간을 시작했다.
소금과 후추, 그리고 다진 마늘을 적당히 넣어 밑간을 마치자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왔다.
치킨을 하기 귀찮았던 이유가 여기 있다. 맛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시간은 금쪽같다. 나는 결심했다.
이곳을 나가면 서이나를 돈으로 유혹하겠어.
그녀가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으로.
어라, 그런데 알버트도 서이나의 음식을 좋아할 텐데. 알버트의 재력은 감당할 수 없는데…?
실없는 고민에 고뇌하던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맛있는 저녁이 먼저다.
남는 시간도 때울 겸 감자튀김을 하기로 했다. 아, 제대로 하는 건 아니고 야매로.
감자 겉껍질을 깐 나는 채 썰듯이 감자를 송송 썰었다.
어차피 오늘 치킨을 만드느라 냄비에 기름을 듬뿍 부어놓은 참이다. 기름이 한 번 쓰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써야지.
잘 썬 감자들은 한쪽에 차례대로 대기시켰다.
밑간해 재운 닭에 드디어 튀김옷을 입혀줄 때가 왔다.
사실 튀김옷도 야매긴 하다. 이 세계에 튀김가루를 파는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선택한 건 밀가루였다.
밀가루에도 적당히 간을 해준 뒤, 물을 부어가며 농도를 맞췄다.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튀김옷은 치킨의 생명이다. 치킨에 튀김옷이 없다면 그건 치킨이라 할 수 없다.
다른 볼에 밀가루를 넣은 나는 아까 전 해놓은 튀김 반죽에 간해두었던 닭다리와 몸통, 날개를 퐁당퐁당 넣었다.
그 뒤 밀가루만 넣은 볼로 옮겨 튀김옷의 겉에 가루를 묻혔다.
기름을 넣어둔 냄비는 팔팔 끓고 있었다.
나는 튀겨야 하는 치킨과 채 썬 감자를 냄비 옆으로 옮겼다. 얼굴에서 땀이 뻘뻘 났다.
“더워어…?”
연신 손부채질을 하는 나를 보던 하양이가 낑낑대며 손짓했다.
나처럼 손부채질을 해주려는 모양이었는데-
사실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하양이의 마음만으로도 기뻐!
“아, 시원하다.”
내 말에 하양이가 헤헤 웃더니 발을 열심히 올렸다가 내렸다.
나는 하양이의 재롱을 보며 튀김옷을 입은 치킨을 기름 안에 넣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치킨이 튀겨지기 시작했다.
기름 안에 부글부글 하얀 기포가 올라오면서 주위가 뿌예졌다. ASMR을 듣는 것 같았다.
좋아, 좋아.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 좋은 소리.
속까지 제대로 익을 수 있도록 시간을 둔 나는 한 번 튀긴 치킨을 다 건져냈다.
포크로 치킨을 찢어 속이 잘 익었나 확인하고, 나머지 치킨을 다 튀겼다가 다시 기름으로 직행시켰다.
자고로 치킨은 두 번 튀겨야 그 맛이 잘 나오는 법이다.
치킨을 다 튀기기까지 시간은 꽤 걸렸지만 노릇노릇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요리를 하는 건가?
현대 사회에서 느끼지 못한 감정을 책에 빙의해서 느끼고 있으니 묘했다.
감자튀김도 함께 곁들이니 완벽한 치킨 조합이 완성되었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매운 치킨인데, 여기에 고추장을 곁들일 수는 없으니 간장을 졸인 소스로 대체했다. 난 X촌의 간장 치킨도 좋아했다.
간장 반 후라이드 반.
내 비장의 무기인 치킨이 완성되었다.
튀김옷이 두껍거나 얇은 것으로 뒤죽박죽이었지만, 난 내가 해냈다는 것에 성취감을 느꼈다.
그릇에 치킨을 담은 나는 하양이에게 제일 먼저 치킨을 건네주었다.
치킨을 한입 먹은 하양이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이게 머야…? 맛있어어어….”
나는 하양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닭다리를 건네주었다.
하양아, 닭다리를 건네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 너는 아니?
사랑이라는 거란다.
시간을 보니 벌써 7시였다. 나는 하양이에게 닭날개까지 하나 건넨 뒤 위로 올라갔다.
“왕자님, 저 왔어요!”
내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알버트는 내 손에서 트레이를 가져가지 않았다.
아까 전 일로 삐진 건가. 내가 너무 티 나게 도망갔나?
미안한 마음에 얼굴에 더 미소를 띤 채 책상으로 걸어가던 나는 완전히 굳은 알버트의 얼굴을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알버트의 모습이 섬뜩했다.
