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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5화 (5/156)

5화.

잠시 후 알버트가 아무 말 없이 한 수저 더 떴다. 그제야 나는 안도했다.

“맛있으신가 보다, 그죠?”

“식사 시간에는 조용히 하자꾸나.”

“아이, 제가 자랑스러워서 그러죠. 왕자님 식성 맞추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내 말에 알버트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팔짱을 꼈다. 나를 보는 눈매가 곱게 휘었다.

하지만 그가 웃는 게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난 너무 잘 알고 있다. 주위 공기가 서늘해졌다.

내가 어색하게 웃자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내가 평소에 편식을 하던가.”

“편식은 안 하시는데 얼굴 표정에서 보이거든요.”

“내 표정이 읽히니, 로제?”

흥미롭다는 듯 나를 응시하는 알버트의 시선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를 돌릴 좋은 기회였다.

“왕자님께서는 만족스러운 음식을 드셨을 때 왼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신답니다.”

그리고 오늘 매콤한 감자국은 알버트의 식성을 만족시킨 모양이다.

“나도 몰랐던 사실이군.”

그가 피식 웃으며 한 수저 더 들었다. 이윽고 조용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원래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나는 맛있는 거 먹을 때가 탑 안에서 제일 행복했다. 알버트 얼굴 보면서 행복해하는 건 두 번째였다.

식사를 끝낸 후 나는 설거지를 했다. 알버트는 부엌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부엌에서 일어나는 모든 건 내 담당이었다.

후식으로 깎은 사과를 들고 온 나는 아삭한 사과를 한입 물었다.

알버트는 모노클을 낀 채 책상에 앉아 지팡이를 살폈다.

과연 여기서 나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

책 속에서야 로제의 신종 고문들 때문에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지만 지금은 다르다.

솔직히 말하면 빨리 나가고 싶다.

이곳 생활이 무료한 것은 사실이었다.

알버트는 이 시간을 자기 계발에 이용하고 있었지만 난 바깥에 나가 산책도 하고 사람들과 얘기도 하고 여행도 하고 싶다.

여기 인터넷이나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 그립다. 문명의 이기.

보이지 않는 휴대폰을 한 손에 잡는 상상을 하던 나는 다소 시무룩한 목소리로 알버트에게 물었다.

“왕자님, 그런데 여기는 언제 나가실 거예요?”

“나가는 건 별문제가 아니란다, 로제.”

“설마 푸신 거예요? 그 지팡이에 걸린 저주를?”

“거의 풀었다고 봐야겠지, 지팡이에 걸린 구속 마법과 탑의 문과의 상관관계 정도는.”

이 남자는 미쳤어. 나는 진지하게 그를 불렀다.

“왕자님.”

“그래.”

“솔직히 말해주세요, 사람이 아니라 신이시죠…?”

“…….”

“신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완벽할 수 없어!”

알버트 최고! 덕질 최고!

정말 좀 있으면 나갈 수 있는 건가!

들뜬 나는 엄지를 치켜들며 알버트를 칭찬했다.

알버트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고양이가 쥐의 아양을 보고 그래 어디 한번 날뛰어봐라, 하고 웃는 것 같았다.

나는 희망찬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나갈 수 있나요?”

“나가는 건 시간이 더 걸릴 거다.”

“네?! 어째서요?”

나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처절한 얼굴을 했다. 알버트는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나가보았자 왕에게 빌미를 주는 꼴밖에 되지 않아.”

“그럼 얼마나 걸릴까요?”

“적어도 서너 달은 걸리겠지.”

“…….”

…아, 그건 그랬다.

책 속에서도 알버트는 탑에서 자신의 힘을 모았다. 고자 왕을 몰아낼 수 있도록, 자신을 갈고닦고 인맥을 만들었다.

자신의 힘을 최대치로 끌어내 이 탑 안에서 바깥의 사람들과 연락을 한 것도 알버트였다.

“나는 이 탑이 내게 주어진 기회라 생각하기로 했단다.”

팔짱을 낀 알버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기회.”

나직하게 말한 알버트가 다시 지팡이로 시선을 돌렸다.

