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치킨이라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아름다운 음식이 있답니다.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보셨어요?”
“네가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닌데.”
“하지만 치느님은 누가 만들어도 맛있거든요? 네? 네? 왕자니이이임.”
얼굴에 철판을 깐 나는 꿋꿋이 그의 손을 흔들었다.
반려동물 앞에 자존심이 어디 있겠어. 고양이 앞에서 나는 충실한 집사! 반려동물 최고!
알버트는 그런 내가 신기한 듯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손부터 놓아주겠니?”
“바로 놓았습니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어, 진짜요?”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애가 있다면 말이지.”
알버트가 빙그레 웃었다.
…뭔가 속은 듯한 기분이 들지만 착각이겠지.
“허락하신 걸로 알게요…? 그럼 전 점심 준비하러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러려무나.”
내 말에 알버트는 무심히 대꾸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꼬르륵. 배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머리를 너무 오래 써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맛있는 점심을 먹을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다.
***
오늘 메뉴는 이곳에서 갇혀 있으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단번에 날려 버릴 매운 떡볶이!
한국인은 고춧가루! 고춧가루 하면 한국인! 역시 둘은 빼놓을 수 없다.
부엌에는 바깥의 수도와 연결되는 꼭지가 있어서 물을 언제든 받아 쓸 수 있었다.
로스투라투가 탑을 만드는 데 꽤 머리를 쓴 것은 맞다.
그는 알버트가 탑 안에서 정신적으로 더 고통받기를 원했다.
알버트는 고생을 하며 자랐고, 따라서 육체적 고통에는 다소 무딘 편이었기 때문이다.
로스투라투는 알버트가 정신적 고통이 아닌 다른 문제로 죽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탑 안에 생존에 필요한 시스템은 다 만들어두었다.
로제가 이런 걸 만들어달라고 하기도 했다. 로제는 알버트에게 집착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잘 모시고 싶어 했다.
그것 하나는 로제에게 감사했다. 알버트를 모시는 데 필요한 것은 거의 다 갖추어져 있었으니까.
쏴아아.
수도꼭지를 돌리자 깨끗한 물이 나왔다.
나는 냄비 안에 물을 적당히 담고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풀었다. 투명했던 물이 빨개졌다.
나는 한쪽에 쌓아둔 재료를 주섬주섬 꺼냈다. 떡, 야채, 그리고 어묵까지. 재료만 준비한 건데 벌써 군침이 돌았다.
작가님, 이런 말도 안 되는 세계에 빙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중세시대였으면 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거예요. 역시 로판이라면 작가님만의 설정을 섞어야 제맛이죠!
“좋아, 시작해 볼까.”
간단히 스트레칭을 마친 나는 떡볶이를 마저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 불 위에 냄비를 올렸다.
떡볶이 국물이 걸쭉해지길 기다리며 나는 야채를 썰었다.
파도 넣고 양배추도 넣고. 라면이나 당면이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 떡볶이가 어디냐.
반신반의하며 병사에게 부탁한 재료는 다행히 하나도 빠짐없이 배달되었다.
병사들과 꽤 친해진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탑의 보초를 서는 이들에게 간식을 건네주면서 짧은 이야기를 나눈 나는 그들이 한 가정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관계가 발전하기(?) 전까지는 사회생활로 다져진 내 연기력이 한몫했다.
외모는 아름답지만 까다롭기 그지없는 왕자님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자 왕의 압박 속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충분히 어필했다.
그들은 소문 나쁜 왕자와 단둘이 갇힌 나를 안쓰럽게 생각했다.
이 모든 건 하녀 로제가 고자 왕과 계약한 사실이 대외적 비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나와 병사들은 서로 말도 놓고 이름도 아는 사이였다. 친근하게 안부를 물을 정도도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몇 분 보는 것치고는 엄청난 결과라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상사의 압박 속에서 꿋꿋이 살아남는 한국인이라 할 수 있지.
보글보글. 국물이 끓기 시작했다.
“오, 끓는다.”
