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고기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남은 고기를 그릇에 덜어둔 나는 하양이에게 그릇을 건네려다… 말았다.
“배고파아아….”
훌쩍이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는 여기 혼자 먹게 놔두고 나 혼자 위로 올라가려 했는데 생각에 바뀌었다.
혼자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 같은데…?
일주일 치 식량을 다 먹어버리면 어떡하지?
드래곤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게 그보다 두려운 일은 없었다.
먹기 위해 사는 인생인데 못 먹으면 어떡해. 탑에서 내 유일한 낙이 사라지면 곤란하다.
“…그냥 알버트한테 보여야겠네.”
알버트에게 하양이의 존재를 알리기 전에 더 친해져 보려던 나는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하양이가 여기 머무르려면 알버트도 알아야 한다.
드래곤이 아니라는 말뜻을 알버트가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알버트는 내가 여기서 아는 인간 중 가장 유식한 사람이니까.
그래, 알버트에게 정보를 뜯어내는 것이 낫겠다.
나는 하양이의 밥까지 트레이에 올렸다.
“자, 밥은 위층에서 먹을 거예요. 먹고 싶으시면 따라와 주세요.”
병아리반 여러분, 알았죠? 유치원 선생님에 빙의한 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한 나는 트레이를 들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하양이는 내 뒤에 착 붙어 섰다.
“그런데 넌 왜 나한테 존댓말 해? 이상해애애. 그냥 편하게 해줘….”
“어, 그럼 감사히 말 놓겠습니다. 하양아, 위로 올라갈까?”
하양이는 사람들을 대하는 게 어색한 듯 보였다.
기회는 있을 때 잡아야지.
나는 잽싸게 답했다. 고양이에 가까운 하양이에게 계속 존댓말을 쓰는 게 어색한 것은 사실이었다.
말투도 어린아이 같아 더 그랬다.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하양이는 쫄래쫄래 내 뒤를 따라왔다. 정말 반려동물이 생긴 기분이었다.
밥, 밥. 밥을 먹는 건 즐거워! 나는 아침 먹을 생각에 신나 위로 올라갔다.
“왕자님, 밥 가져왔어요!”
씩씩한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내 손에 들려 있던 트레이가 사라졌다.
알버트는 챙겨주는 걸 꽤 잘하는 편이었다. 사람의 호감을 어떻게 사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고.
아직 그의 의중을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날 죽일 것 같지는 않았다.
알버트는 나를 내려다보며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했다, 로제. 한데… 옆에 달고 있는 건 무어냐?”
트레이를 든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양이와 알버트가 대치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버트를 올려다보는 눈망울이 가히 슈X에 나오는 고양이 같았다.
나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답했다.
“탑 안에 들어온 새 식구 하양이입니다.”
“…하양이?”
“제가 지어준 이름이에요. 왕자님, 예쁘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저 동물에게 애칭도 붙여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러니?”
알버트의 말에 이상한 가시가 돋은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반려동물이 정말 싫은 걸까.
나는 헤헤 웃었다. 이런 상황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에이, 가까운 사이야 지금부터 되면 되죠. 앗, 그런데 저 궁금한 점이 있어요. 제 옆에 붙어 있는 게 뭐로 보이세요?”
바로 화제를 돌리는 거였다.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알버트는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
그의 눈에도 과연 하양이가 고양이로 보일까?
알버트는 자신에게 닿지 않는 트레이를 향해 열심히 손을 뻗는 하양이를 한심하게 바라보다 말했다.
“아직 드래곤이 되지 못한 새끼구나.”
“어, 고양이로 안 보이세요?”
내 말에 알버트의 시선이 흠칫 흔들렸다. 놀란 모양이었다.
“로제, 너도 고양이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구나.”
“네, 그런데 드래곤이 되지 못한 새끼라는 건….”
드래곤이 되지 못한 새끼라면, 앞으로 드래곤이 될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알버트의 태도가 이상했다.