알버트가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기대감에 부풀었던 마음에서 실망감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알버트가 저주를 거의 풀었다는 걸 아니 더욱.

마치 신종 희망 고문 같다.

에이, 노후 보장받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참자. 참으면 복이 오리니.

나는 사과를 한입 더 먹었다. 사각 소리와 함께 알버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를 내린 채 자리에 쭈그려 앉아 있는 나와 책상에 반듯한 자세로 앉은 알버트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태생적인 오만함이 느껴졌다. 금방 시선을 돌릴 줄 알았건만 알버트는 나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이내 그가 입을 떼었다.

“평소 같지 않은 얼굴을 하는구나. 너답지 않게 실망이라도 한 것 같고.”

나를 바보로 보는 건가. 내가 발끈해서 말했다.

“답지 않게라뇨. 저도 사람이랍니다.”

후 숨을 내쉰 그가 모노클을 뺐다. 모노클이 마주 보는 시선에 방해라도 된다는 것처럼.

“넌 이곳이 싫으니, 로제.”

“싫다기보다는… 답답하고 우울하고… 제어하기 어려운 감정이 몰려들 때가 있어서요. 왕자님은 그렇지 않으신가요?”

“…글쎄. 내게는 상당히 익숙한 감정들이라서.”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다만 네가 힘들어하는 건 알겠구나.”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평소 티는 안 내더니 꽤 마음고생을 하는 모양이지.”

그게 바로 사회생활 짬밥이라는 겁니다, 왕자님. 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쭈그려 앉은 내 앞에 그가 무릎을 꿇은 채로 시선을 맞추었다.

“네가 그동안 잘해줬으니 나도 응당 상을 주어야겠지.”

“노후 보장에 땅이라도 더 주시는 건가요.”

내가 진지하게 묻자 그는 흠 소리를 내었다.

“그건 아니고.”

그의 손이 내 턱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그러쥐었다.

그러쥐었다?

어? 어?

이건 계약 위반이다! 계약 위반! 내 허락이 없었잖아!

머릿속에서 빨간불이 울려댔다.

하지만 솔직히 이 상황에서 그를 거부할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될까 싶었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말하거라.”

나는 안다. 알버트도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그게 얄미워서 물었다.

“…뭐라고 할지 알면서 물으시네요?”

하하. 알버트가 낮게 웃었다.

“간단한 거란다, 로제.”

나지막하게 말한 그가 가볍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가 뜨거웠다.

살짝 닿았다 떨어진 그의 입술은 다음으로 내 입술에 닿았다. 입술은 금방 떨어졌지만, 난 여전히 멍했다.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이 불에 덴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그가 나른하게 말했다.

“그동안 잘해왔지.”

“…….”

“앞으로 더 힘내보자꾸나.”

그가 눈매를 살짝 접으며 웃었다.

마치 나를 홀리려는 것처럼.

아니, ‘것처럼’이 아니다. 그는 나를 홀리려 한다.

감정은 계약서보다 완벽한 족쇄니까.

***

왕자님, 아니 상사와 키스를 했든 말든 시간은 계속 간다. 그동안 잠도 잘 잤다.

오늘은 일주일에 하루 있는 쉬는 날이어서 아침에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내가 얻어낸 휴일.

알버트의 오늘 아침은 미리 침대 옆에 가져다 두었던 빵과 계란이다. 난 늦잠을 사랑한다.

내가 일어난 건 점심때가 다 되어서였다.

잠을 너무 많이 자 부은 눈을 비비며 나는 다락에서 내려갔다.

오늘도 알버트는 우아하게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알버트는 이제 막 숍에서 나온 사람처럼 완벽했다. 그에 비해 나는 거지꼴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은 없다. 그러니 내 잠에서 덜 깬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문제없다.

나는 알버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냐는 듯이.

난 진지하게 말했다.

“왕자님은 오늘도 잘생기셨군요.”

매일 봐도 잘생겼어! 잘생긴 얼굴 최고…!

“너는 항상 똑같구나.”

“기분은 좋아지셨나요? 잘생겼다는 말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왕자님.”

“좋아졌다면?”

“제게 땅을 조금이라도 더 주시면…!”

그래도 사랑이 나를 밥 먹여주지는 않지!