나는 송송 썬 야채와 네모난 어묵을 냄비 안에 넣었다.
쑹덩쑹덩 빠지는 모습이 흡사 다이빙 선수를 보는 것 같았다.
“떡볶이에는 계란이지.”
나는 오늘도 알버트를 위… 아니, 나를 위해 계란을 삶았다. 자작하게 졸인 국물에 계란을 찍어 먹으면 그게 또 얼마나 환상적인데.
으음,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알버트가 이걸 과연 잘 먹을까? 매워할까?
나는 그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렸다.
“매워하는 거 한번 보고 싶긴 한데.”
소소한 복수도 할 겸, 그의 배탈을 빌어보았다.
나는 잘생겼지만 얄미운 알버트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추장을 더 넣었다. 팍팍, 맵게. 더 맵게!
중간에 맛을 보았을 때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이 맛이야. 마치 X닭볶음면의 양념을 넣은 것 같은 중독성 있는 매운맛.
요리가 끝났다.
솔솔 김이 나는 떡볶이를 그릇에 옮겨 담은 나는 알버트와 내 그릇에 계란을 하나씩 넣었다.
트레이 위에 떡볶이를 담고 계단을 콩콩 올라갔다.
“왕자님, 준비 다 되었습니다~”
내가 방 안에 들어서자 알버트는 익숙하게 내 손에 들린 트레이를 가져갔다.
알버트의 시선이 자연스레 떡볶이를 향했고 이내 침묵했다.
아니,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이건 뭐지?”
“감자국도 드셨으면서 이게 이상하세요? 이건 매운 떡볶이랍니다.”
알버트가 책상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나는 얼른 의자에 앉았다.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날 독살하려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런 무서운 말을! 왕자님, 이건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데요.”
하지만 알버트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나야 좋다. 떡볶이를 독차지할 수 있으니까.
“…먼저 먹으려무나.”
알버트는 내가 이 음식을 대체 왜 가져왔는지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냄새부터 확 맵긴 하지.
“기꺼이 먼저 먹겠습니다.”
빨간 양념에 푹 끓인 야채와 떡, 그리고 어묵 중에 뭘 먼저 먹을까 고민하던 나는 떡을 찍어 입안에 넣었다.
말랑하면서도 쫀득한 떡이 매콤한 양념과 함께 씹혔다.
“와… 맛있어.”
오랜만에 먹어서 더 맛있는 것 같아. 후, 하. 후, 하. 맵다.
나는 떡을 하나 더 먹으며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행복했다.
알버트가 나를 귀신 보듯 쳐다보았다. 나는 헛기침을 한 후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거 아세요, 왕자님? 매운 걸 먹으면 속이 풀려요.”
“처음 들어보는 속설인데.”
“저 믿고 한번 드셔보세요.”
가히 약장수를 연상케 하는 말투이긴 했는데, 난 당당했다.
나는 포크로 떡을 꾹 찍어 알버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
“배 안 고프세요? 아침도 가볍게 드셨으면서.”
주저하던 알버트의 손이 내 손 위에 얹혔다. 그가 거의 넘어왔다!
“저 한 번만 믿고 드셔보세요.”
알버트가 결국 떡을 베어 물었다. 양념이 가득 묻은 쫀득한 떡이 그의 입안에 들어갔다!
떡을 씹을수록 내키지 않아 보이던 알버트의 얼굴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어떻게 알았냐고? 올라간 입꼬리 때문이다.
떡을 꿀떡 넘긴 알버트가 후 숨을 내쉬었다.
“맵구나.”
“이렇게 매운 거 먹으면서 땀 한번 쫙 빼면 확실히 기분이 좋아진다니까요? 그리고 마음에 드셨구나?”
내 말에 알버트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또 내 입꼬리가 올라가더냐?”
“당연하지요. 이게 또 왕자님, 계란에 양념을 묻혀 먹으면 맛있어요.”
나는 포크로 계란을 반으로 쪼갠 후 떡볶이 양념을 골고루 묻혔다. 그러고 콕, 내 입안에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맛이 환상이었다.
