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잠시 심호흡을 한 나는 침실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계단을 짚고 총총 내려온 나는 책을 보고 있던 알버트와 마주쳤다.
모노클을 쓴 채 독서에 집중하던 그가 나를 응시했다.
“뭐지, 로제?”
“바느질 좀 하려고요.”
나는 웃으며 그의 침실 옆쪽에 있는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는데.”
“괜찮… 아요.”
생글 웃으려던 나는 갑자기 밀려온 통증에 배를 움켜쥐었다. 아, 진짜 아파.
“배가 아픈 것 같은데.”
“…걸렸으니 인정하겠습니다. 왕자님, 아까 전에 먹은 게 잘못됐나 봐요. 아파요.”
“급하게 먹긴 하더구나. 뭘 하려던 거지, 한데? 바구니는 왜 가져가는 거고.”
“손… 좀 따려고요. 왕자님, 저 이거 끝난 후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슬 사다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버트는 내 말이 이해 가지 않는지 턱을 괴며 되물었다.
“손을 딴… 다고?”
“우선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래.”
알버트가 손을 딴다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긴 했는데, 지금은 그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나 죽네, 죽어. 어쨌든 들킨 거 아픈 건 숨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앓는 소리를 하며 바늘을 꺼냈다. 옷을 꿰맬 때 쓸 수 있는 바늘이었다.
음, 이게 좋겠다.
소독은 필수지. 나는 알버트가 침대 옆에 켜두었던 불에 바늘을 그을렸다.
알버트는 아무 말 없이 내가 뭘 하는지 살피고 있었다.
하긴, 이 시대에 손 따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어.
“왕자님도 나중에 속 안 좋으시면 똑같이 하셔도 돼요. 이게 효과 직방이라서 아주 좋아요.”
“너 대체 바늘 가지고 뭘 하려는….”
나는 손가락을 펼쳐 바늘로 끝부분을 찔렀다.
순간 찌릿하는 아픔과 함께 검은색 피가 송골송골 흘러나왔다.
와, 나 진짜 많이 체했나 봐.
내 뒤에 서 있던 알버트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알버트는 내 몸을 감싸 안으며 손에 들고 있던 바늘을 쳐냈다.
그가 나를 백허그 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알버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제, 뭐 하는 짓이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싸늘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알버트가 나를 감싸고 있는데 소름이 쭈뼛 돋았다.
“소, 손 땄는데요…. 속이 안 좋아서….”
“바늘로 네 손가락을 찌르는 게 ‘따는’ 거라고?”
알버트가 내 손목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그의 시선이 내 검지로 향했다.
내 검지 끝에서는 피가 방울방울 솟아오르고 있었다.
움켜쥔 손목보다도 날 당황하게 한 건 싸늘한 목소리였다.
마치 내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추궁하는 모습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네, 민간요법인데….”
“뭔가 더 하려던 건 아니고?”
“제가 뭘 더 하겠어요. 왕자님, 제 목숨은 소중하거든요?”
알버트의 어투가 날 몰아가는 것 같아 억울했다.
내 말에 알버트가 뒤에서 일어서더니 내 앞으로 왔다. 내 손목은 여전히 잡은 채였다.
내 앞에 앉은 알버트가 또렷한 목소리로 명했다.
“날 보거라, 로제.”
괜히 왕이 될 사람은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동안 보여줬던 모습이 그의 단면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휘어잡을 줄 알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를 봐.”
더 이상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난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온화한 편이라 생각했던 얼굴이 빙하처럼 차갑다. 냉한 얼굴은 그가 아무리 미남이라 해도 도망치고 싶을 만큼 무서웠다.
붉은 눈동자가 아름답기보다 섬뜩했다.
살벌한 시선에 나는 그가 사람을 죽일 줄 아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로스투라투를 비롯해 그의 측근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았던 사람.
그게 정당화될 수 있는 살인이라고 해도, 현대적인 시선으로 쉬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을 평생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더.
“거짓말은 아니구나.”
알버트의 목소리가 진득하게 내 귓가를 기어갔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대꾸했다. 사실 손이 좀 떨리긴 했다.
“아, 아니라니까요.”
목소리도 더듬었다. 이 정도면 알버트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법도 했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알버트가 질문을 던졌다.
“로제, 내가 무섭니?”
대놓고 무섭다고 하고 싶지는 않은데 대답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확실히 놀라서 변명이 제대로 안 나왔다.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평소처럼 행동하기 어려운 법이다.
“사,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왕자님. 전 이해해요.”
내가 한 말은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무서운 거구나.”
내가 그를 무서워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덜덜 떨다 대꾸했다.
“왕자님은 이미 답을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네 입에서 정확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거든. 이럴 때야말로 네가 평소 잘하던 말을 써먹을 기회란다.”
내가 평소에 잘하는 건 아부다. 그제야 나는 왜 알버트가 다시 내게 질문을 던졌는지 깨달았다.
그는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가 그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내 심중을 알고 있으면서 굳이 거짓말을 듣고 싶은 이유는 무얼까?
“로제.”
그가 재촉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안 무서워요. 왕자님은 잘생기셨잖아요. 미남이면 괜찮아.”
속내는 내뱉은 말과 달랐지만 확실히 말하고 나니 그가 덜 무서운 것 같긴 했다.
아니, 아까 전과 비교해 알버트의 분위기가 풀어진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인가?