왕자님께서 나를 밥 먹여주지는 않아!

하지만 돈은 남고 건물도 남아 내 인생을 풍족하게 해줄 수 있지!

난 속물적인 하녀다. 자본주의 만세.

“기각.”

“넵.”

포기는 깔끔하게 했다. 굳이 신경을 거슬러 내게 주어질 땅을 줄일 필요는 없잖아.

그 와중에 그의 입술이 눈에 들어오긴 했다.

알버트가 이마에, 입술에 하던 키스. 내 상사님은 생각보다 더 치밀한 인간이었다.

치사하게 미모를 무기로 쓰다니.

“똑똑하기는 또 엄청 똑똑하신 거 같고요.”

나갈 수 없다는 데 시무룩해졌던 마음은 어디 가고, 알버트만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 확실히 고단수였다.

한국 사람이었으면 아마 인기 아이돌이나 배우를 했을지도.

확실한 팬서비스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습은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티가 났다.

순간 설렜거든.

해서 고민이 하나 생겼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고립되어 있는 곳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서로에게 끌리는 건 시간문제일 수밖에 없다.

상대가 알버트처럼 잘생긴 사람이라면 효과는 배로 굉장해진다! 내가 순간 느꼈던 떨림처럼.

나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도 외로움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나는 알버트처럼 재수 없고 오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에게 대놓고 날 좋아하지 말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마음이 생각처럼 된다면 그게 마음이던가?

가벼운 버드키스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알버트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감상하며 접촉하는 건 내 생각보다 더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 알버트에게 설레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있었던 일은 그저 한때의 실수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탑에서 생활하며 그를 좋아할 기회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해서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왕자님, 밖에 나갈 수 없다는 것도 알겠고, 땅도 더 주지 않으시겠다는 거 알겠는데,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나만 고양이 없어! 라는 말도 있다.

고양이는 아니더라도 내가 챙기고 또 함께할 수 있는 친구 같은 동물이 생긴다면 나도 자연스레 외로움을 덜 타게 될 것이다.

“부탁?”

“저 반려동물이 키우고 싶어요.”

“반려동물이라….”

“강아지는 산책해야 하는데 밖에 못 나가니 어쩔 수 없고, 밖에 나가지 않아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고양이나… 햄스터? 같은 동물 키우고 싶어요.”

나도 지극정성으로 반려동물을 돌보고 아프면 치료하고… 그러다 보면 알버트는 생각도 나지 않겠지.

우선 동물의 의견도 물어봐야겠지만 지금 내가 생각해 낸 방법으로는 그게 최선이었다.

“빨리 나가게 해달라고 안 할게요. 네? 들어주세요.”

나는 슈O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애처로운 눈망울로 알버트를 바라보았다.

안쓰럽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한껏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떼를 쓰고 싶지는 않다.

로스투라투는 알버트에게 죽는 왕이지만 처음 알버트를 이곳에 가둔 장본인이었다. 얕볼 인물이 아니라는 거다.

성급하게 빨리 나갔다가 뒤틀린 책 내용 때문에 알버트의 반역이 잘못될 수도 있다.

알버트가 잘못되면 그를 모시던 나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노후를 위해서는 알버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다.

현왕에게 대항할 방법은 나보다 알버트가 잘 알 터였다.

그러니 나는 다른 방법을 찾는다!

나는 입꼬리를 축 내리며 불쌍한 얼굴을 했다.

“네에에?”

내 행동을 가만히 보던 알버트는 팔짱을 꼈다.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띤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을 들어주는 보호자 같았다.

“내가 동물을 들여올 수는 없단다, 로제.”

“허락만 해주시면 제가 들여올게요. 뭐 알레르기는 없으시고요? 그래도 같이 살고 있는데 왕자님한테 물어봐야 하잖아요.”

허락할 것 같은 낌새가 보이자 나는 알버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제가 그럼 마법의 음식 하나 나중에 해드릴게요.”

“…또 매운 걸 가져오려는 거구나.”

“아뇨, 오늘 매운 거 먹을 거긴 한데 그건 아니에요.”

매운 것도 좋지만, 내게는 비장의 음식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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