그가 허공에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말해봐.”
[로스투라투가 왕자님께서 머무르시던 영지를 초토화시켰습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전부 사망했습니다.]
“…….”
[영지 전체에 불을 질렀더군요. 영지 밖의 사람들은 애석한 사고로 알고 있지만 아닙니다. 왕자님을 지지하던 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지팡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아무래도 알버트가 자신의 신하와 이야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더 현실감 없었다.
[자료 보내드리겠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그 말이 들리는 순간, 지팡이에서 빛이 흘러나오더니 프로젝터처럼 화면을 그렸다.
“세상에….”
놀란 건 알버트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손에 든 치킨 트레이를 떨어트릴 뻔할 만큼 놀랐다.
차마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현장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참혹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몸이 굳었다. 그런데 화면에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책 속에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고자 왕의 패악은 내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알버트가 죽여도 인정할 만한데….
“언제 왔느냐.”
인상을 찌푸리던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써 웃으며 상황을 무마하려던 때, 알버트가 내 눈을 가렸다. 내 얼굴을 전부 가릴 만큼 커다란 손이었다.
“…전 괜찮아요. 일하고 계셨던 거잖아요.”
“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단다.”
“왕자님도 절 잘 읽으시네요. 예전에는 꽤 잘 숨겼는데.”
“그런가. 넌 읽기가 쉬워서. 그리고 예전엔 숨겼다니, 서운하구나. 날 어떻게 보았었길래.”
알버트가 웃으며 대꾸했다. 알버트의 말에 나는 웃었다.
하하, 지금도 이미지가 비슷하긴 하답니다.
고귀하고 기품 넘치지만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내 상사님.
내 시야를 가리던 알버트의 손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참혹한 현장은 없었다. 하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진 탓에 온 줄도 몰랐구나.”
테이블 위에 치킨을 내려놓은 나는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했다.
알버트는 아까 내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놀랐느냐.”
“…예, 놀랐어요. 현왕이 그렇게 개새끼일 줄은 몰랐어서.”
“개새끼? 하하, 네가 욕하는 건 처음 들어보는구나.”
“개새끼가 너무 아깝다. 개는 귀엽단 말이에요. 쓰레기기라고 쳐주기도 뭐하군요. 왕자님은 화도 안 나세요?”
“나지. 나는데….”
그가 서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화를 내보았자 달라지는 건 없어. 그 시간에 세력을 더 늘릴 생각을 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는 이곳을 나가 그를 죽이고 왕이 되는 거니 말이야.”
그의 말도 맞지만 모든 부분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화를 내보았자 달라지는 게 없다니. 내 기분이 달라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내가.
“속에 담아두기만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문득 친하게 지내던 친구 혜인이가 떠올랐다.
직장에서 살갑게 대하며 처세술을 발휘하던 나와 달리 혜인이는 곰 같은 사람이었다.
가스라이팅을 밥 먹듯이 하는 상사를 만났지만 내색 한번 안 하다 우울증에 걸렸던 아이였다.
속에 울분이 쌓이고 쌓여 한계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그녀는 담아두기만 했다.
처음 들어간 직장. 일자리도 구하기 힘든 시기에 혜인이는 참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녀와의 술자리를 떠올렸다.
혜인이가 내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울던 날.
술기운을 빌어 평소 철옹성 같던 자기방어를 뒤로하고 내게 그동안의 괴로움을 털어놓았던 날.
참기만 하면 병이 된다. 마음의 병은 제일 치료하기 어렵다.
“왕자님, 그렇게 참다가는 화병 걸려요. 아세요?”
직장인의 대부분이 겪어보았을 병.
그 병에 대해,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왕자님에게 충고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내가.
상사한테 화병 걸리지 말라고 하는 부하라니. 내가 보기에도 이상한 그림이었지만 난 진심이었다.
“화병…?”
“참다가는 병난다는 말이에요. 제 앞에선 욕하셔도 돼요. 아니, 제가 먼저 할게요. 고자가 욕심이 더럽게 많아서 뭣 같은 놈이 뭐 같은 것만….”
나는 보란듯이 로스투라투에 대한 욕을 날렸다. 이것도 직장인의 비애였다.
스트레스 풀기에는 집에서 상사 욕하기만 한 게 없었다. 귀나 열심히 긁어라!
래퍼에 빙의한 듯 속사포처럼 욕을 쏟아내고 있으니 내 속까지 상쾌해졌다.
날 바라보는 알버트의 얼굴이 점점 기묘해졌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하하하! 하하하! 대체 그런 욕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결국 알버트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