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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0화 (10/156)

10화.

“왕자님, 후식 드세요~”

나는 사과를 든 그릇과 함께 방문을 열었다.

알버트는 회색 머리카락을 묶고 모노클을 쓴 채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는 책상 끄트머리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바닥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버트가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나를 응시했다.

“피곤하구나.”

“일이 잘 안 되세요?”

“나쁘지 않아. 그저 복잡해서 그렇지. 아마 오늘 안에는 다 풀 것 같고.”

“와… 왕자님은 정말 천재시군요.”

고위 마법사 30명이 만든 지팡이의 저주와 탑의 마법을 이렇게 빨리 알아내도 되는 거야? 정말 책 속의 로제 아티어스는 겁이 없었구나.

나는 감탄하며 사과를 씹었다. 아삭한 맛이 좋았다.

“이제 다른 이들과 연락할 수 있겠지.”

“그렇구나…. 왕자님과 연락하고 싶은 사람은 많을 테니 걱정 없겠네요!”

고자 왕은 평민들에게 알버트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렸지만, 귀족들까지 제 손아귀에 넣고 조종할 순 없었다.

직접 로스투라투를 마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현왕의 악명이 자자했다.

그의 이기적이고 난폭한 성정과 형편없는 일 처리까지, 그를 좋아하는 귀족은 간신들뿐이었다.

“왕자님, 왕자님께 김이 묻었습니다.”

“…김이 무어냐.”

“잘생김이요.”

김이 없어서 좀 맥이 빠지긴 했지만 말뜻은 전달되었다.

알버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도 내 맥락 없는 칭찬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칭찬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좋아, 이야기를 꺼내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다.

“저 뭐 하나만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이게 본론이었던 모양인데, 뭔지 말부터 해보거라.”

소소한 부탁이니 들어줄 것 같았다. 난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 저 유명한 파티시에 한 명만 고용할 수 있게 해주세요.”

“…파티시에?”

“앗, 여긴 파티시에가 없나…. 디저트 만드는 사람이요. 제가 단 거 정말 환장하게 좋아하거든요.”

특히 우울할 때는 단것이 가장 도움이 된다. 기분을 바꿔주는 음식이라니, 이 얼마나 소중한가.

팔짱을 낀 알버트가 흥미롭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단것을 좋아하는구나. 난 네가 매운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매운 것과 단것은 정말 환상의 조합이라고요.”

내 말에 피식 웃은 알버트가 턱을 괴었다. 무언가 회상하듯 침묵하던 알버트가 중얼거렸다.

“궁의 요리사가 단 디저트는 기가 막히게 만들었었지.”

“헉, 진짜요?”

“난 단것을 좋아하지 않아 즐겨 찾지 않았지만… 가끔 생각이 나긴 하더구나. 혓바닥까지 소스라치게 단맛이.”

“와아… 하지만 왕실 요리사를 제가 어떻게 데리고 가겠어요.”

나는 내 분수를 아는 사람이다.

왕실 요리사면 그만큼 프라이드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을 나 좋자고 데려가기는 그렇다.

“나중에 제가 고용할 수 있는 요리사 한 명 추천해 주세요.”

한식은 그런대로 해 먹었지만 이곳에서 단것을 먹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미 만들어진 디저트를 가지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제빵 제과에는 젬병이었다.

알버트가 날 물끄러미 응시했다.

“로제.”

“네.”

“넌 나가면 뭘 하고 싶으니.”

알버트가 내게 거의 처음 던지는 질문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솔직히 답했다. 알버트에게 내 노후 계획을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하양이와 적당한 크기의 도시에서 건물주의 삶을 즐길 거예요.”

“건물주의 삶?”

“땅은 사람들에게 세주고 아담한 집을 찾아서 살고 싶어요. 요리사한테 온갖 요리 다 해달라고 할 거고… 돈 걱정 없이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여행도 다니고 싶어요. 유람선 타는 것도 재밌겠다.”

나는 화려한 삶을 그려보았다.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 여기서 나가면 새로운 삶 시작이다.

“평범하게 들리는 삶인데.”

알버트의 말에 난 멈칫했다.

하긴, 알버트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에게는 너무 이루기 쉬운 것들이니까.

돈 걱정 없이 원하는 것을 다 사고, 가지는 것이 그에게는 일상이었을 테다.

물론 그의 삶도 순탄치만은 않았겠지. 순탄했다면 애초부터 이 탑에 갇히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역시 그로서는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나를 이해하기 어렵겠지.

“네, 저는 평범한 게 좋아요.”

나는 인정했다. 그건 어릴 때부터 깨달은 진실이었다.

“사실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해서요. 그게 어렵기도 하고.”

책 속에 빙의하기 전 세상에서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기 위해 악착같이 애쓴다.

돈을 벌고, 자신을 희생한다. 나도 그 사회의 일부였다.

혼자 아등바등 살면서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찾았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애썼다.

나는 언제나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어렵다고?”

“왕자님 인생이나 제 인생도 평범하다고 볼 수는 없잖아요.”

