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니, 왕자님. 하양이는 이미 들어왔고 제가 이름도 지어줬는걸요. 무엇보다 하양이도 이곳을 좋아한다고요. 안 돼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이를 어떻게 밖으로 내보내!
나는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알버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겨우 하루다. 하루 만에 그렇게 정을 붙인 거니, 로제?”
“함께 지냈던 시간과 정은 비례하지 않아요.”
어제 봤던 순간부터 난 하양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냥 냉정히 내보낼 수 없다.
그리고 하양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는 지금에는 더 그렇다.
나는 알버트의 냉정한 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쳐낼 때는 정말 대쪽 같은 인간이었다.
“로제, 저 아이가 살아남을 확률은 수천 번 중 한 번뿐이야. 지금 내보내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다.”
“하양이가 죽어서 슬퍼할지언정, 만난 걸 후회하지는 않을 거예요. 전 지금 시간에 최선을 다할 거니까요.”
나는 꿋꿋하게 대답했다.
알버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았지만 난 하양이와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했다.
“전 하양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으니까 지금 시간에 집중하겠습니다. 하양이한테도 저한테도 그 편이 더 좋을 테니까.”
“각성을 버티지 못한다면?”
“499살까지 버텼는데 그 시간을 못 버티겠어요?”
“결국 그 아이가 네 곁을 떠난다면 어찌할 테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나와 가장 가까웠던 가족을 떠나보내던 심정이 어땠는지 아직까지 생생하니까.
…하지만 인연이 시작되기 전에도 끝내 버리는 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도 잘 안다.
“끝이 보이는 관계를 시작하는 건 멍청한 일이다.”
“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은 추억으로 남습니다, 왕자님. 제게는 하양이와의 현재가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거예요.”
알버트와 처음 하는 말싸움이었다.
그는 반려동물을 들이라 할 때 선선히 말하던 모습과 달랐다. 내가 다쳤을 때 서늘히 눈을 빛내던 모습과도 달랐다.
화난 것 같지만, 그는 차분했다. 고요한 모습은 새벽녘의 하늘 같았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려워하며 인연을 버리지는 않겠어요.”
“…….”
“하양이가 수많은 곳 중에서 이곳에 온 것도 수천 번에 한 번뿐일 확률에 의해서일 테니까요.”
나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우선 하고 싶은 말을 지르긴 질렀는데… 후환이 두려워졌다.
사고 친 것과 별개로 뒷감당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알버트는 왕자고 귀족이다. 그의 말에 이렇게 대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의 심기를 엄청 건드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목을 슬슬 어루만지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인상을 찌푸린 알버트는 심기가 불편한 듯 보였다.
왕자님, 이렇게 대립했다고 설마 제가 받을 땅이나 돈을 깎으시는 건 아니죠…?
알버트는 눈을 살짝 치켜뜬 채 나를 응시했다. 나른한 눈매는 사람을 홀릴 듯 매력적이었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긴장감은 극도로 치솟았다. 나는 알버트가 말할 때가 좋다. 침묵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예?”
이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몸의 긴장이 쭉 빠졌다.
…이렇게 선선히 넘어간다고?
“내 고민에 대한 답을 준 것도 같고.”
“…예?”
방금 전까지 대립했던 것 같은데.
어리둥절해하는 날 보며 알버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처음 완강하시던 모습과 너무 다르신 거 아니에요?”
“그럼 내 원하는 대로 할까?”
“아니요!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허락해 줬는데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 바꾸면 어쩌려고.
손사래를 치는 나를 보며 알버트가 눈을 휘어 웃었다.
“네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는 처음 알았구나.”
“…놀라셨나요?”
“안 놀랐다면 거짓말이겠지. 표정에 드러나지 않더냐?”
“하지만 왕자님은 절 잘 받아주셨어요. 역시 너그럽고 아름다우신 분이세요.”
“매일 꿀이라도 한 덩어리 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 말투는.”
드디어 평소 같은 분위기로 돌아왔다. 나는 그제야 안도했다.
“네게 할 말이 생겼다.”
꿀꺽. 알버트의 말이 나오자마자 다시 긴장했다. 혼날 것 같아서.
“저녁에 머리 좀 잘라주거라. 어깨 주변이 답답하거든.”
“제가요?”
“그래, 네가.”
알버트가 한발 물러선 만큼 나도 그의 말을 들어줘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나는 이발할 줄 모르는데….
피할 수 없다면, 미룬다. 나는 비장한 얼굴로 물었다.
“내일 아침이 더 낫지 않으시겠어요?”
“아니, 난 오늘 해야겠어.”
내가 울상을 지었지만 알버트의 말에 번복은 없었다. 그는 너무 단호했다.
저녁 시간.
알버트와 내가 서로의 공간에서 나오지 않는 시간.
알버트는 무언의 약속을 깨고, 그의 개인 시간에 나를 초대했다.
내가 무엇이 이상한지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의 시간에 나를 끌어들였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내게 한 수 져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만 나는 알버트에게 경고했다.
“왕자님, 저 머리 자른 적 없어요.”
미용실이라는 현대 문물이 있는데 내가 굳이 집에서 내 머리를 자를 이유가 있겠는가.
“왕자님 머리가 엉망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 머리도 못 잘라 치렁치렁해지고 있는데 알버트의 머리라니.
잘생긴 사람에게 머리 모양 따윈 하등 상관없다지만, 굳이 내가 그걸?
“괜찮아, 대충이라도 해주면 돼.”
제가 안 괜찮아요, 왕자님! 제가요! 왕자님의 외모에 제 미용 실력은 해악이라고요!
