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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8화 (8/156)

8화.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씩씩하게 인사를 건네는 날 보며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빛을 교환했다.

나는 그들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뒤에 뭔가 두루뭉술한 게 보였다.

“어머, 그 뒤에 뭔가 꿈틀거리는 게 보이는 것 같은데? 그게 뭘까요?”

“넌 상관할 필요 없단다. 자, 여기 네가 부탁한 재료다.”

왼쪽에 서 있던 병사가 문 가까이로 가지고 온 자루들을 밀어주었다.

안에는 닭고기와 돼지고기, 해산물을 비롯해 밀가루 같은 생필품이 있었다.

이번에 치킨과 부침개를 해 먹을까 싶어 부탁한 재료였다.

이렇게 원하면 배달해 주는 서비스는 참 마음에 든다.

마치 쿠x 총알 배송을 연상케 하는 고객 만족 서비스!

이곳에서 느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편안함이다.

다른 자루에는 옷이 들어 있었는데, 나는 하녀 로제가 자신이 위치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하녀의 옷은 귀족의 드레스처럼 화려했고, 그에 비해 알버트의 옷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난 안다.

사람의 패션에 가장 중요한 건 얼굴이라는 사실을…! 아무렴 패완얼이라는 말도 있는데. 알버트가 뭘 입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입으면 무엇이든 빛나니까. 난 훌륭한 덕질을 이어가고 있었다.

“뒤에 뭐가 보이는데요?”

“이건 우리가 처리하마. 오는 길에 들러붙어 가지고.”

오른쪽에 서 있던 병사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뀨우,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 뒤에 있던 동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너무 귀여워.

파충류인 듯 보이는 동물은 정말 조그맸다.

내 무릎에도 닿지 않을 것 같은 크기였는데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것이 귀여움 그 자체였다.

두 다리로 걸으며 꼬리를 살랑이는 모습이 마치 내게 매력을 어필하는 것 같았다.

근데 뭔가 생각나게 생겼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에 보이는 파충류의 생김새가 자꾸만 무언가를 떠오르게 했다.

뭐지?

생각에 잠긴 나와 동물의 눈이 마주쳤다.

동물이 병사들 사이를 지나 쪼르르 기어갔다. 탑의 문 앞을 훌쩍 넘은 동물은 탑 안으로 쏙 들어왔다.

“…어?”

동물이 내가 좋은지 내 주위를 쫄래쫄래 돌았다.

꼬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이 동물의 정체를 깨달았다.

…드래곤이잖아?

드래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드래곤이 맞았다.

드래곤 X들이기에서 봤던 모습과 흡사했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던 것보다는 어른스러운 느낌이지만.

그런데 이 책 안에 드래곤이 나오던가?

판타지 세상이니 드래곤이 나오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은데, 이 책 내용 속에서 드래곤이 나올 만한 일이 있나 싶었다.

초반에 로스투라투 죽이고 나서 알버트와 차원 이동자 서이나의 꽁냥꽁냥 로맨스 아니었어?

끝까지 못 읽기는 했지만….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내 발치의 동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 동물이 드래곤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아저씨.”

“응?”

오른쪽 병사가 내 말에 반응했다.

나는 아직 내 주위를 뱅뱅 맴돌고 있는 드래곤을 가리켰다.

“이게 뭐로 보이세요?”

“검은 고양이잖어.”

예? 제 눈에 보이는 건 하얀색 드래곤인데요?

오른쪽에 있는 아저씨 이름은 밥이었다. 나는 왼쪽에 서 있는 존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도 검은 고양이가 보이세요?”

“그런디. 검은 고양이 별로 안 좋아혀? 좀 특이하긴 허네. 거기 들어갈 수 있는 걸 보면.”

“고양이가 영물이라는 소문도 돌더니, 그런가 보아.”

존과 밥 아저씨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수긍을 마쳤다.

뭐야, 내 눈에만 드래곤으로 보이는 거야?

내가 뭐라고? 이것도 빙의자 버프인 건가?

“싫으면 이쪽으로 다시 내보내도 되어. 우리가 데리고 갈게.”