드래곤이라면 분명 모든 사람의 호감과 존경을 사는 거대한 존재일 텐데, 알버트는 하양이가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다.
물론 하양이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도 괜찮다. 하양이는 귀여우니까.
원래 귀여우면 귀여운 것으로 다한 거다.
알버트는 내가 한 말에 더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가 우아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네게 보이는 모습을 설명해 보거라.”
“으음… 새하얀 동물이요. 귀여운 눈동자와 꼬리를 달고 있는.”
“이상하구나. 보통 사람에게는 고양이로 보이는 것이 정상인데.”
“맞아요. 하양이도 그렇게 말했었어요.”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은 하양이의 본모습을 볼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왜 볼 수 있는 걸까?
나도 보통 사람인데. 버프 하나 받지 않은 엑스트라.
“보통 드래곤 새끼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두 종류야. 첫 번째는 계약자, 두 번째는 마법사. 하지만 넌 둘 다 아니지.”
“…그렇죠.”
“한데도 볼 수 있다니 이상한 일이야.”
나는 계약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팡이를 쓰면서 마력이 생긴 건 아닐까요? 저한테 마법사의 자질이 생긴 건?”
“이 탑이 마력으로 뒤덮여 있긴 하지…. 마탑에 사는 마법사 30명은 족히 갈아 넣었으니 그럴 만하군.”
음, 그런 탑에서 용케 빠져나가고 반역 준비까지 성공적으로 마치는 당신은 먼치킨이 틀림없군요.
당신을 훌륭한 남주인공으로 임명합니다.
역시 남주인공은 날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버트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은 알버트가 팔짱을 꼈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였다.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렸다. 뭔가가 알버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정신을 바짝 집중한 채 나는 알버트를 응시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나와 있는 게 꽤 싫었던 모양이구나, 로제.”
…예?
나른하게 치켜뜬 눈에 할 말이 없어졌다.
“정말 이렇게 동물을 데리고 올 줄은 몰랐거든. 그것도 탑 안에서.”
“…….”
“나가지도 못하는데 용케 이런 동물을 데려왔구나.”
사근사근한 목소리에는 뼈가 있었다.
…이건 절대 칭찬이 아닌데?
알버트가 웃으며 물었다.
“왜 이렇게 열성적이었을까?”
“…….”
“내 무엇이 그리 싫었던 것이냐?”
이상했다. 분명 알버트는 따스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등 뒤에 한기가 일었다.
여기가 남극인가요? 왜 이렇게 몸이 덜덜 떨려?
하지만 난 굴하지 않았다.
왜냐?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맛있는 식사를 해야 하거든.
내 이름은 로제, 딸랑딸랑의 장인이죠.
나는 알버트의 손을 붙잡으며 실실 웃었다.
“아이, 왕자님. 왜 그러세요? 제가 왕자님 아니면 누가 있다고. 그리고 하양이는 제가 부른 게 아니라 여기 마력이 많아 좋다면서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건 알고 있지만, 충분한 설명은 아니구나.”
나는 알버트를 열렬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버트의 기분이 별로일 때는 아부가 최고의 방법이었다.
“저는 하양이가 대단한 드래곤이라 생각했어요. 꼭 받아들여야 하는 줄 알았는걸요.”
하얀 거짓말도 상황을 빠져나가는 데는 적절하다. 나는 알버트 앞에서 눈을 최대한 크게 뜨며 그를 칭송했다.
“왕자님은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똑똑하고 아름다우시니까 제 마음을 잘 알아주실 거라 믿어요.”
“아니, 넌 이 상황을 매우 좋아하고 있지. 능청도 이쯤 되면 잘 읽힌단다, 로제.”
…잘 먹힌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계속 밀고 나가기로 했다.
“아셔도 속아주시잖아요. 제가 머리 굴려도 왕자님은 절대 못 이기는걸요.”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내 말에 알버트가 피식 웃었다. 어이없다는 듯한 헛웃음이었다.