“고맙구나, 로제.”
내 말대로 해주어서.
말하지 않아도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내린 알버트는 내 손가락을 보았다. 피가 계속 나고 있었다.
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피는 괜찮아요. 금방 멈….”
“내가 도와주마.”
알버트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내 몸이 자연스레 앞으로 쏠렸고 난 알버트의 품 안에 안겼다.
그의 품은 넓고 따스했다. 방금 전까지 냉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난 그의 가슴께에 손을 얹고 그를 슬쩍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려 했다.
“하하, 균형을 잃어서 그만. 죄송합니다.”
“피가 흐르니 멈춰야겠지.”
“천 같은 거 대고 있으면 될 것 같아요.”
알버트가 내 손가락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손끝에 모든 신경이 쏠린 것처럼 홧홧했다.
“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었다.
알버트를 밀어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나는 멍하니 내 손가락을 물고 있는 알버트를 응시했다.
알버트가 고개를 앞으로 숙이자 주위로 회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내 어깨에 닿았다.
가까웠다. 그의 속눈썹까지 찬찬히 살펴볼 수 있을 정도였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찬찬히 올라갔다. 그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피가 멎었구나.”
알버트가 눈매를 접으며 야살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순간 넋을 놓은 채 바라보았다.
진짜 이 남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람 홀리는 게 특기인 게 분명했다.
***
속은 괜찮아졌는데 다른 의미로 잠이 안 왔다. 잠자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내가 이렇게 된 이유는 정말 큰 고민이 있어서였다.
대체 이 왕자님 무슨 생각이야…?
탑 안에 있는 거 힘내라면서 입술하고 이마에 키스를 해주지 않나, 피 난다고 손가락을 빨아주지 않나.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 행동들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하지만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게, 평소에는 행동에 별다를 바가 없다.
나하고 있는 시간이라고는 밥 먹을 때하고 내가 다락에 있지 않는 시간뿐이다.
대화라고 할 만한 것도 내 일방적인 주접에 가깝고 알버트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책 속의 로제는 이런 것보다 더한 걸 받았겠지만 난 이걸 요구한 적 없었다.
어차피 헤어질 사이에 너무 가까워지는 것은 좋지 않다. 장기적으로 보면 불필요한 접촉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
어제 알버트의 살벌한 시선을 받으며 난 깨달았다. 역시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야 해.
내 생에 남자란 조신한 평민 미남뿐이다.
귀족도 나쁘지 않긴 한데… 어쨌든 내가 다 먹여 살릴 테니 잘생기고 착한 것만 해줘.
그나저나 대체 알버트가 왜 그럴까?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면?
책 속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책 속의 흐름은 벗어날 수 없어, 같은 클리셰? 로제한테 했던 걸 내게 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 알버트는 읽기 힘들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나는 결론을 내렸다.
배고프니 밥이나 먹자.
알버트가 나한테 뭘 말한 것도 아니고 혼자서 머리 싸매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 밥이나 먹는 게 이득이었다.
나답지 않게 너무 오랜 시간 고민하고 있었다.
알버트가 날 좋아한다 해서 뭐가 달라지나? 내가 안 좋아하는데.
차라리 이런 상황에서는 감정을 모른 체하는 게 낫다.
서로 이어지지 않을 감정이라면 눈치 없는 척하는 게 훨씬 현명한 법이다.
고민하다 보니 밤을 새웠다.
전날 푹 자서 졸리지는 않은데 배꼽시계가 울렸다.
현재 시각은 7시 50분.
슬슬 병사들이 나에게 먹거리와 필수품을 조달해 줄 시간이 되었다.
탑의 문이 유일하게 열리는 순간이다. 작은 창으로 모든 재료를 조달하는 건 어려우니까.
물론 난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로제의 변심을 우려한 로스투라투 왕이 그녀에게도 마법을 걸어두었다.
“그래, 반려동물에 대해서도 물어봐야지.”
잘생긴 알버트는 눈 호강하기 좋지만, 내 삶의 질도 그만큼 중요했다.
나는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알버트는 땀을 흘리며 운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열어둔 창문 사이로 바람이 솔솔 불었다.
웃옷을 벗은 채 운동에 몰두하던 알버트가 목에 걸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가 날 응시했다.
“병사들이 오는 날이던가.”
“네.”
내가 간결하게 말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운동을 시작할 법도 한데 알버트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할까 기다리는 것처럼.
내가 웃는 거 하나는 잘한다. 그리고 알버트가 무슨 말을 기다리는지도 알 것 같다.
“왕자님은 오늘도 잘생기셨네요.”
난 윙크를 날리며 주접을 떨었다. 좋아, 완벽했어.
알버트가 피식 웃었다. 웃는 모습을 보니 어제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깔끔하게 대화를 끝낸 나는 부엌으로 가기 위해 내려갔다.
확실히 알버트의 현실감 없는 얼굴도 오래 보니 적응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외모에 너무 익숙해져 다른 사람들이 오징어로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나도 평범한 외모인데, 괜히 눈만 높아지면 어떡하지?
나는 실없는 고민에 빠진 채로 문 가까이 다가갔다.
창문 사이로 병사 두 명이 보였다. 서로 실랑이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 따라온 거잖어!”
“아냐, 너잖어! 아까 소시지는 왜 줘가지고….”
뭐가 따라왔다는 거지? 귀가 번쩍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