존 아저씨는 내 미묘한 얼굴을 보고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드래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응시했다.

드래곤이면 최고 아닌가…?

드래곤은 언제나 최강의 동물로 묘사되지 않나. 힘도 세고 전지전능한 능력도 가진 동물.

그런 동물을 잘 키우면 나중에 고맙다고 선물이라도 주지 않을까? 아니면 능력?

지금 나는 책에 빙의했지만 버프 따위 없는 엑스트라 1이다.

하지만 드래곤이 붙는다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리고 지금 내보냈다가 드래곤의 미움을 사면 어떡해. 평범하고 안전한 삶에서 또다시 멀어지고 만다고.

안 그래도 반려동물을 들이려고 하긴 했고….

드래곤이 날 좋아하는 것 아닐까?

드래곤을 타고 다니는 능력 있는 엑스트라. 난 꽤 마음에 드는데-난 이 상상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제가 한번 키워볼게요. 이번 주도 감사했어요.”

그들이 드래곤을 데려갈까 무서워진 나는 얼른 웃으며 문을 닫았다.

조용한 부엌에 나와 드래곤만 남았다.

알버트가 내려올 수 없는 공간이니 드래곤과 이야기하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자그마한 드래곤은 도마를 올려놓는 곳 위에 훌쩍 올라갔다. 마치 고양이처럼 가볍고도 날쌘 움직임이었다.

드래곤이 나를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너무 귀여워 심쿵사 할 뻔.

“안녕하세요, 드래곤… 씨, 아니. 드래곤 님?”

드래곤은 보통 오래 산다던데 나이가 어떻게 되려나.

내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뻘은 가볍게 넘을 것 같은데.

내 말에 드래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 말은 못 하시나요?”

보통 드래곤들은 사람 말 다 하던데?

맨날 소통하고 그러던데?

“드래곤 님. 저는 정인… 아니, 로제라고 하는데요.”

그때, 소리가 울렸다.

“내 모습이 보여?”

목소리는 청량했다. 하지만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

나는 눈앞에 나를 응시하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지금 얘가 말한 건가?

“넌 마법사도 아닌데 내 모습이 보여?”

“지금 말하는 게 드래곤 님 맞으신가요?”

내 말에 드래곤이 입을 뻐끔거렸다.

“응. 맞는데.”

“마법사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초면에 반말밖에 하지 않는 드래곤의 비위도 잘 맞추는 나는 성실한 회사원. 거한 현타가 한 번 밀려왔다.

내가 고개를 내젓자 드래곤이 고개를 갸우뚱 움직였다.

“그런데 드래곤은 계약 같은 거 안 하나요? 막 힘도 쓸 수 있고 전지전능해지고 그런가요?”

그런 거면 나 계약에 대해 더 듣고 싶은데요! 권력자가 되면 삶이 얼마나 윤택해지는데!

을이 아닌 갑이 되는 삶. 그거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 드래곤이라 부르지 마. 드래곤 아니야아아….”

“…네?”

아니, 드래곤 양반. 그건 또 무슨 말이요. 당신은 누가 봐도 드래곤인데 무슨 말이오. 그리고 이 아기 같은 귀여운 말투와 목소리는 뭐지? 고뇌에 빠진 나는 신중히 물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이름 있으신가요?”

“네 마음대로 불러어. 이름 없는데에…?”

“…….”

내가 더 질문을 던지려던 순간, 드래곤은 부엌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여기 따듯하다. 마력도 많아서 기분이 좋아아….”

“이 탑 자체가 마력 덩어리긴 한데… 어, 근데 주무시는 거예요? 지금? 이야기 나누다 말고?”

“피곤해애애….”

목소리가 점점 늘어지더니 드래곤은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

눈을 감고 잠든 드래곤의 꼬리가 추욱 늘어졌다.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잠든 모습은 정말 아까 전 아저씨들이 말했던 고양이에 가까웠다.

난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알고 있던 드래곤에 대한 환상을 깨트렸다.

“저기요?”

소리 내어 불러봤지만 내가 아무리 불러봤자 드래곤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드래곤이 아니라 하는데 드래곤이라 부르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한데….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사실 고양이인데 나한테만 환상이 보이는 건 아닐까?