하지만 난 기회를 매처럼 낚아챘다.
난 미끼를 던졌고 넌 그걸 물어버린 것이여!
“어, 웃으셨으니 풀린 것으로 알 거예요? 그럼 저 배고픈데 같이 밥 먹으면 안 될까요? 오늘 밥은 더 맛있어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알버트는 트레이 위에 놓인 제육볶음을 보고는 침묵했다.
“…왜 네 음식은 언제나 빨간 것일까, 로제?”
그야 한국인의 음식이기 때문이지.
한국인과 빨간색은 떼어놓을 수 없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그에게 숟가락을 건네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의 아이덴티티거든요. 정체성. 저는 빨간 것을 사랑합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난 제육볶음을 밥과 섞었다.
음식을 응시하던 알버트는 내가 하는 것처럼 밥과 제육볶음을 섞었다.
“나도 줘어어어…. 배고파아아….”
“앗, 하양아. 여기 있어.”
나는 테이블 밑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하양이에게 제육볶음이 담긴 그릇을 건네주었다.
하양이가 헤벌쭉 웃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나를 보던 하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하양이가 누구야아아?”
“앗, 내가 지은 네 이름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줄게.”
“아냐아, 괜찮아…. 원래 이름이 없었어서어…. 하양이라. 하야아앙이….”
하양이의 말투는 느릿했다. 자신의 이름을 되새기던 하양이는 이내 제육볶음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다시 내 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알버트는 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먹으면 되는 거니?”
“이제 평소와 똑같아요. 이렇게 섞은 다음에 밥과 함께 드시면 돼요. 정말 맛있어요.”
나는 엄지를 척 올렸다. 숟가락에 두툼한 돼지고기와 밥을 함께 올린 나는 한입 크게 물었다.
입안에 터지는 매콤한 양념, 돼지고기의 육즙과 밥의 조합이 환상이었다.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역시 먹는 게 최고야.
갇혀 있는 내게 먹방은 유일한 스트레스 분출구였다.
나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먹방 만세.
***
오늘의 후식은 사과. 언제나 사과밖에 없는 것처럼 느낀다면 맞다.
음식 재료야 희귀한 것들이어서 이걸로 입맛이 까다로운 왕자님을 괴롭힌다, 뭐 한다 핑계를 댈 수 있었지만, 과일은 달랐다.
아주 기본적인 것만 제공되었다.
평소 알버트가 과일을 잘 먹는 편이었기에 그랬던 것도 같다.
왕자님, 왕자님은 왜 과일을 잘 드셔서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과일도 싫어하시는 까다로운 인물이어도 괜찮았는데.
나는 먹고 싶은 과일을 떠올렸다.
아삭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담은 복숭아, 시원한 수박, 달콤한 망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냈는데 다시 배가 고픈 것 같다.
나는 도마 위에 올린 빨간 사과에 알버트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진짜 그린 건 아니고 생각만 했다.
상사님. 제가 피노키오였다면 제 코가 이미 이 탑을 뚫고도 남았을 거예요.
서걱서걱. 사과를 예쁘게 깎은 나는 그릇에 사과를 담았다.
그러고는 설거지하려 모아둔 그릇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양이가 드래곤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생각해 보니 드래곤은 본체가 커서 먹는 양도 엄청날 것 같았다.
하양이가 그만한 식욕을 자랑하며 그릇이나 남은 재료까지 다 먹어치우면 어쩌나 싶었는데, 내가 덜어준 그릇의 고기가 적당량이었던 모양이다.
고기를 먹은 하양이는 처음 부엌에 들어와 그랬던 것처럼 잠들었다. 원래 잠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잠든 하양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햇빛이 들지 않도록 창문에 커튼을 쳤다.
고요한 부엌에 누군가의 온기가 느껴진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일 줄 몰랐다.
역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