“왕자님, 굳이 제게 이 일을 맡기셔야겠어요? 그냥 기르시는 게 어떨까요? 저는 왕자님이 긴 머리도 어울리실 거라 생각하는데….”
“이미 생각은 끝낸 참이야. 너는 따라주거라.”
하지만 알버트는 완강했다.
결국 나와 알버트는 합의점을 찾았다.
머리는 자르되, 날짜는 내일로.
울며 겨자 먹기였다. 내가 안 하겠다고 버티자 왕자님은 나중에 줄 땅을 늘려주겠다고 꼬셨다. 자본주의 앞에 나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
점심을 먹고 늘어지듯 낮잠을 잔 나는 저녁을 만들기 전 남은 시간에 가위를 들었다.
하루 남은 알버트의 미용을 시뮬레이션 해보기 위함이었다.
눈앞에 알버트의 머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가위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잠시 후, 나는 깔끔히 포기했다.
그래, 난 아니야. 이건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야….
맛있는 걸 먹으면 머리를 대충 잘라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는 치킨을 만들러 내려갔다.
하양이는 부엌 테이블 위에서 고롱고롱 자고 있었다.
테이블 위는 딱딱할 텐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내 다락방까지 올라가 여분의 담요를 챙겨서 내려왔다.
다시 연구에 몰두하던 알버트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부엌에서 자려는 거니, 로제?”
눈을 가늘게 뜨는 모습에서 나는 다시 한기를 느꼈다.
나는 그의 오해를 풀기 위해 얼른 대답했다.
“아니요, 하양이 깔아주려고요. 부엌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은데 혹시 저녁에 추울 수도 있잖아요.”
“부엌에 내가 가지 못하도록 몇 중의 마법을 더 걸어두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드래곤 새끼는 마력이 많은 곳에 끌리는 모양이군.”
“아하, 그런가 봐요. 그럼 전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하는 계단을 열었다.
담요를 들고 있어서 시야가 좀 가려진 탓에 조심조심 내려갔다.
하지만 발을 헛디디는 건 조심하는 것과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어어….”
계단에서 떨어지면 꽤 아플 것 같은데.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조심해야지, 로제.”
하지만 난 떨어지지 않았다.
알버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졸지에 알버트에게 뒤에서 껴안긴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마치 데자뷔 같은 상황이었다.
다만 그때는 내가 혼나는 쪽이었다면 지금은 알버트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것뿐.
나를 순식간에 낚아채 제 품에 넣은 알버트는 그대로 미동도 없었다.
평소 그가 운동하는 것만 보아왔던 나는 처음으로 알버트의 힘을 실감했다. 그가 꾸준히 키워온 순발력과 힘이 내 목숨을 구했다.
가까이서 낯설지만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알버트와 너무 가까웠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살갗을 간지럽힐 정도로.
그의 머리카락이 닿는 곳 하나하나 신경이 쭈뼛 일어섰다.
알버트가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괜찮은 거니?”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목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순간 심장이 뛰었다. 일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만 느껴졌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이런 길을 내려갈 때는 조심해야지.”
“네, 그러겠습니다. 다만 조심해도 안 될 때가 있더라고요.”
이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왕자님. 전 정말 조심했어요.
내가 항의하자 알버트가 눈썹을 올렸다.
“해서 네가 잘못한 것은 없다?”
“왕자님의 말은 언제나 옳죠. 제 목숨도 살려주시고. 왕자님. 배고프시죠? 제가 오늘은 하양이 있는 것도 허락해 주신 기념으로 치킨을 한번 준비해 보려 합니다. 만드는 데 꽤 오래 걸려서 먼저 내려갈게요!”
알버트와 또 싸우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담요와 함께 부리나케 내려갔다.
그러고는 부엌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닫았다.
“와, 진짜… 위험했다.”
순간 설렜다.
나는 아직 뛰고 있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죽을 뻔해서 뛰는 건지, 아니면 알버트 때문에 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심장은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후, 진정하자. 어차피 왕자님은 별생각도 없으셨을 거야.”
눈을 감은 나는 알버트의 상습적인 스킨십들을 떠올렸다.
그의 행동들에 별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레면 나만 손해다.
속으로 주문을 되뇐 나는 눈을 떴다.
“뭐가아아…?”
내 앞에서 하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냐. 아무것도.”
나의 평화롭고 평범한 삶에 알버트는 존재할 수 없어. 그가 내 삶에 더 이상 들어오면 너무 스펙터클해진다고. 나는 하양이로 만족할 거야.
그렇게 한참 내 자신에게 중얼거리니 정말 편안해졌다.
나는 아직 들고 있던 담요를 잘 개어 테이블 위에 올려주었다.
“하양아, 여기. 이제 저녁에 춥지 않을 거야.”
“나한테 주는 거야아…?”
하양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더니 다시 테이블 위로 훌쩍 올라갔다.
발톱으로 부드러운 담요를 만져보던 하양이는 이내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보드라운 감촉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기분 좋아아….”
저렇게 있는 하양이를 보자니 정말 애 같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그런데 저런 아이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죽을 거라니. 그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많이 넘겼었다니.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하양이는 여태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하양아, 넌 499살이라고 했잖아. 이제껏 어떻게 살아온 거니?”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양이가 웃으며 답했다. 웃을 때 하양이의 눈매는 정말 예뻤다.
“잤어….”
“응?”
“그냥 계속 잤어어…. 나는 별거 없는 드래곤 새끼니까아아…. 동굴 들어가서 잠만 잤어어….”
하양이는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딱 1년만 돌아다니면서 세상 구경하고 죽으려고 그냥 잤어어…. 고통으은… 두려우니까아….”
이야기를 하는 하양이의 얼굴은 말과 다르게 해맑았다. 그 차이가 마음을 아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