우선 탑에 둘이 갇혀 있는 것 자체가 그렇다.

그것뿐인가? 이 책의 초반 장르는 감금 피폐다. 내가 들어와 회사원 생활로 바뀐 거고.

알버트는 앞으로 약 1년 더 고통받을 예정이었다. 서이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또 일에 파묻혀 살았을 것이고.

알버트는 언제 행복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물론 묻지도 않았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 느끼는 행복.

원하는 걸 살 수 있을 때 느끼는 행복.

소소한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난 잘 알고 있다.

갇혀 있는 탑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게 주어진 현실에서 우울하게 나쁜 면만 보기보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게 내 정신 건강에도 더 좋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결연하게 말했다.

“제 목표는 평범하게 살기예요.”

“…정말 넌 탑에 들어왔던 며칠 이후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구나.”

사실 다른 사람이 맞거든. 뜨끔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나는 더 활짝 웃었다.

“좀 철학적이었나요? 제가 왕자님의 얼굴을 보고 정신이 좀 돌았던 거 같아요. 왕자님이 너무 잘생기셔서.”

“…….”

“물론 지금은 제정신 탑재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요.”

이야기 주제를 돌려야겠다 싶어 나는 알버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왕자님은 이곳에서 나가면 뭐 하실 거예요?”

내가 던진 질문에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마치 내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던 알버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네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구나. 넌 나를 여기 데리고 온 장본인인데.”

“으음….”

“이 탑에서 평생 나와 함께 있는 게 네 계획 아니었나 싶거든.”

나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도 못 믿으시는 거예요?”

“아니.”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내려고 했는데 알버트의 대답이 생각보다 빨라 놀랐다.

그 뒤에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서 눈만 깜빡였다.

알버트가 놀란 내 얼굴을 보며 하얀 도화지처럼 말갛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가 잔잔한 파도처럼 흘렀다.

“농이었다.”

“…왕자님 농담은 재미가 없네요.”

내가 던진 말에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누군가에게 농담을 던진 적이 없어서.”

그것도 맞는 말 같고.

“한데 놀란 네 얼굴을 보니 꽤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해.”

“…그래서 나가면 뭐 하실 거예요?”

커튼을 치지 않은 창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알버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알버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이 되어야겠지.”

왜일까. 내게 그 얼굴이 쓸쓸해 보인 것은.

“난 살기 위해서 왕이 되어야 한단다, 로제.”

“…….”

“어느 한 사람이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싸움이거든. 난 이런 싸움을 잘 알아.”

나는 그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작위를 물려받기 위해 서로를 죽이기 전까지 싸웠던 그의 두 형을.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나는 못내 그것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에게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알버트의 삶에 아무런 존재도 아닌 사람.

그렇게 남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아슬아슬한 선을 잘 지켜야 했다.

알버트는 생각대로 로스투라투를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할 것이다.

나와의 관계는 바뀌었지만 알버트의 미래는 바뀌지 않았다.

궁금해졌다. 과연 서이나가 나타나도 마찬가지일까.

알버트는 책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랑에 빠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까?

난 알버트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무섭기는 하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알버트가 사는 세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나, 어제처럼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상한 거지.

애초에 나와 그는 살아온 세계가 다르니까.

나는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왕이 되고 나서는 일하느라 바쁘겠지.”

왕권 다지고 귀족들하고 나라 다스리는데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 열심히 일하시는 건 좋지만 과로사하지는 마세요.”

“하하… 내가 그럴 것 같니, 로제?”

“네, 왕자님은 완벽주의자시니까요.”

알버트는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한다.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사람이기에 지금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강철 같은 체력과 정신력을 이용해서.

하지만 그라고 지치지 않을 리가 없다. 누구나 쉬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그 사실을 잊게 되긴 하지만.

“전 왕자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내게 당신은 이제 책 속의 인물이 아니라, 옆에서 숨 쉬고 있는 사람이니까.

엄청 가까워지지는 못해도, 당신의 행복을 바란다.

알버트는 말없이 잠자코 나를 응시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할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삶에 그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있었을까 싶기도 했다.

나는 웃으며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했다.

“매일 일만 하지 마시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여유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단짠의 행복을 느껴보시면서요.”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책상에 앉아 있던 알버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이 부드러워서, 뭐라 거절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한데 로제.”

“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소가 기쁘기보다 서글프게 다가왔다.

“네 삶에 나는 없구나.”

인정한다. 탑에서 나간 이후의 내 삶에 알버트란 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지 못한 질문에 내 말문이 막혔다.

나는 변명하듯 답했다.

“왕자님의 삶에도 제가 없잖아요. 이제 밖에 나가시면 저 같은 하녀와 더 이상 마주칠 일도 없으실 테고요.”

내가 아무리 여기 법규와 신분제를 제대로 모른다고 해도, 하녀와 왕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는 안다.

그 사실은 알버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랬지.”

한데 나를 보는 알버트의 눈길이 이상했다.

“그랬었지.”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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