그런데 자기가 어떻게 보이느냐 묻기도 했잖아.

이럴 때는 알버트의 도움이 절실했다.

박학다식한 왕자님이니 뭐든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알버트는 내게 알 수 없는 신뢰감을 주었다.

“부엌이니 알버트를 데리고 올 수도 없고.”

우선 재료 정리와 아침 준비를 해야 했다. 아침 해가 밝아오면서 부엌의 작은 창 안으로 햇살이 가득 비쳤다.

나는 우선 하양이-드래곤이 아니라니 우선은 하양이라고 명칭을 바꾸기로 했다- 위에 작은 담요를 덮어준 뒤 재료 정리를 시작했다.

신선한 야채는 야채끼리 정리했다. 위로 가지고 올라가야 하는 옷들은 한쪽에 놓아두었다.

고기 같은 건 마법으로 작동되고 있는 냉장, 냉동고 안에 넣었다.

“역시 아침은 고기지.”

아침에 치킨도 좋지만 우선 만드는 내가 너무 피곤하므로 치킨은 기각. 사람들이 괜히 치킨을 시켜 먹는 게 아니다.

나는 두툼한 돼지고기를 꺼내 슬슬 잘랐다. 비계와 살코기가 적당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생은 인맥이야.

예전보다 고기 퀄리티가 확실히 좋아졌다. 모두 밥과 존 아저씨 덕이다.

얇게 썬 고기를 볼 안에 넣은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꺼냈다. 저번에 다져놓은 마늘도 함께였다.

오늘 아침은 제육볶음에 쌀밥이었다.

철저히 내가 먹고 싶은 것 위주의 식단이었지만 난 여전히 아쉬웠다.

심신이 지쳤을 때는 자고로 맛있는 밥을 먹는 게 최고다.

나는 어제 자기 전 불려놓은 쌀을 안치고 양념에 돼지고기를 조물조물 버무렸다. 파도 송송 썰었다.

“김치찌개가 있으면 좋은데….”

큼지막한 돼지고기를 넣은 묵은지 김치찌개는 또 얼마나 맛있게요?

문제는 내가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는 거다.

겉절이와 배추김치는 다르다고. 그림의 떡. 김치가 그림의 떡이라니 너무 슬퍼.

눈물을 머금은 나는 팬에 돼지고기를 올렸다.

잠시만. 서이나는 알 것 같은데…?

나는 원작 속 여주인공 서이나를 떠올렸다.

서이나의 본업이자 취미는 요리였다.

손맛도 좋았고 그녀가 섭렵한 세상의 요리는 실로 엄청났다. 요리가 삶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서이나라면 이곳에서도 훌륭한 한식 요리를 할 수 있을 텐데.

원작에서 서이나가 등장했던 시점이 어디였는지 가늠해 보던 나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원작의 타임라인으로 생각하면 이제 여덟 달 정도 남은 것이다.

나는 탑에서 나간 이후의 생활을 잠시 상상했다.

내 소유의 건물에서 세를 받으며 식도락 여행을 다니는 내 모습….

가끔씩 원작 여주인공이자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서이나와 이야기하며 참된 우정을 쌓는 바람직한 모습.

최고의 요리사 서이나가 해주는 김치찌개를 먹으며 즐기는 건물주의 삶!

서이나 님. 제가 돈도 두둑이 챙겨드릴 수 있어요.

“맛있는 냄새 나.”

깜짝이야.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옆에 하양이가 올라온 것을 깨달았다.

제육볶음 냄새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지글지글 끓는 것이 거의 다 끝나긴 했다.

“따로 드릴게요. 좀 기다리세요.”

킁킁. 하양이는 제육볶음 냄새를 맡았다.

나는 하양이가 알버트와 내 아침을 다 먹어버릴까 두려워 얼른 접시에 제육볶음을 옮겨 담았다.

뜸을 들인 밥도 때마침 완성됐기에 뽀얀 쌀밥도 그릇 안에 같이 담았다.

제육볶음 덮밥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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