나는 눈을 감으며 떡볶이 맛을 음미했다. 지금은 내 떡볶이가 엽X떡볶이, 신X떡볶이 못지않다 자부할 수 있었다.
나는 어묵과 떡을 같이 찍어 먹었다. 송송 썰어 넣은 야채는 아삭하게 씹혀 맛있었다.
“와… 행복해.”
탑 안에서 한 식사 중 오늘이 가장 완벽했다.
“행복이라.”
놀란 눈동자가 깜빡인다. 뜻밖이라는 것처럼.
“널 행복하게 하기는 참 쉽구나, 로제.”
“먹기 위해 산다는 말도 있잖아요. 행복에 단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즐거우면 그게 행복이지요.”
“단순명료하군.”
“매일 우울한 것보다는 행복한 게 좋으니까,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거예요.”
내 말에 그는 웃었다.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내 말을 부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행복이 그렇게 쉬운 것인 줄 몰랐어.”
스치듯 말한 그의 눈은 찰나의 쓸쓸함을 담고 있었다.
알버트가 웃더니 떡볶이를 입안에 넣었다.
흘끔 보니 맵기는 한데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숨기는 것이 더 익숙한 사람처럼.
중간중간 쉬면서 먹는 걸 보면 입안이 불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트레이 위에 두었던 우유 잔을 슬쩍 내밀었다.
“…뭐지?”
“매울 때는 우유 드시면 하나도 안 매워요.”
“지금도 티가 나는가 보구나.”
“아뇨. 왕자님 표정 읽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아요. 한번 예상해 본 건데 맞았나요?”
내 말에 알버트는 대답 대신 우유 잔을 집어 들었다. 그가 우유 잔을 입에 댔다.
우유 마시는 모습까지 완벽한 당신은 진정한 챔피언….
그 뒤 나의 주접과 함께 식사가 계속되었다.
알버트는 우유와 함께 떡볶이를 클리어하는 데 성공했다. 나도 사실 그가 생각보다 잘 먹어서 놀란 참이었다.
“매운 거 먹고 기분은 좋아지셨어요?”
이 안에 갇혀 있느라고 그도 스트레스를 꽤 받을 텐데, 떡볶이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 마음에 물었다.
알버트의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너처럼 행복까지는 아니어도, 꽤 기분이 좋구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 알버트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순간 고양이가 된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인데.”
알버트의 눈동자가 생각에 잠긴 듯 가늘어졌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ASMR이라도 틀어놓은 것 같았다.
아직 내 머리를 매만지는 손가락은 미술품이라도 다루는 듯 조심스러웠다.
기분이 묘했다.
가끔 알버트가 이렇게 접촉을 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그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싶어진다.
마치 세이렌의 목소리를 들은 뱃사람처럼.
하지만 그는 내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사실도 안다.
그에게 이런 신체 접촉은 나를 이용하기 위한 수단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혼란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았다.
비즈니스 관계.
철저한 갑과 을.
“맛있게 드셔주시니 기쁘네요.”
난 환히 웃었다.
얼굴에 걸린 미소는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였다.
웃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
문제는 저녁때 일어났다.
“아, 장이 꼬였나….”
속이 살살 아팠다.
너무 오랜만에 매운 것을 먹어 속이 놀란 것 같았다.
로제의 몸으로 떡볶이를 먹는 건 처음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누워 있으면 나아지겠지 싶어서 다락방 내 잠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속은 괜찮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해졌다. 식은땀도 나기 시작했다.
웅크려 앉아 끙끙거리던 나는 결국 손을 따기로 했다.
“바늘이….”
바늘이 어디 있더라. 바느질을 할 수 있도록 반짇고리가 든 바구니가 있었는데….
다락방을 뒤지던 나는 한참 만에야 반짇고리가 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생활에 관련된 건 모두 아래층 침실에 있다 해도 무방했다.
밑에 내려가 알버트와 마주쳐야 한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