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회심의 개그가 먹히지 않은 것은 슬프지만 알버트가 어이없어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바였다.
결국 나는 노선을 바꿨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한 농담이었어요. 대가 있잖아요, 왕자님. 왕자님께서 제 노후를 보장해 주실 거니까요.”
트레이를 계속 들고 있었더니 팔이 뻐근했다. 나는 잠시 말을 끊으며 책상 위에 식사를 내려놓았다.
“왕자님, 그런데 여전히 오해하고 계신 것 같네요.”
‘아직 좋은 것 같다’는 말에 여러 의미가 숨어 있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오해가 쌓이면 고구마가 되는 법이다. 해명은 바로 해야겠다.
“왕자님, 전 왕자님을 우러러보고 동경할 뿐이에요. 칭찬은 왕자님 기분도 좋게 만들 수 있고, 왕자님 기분이 좋으면 저도 시중드는 것이 편하니 하는 거고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했다. 그리고 알버트는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외모였다. 나는 솔직해지는 것뿐이다.
내가 그를 덕질 할 때마다 내 행동들을 사랑이라 착각하면 곤란하다.
덕질과 사랑은 다르다. 이상과 현실이 다른 것처럼.
이건 명확히 해야 했다.
“제 행동 하나하나를 왕자님을 향한 비틀린 사랑이라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그때 키스하면서도 아셨을 거잖아요.”
“…….”
“제가 왕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서로 눈을 감지 않았던 키스.
그도 그 사실을 느꼈다는 걸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알버트가 나와 계약을 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알버트도 수긍하는지 딴지를 거는 대신 침묵했다.
내 행동과 말이 일치하는 건 사실이니 할 말이 없을 테다.
“그리고 설레발이긴 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뭐지?”
알버트가 자기애가 심하다고 할까 봐 말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건 정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요.”
알버트가 눈썹을 올렸다.
“무어지?”
책에 빙의한 나는 클리셰를 모두 꿰고 있었다. 나처럼 책 빙의한 사람에 대한 것도 전부.
원래 책에 빙의해서 원작을 바꾸면 주인공하고 엮이고, 서로 사랑에 빠지고 그러더라. 그게 뻔하지만 질리지 않는 클리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알버트와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다.
알버트는 탑에서 고통받던 때와 별개로 평범하지 않은 유년 시절을 겪었다.
그가 태어난 백작 가문은 고귀한 왕족의 피가 섞여 있었으나, 허울뿐인 명예만 남아 있던 쓰레기 가문이었다.
친척은 원래 없었지만 본래 위에 두 명의 형을 두고 자랐던 알버트가 혼자 남았던 건, 백작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퉜던 형제가 서로를 독살했기 때문이다.
알버트 또한 형들의 독살 시도에 죽다 살아났다.
겨우 여덟 살 때, 알버트는 피 섞인 형들의 암살 시도를 견뎌야 했다.
부모는 백작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암시장도 마다하지 않던 그들은 뒷골목에 유행하던 전염병에 걸려 죽어버렸다.
알버트는 비틀린 유년 시절을 보내고 로스투라투에게 입양되었다. 물론 로스투라투도 알버트에게 신경 쓴 적은 없었다.
불행한 유년 시절은 그의 트라우마였고, 그의 가치관과 성격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서이나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알버트의 사랑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을 잘 알았다.
나는 그와 다른 듯 비슷한 삶을 살았다.
갓 대학을 졸업했을 때 부모님은 동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살았다. 살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하면서도 혼자 많이 울었다.
겉으로는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해졌다.
슬픈 현실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책 속의 인물에 빙의해 버린 어이없는 사건도 바로 받아들인 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걸 좋아했던 이유는, 잠시 동안 현실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 나와 다르게 순탄한 삶을 산 사람에게 사랑받고 위로받고 싶다.
나와 다르게 삶에 구김살이 없는 사람에게서.
탑을 나가면 나는 내게 맞는 남자를 찾을 것이다.
내가 먹여 살릴 테니 몸만 오면 되는 남자. 아, 대신 얼굴, 성격, 몸은 다 좋아야 한다.
축약하자면 내 이상형은 알버트가 아니라는 소리다.
난 알버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왕자님이야말로 절 사랑하시면 안 돼요.”
“…내가?”
다소 어이없다는 듯 물은 알버트가 실소를 터트렸다. 하. 그게 오히려 날 안심시켰다.
“여긴 밀폐된 공간이고 우리는 단둘이잖아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원래 둘만 있으면 더 의지하게 되는 법이잖아요.”
“너야말로 조심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러면.”
왕자님. 저도 현대에서 잘생긴 사람들 꽤 봤답니다.
왕자님 정도는 아니어도 티브이에서, 책에서. 한데 그 사람들과 사랑에 빠진 적은 없거든요….
“넵, 저도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사랑에 빠지지 않으신다는 것으로 알아듣겠어요.”
나를 비스듬히 쳐다보던 알버트가 제 입술을 어루만졌다.
“너무 당연한 사실은 말하는 것이 아니야, 로제.”
“때로는 그런 말이 허를 찌르는 법이지요. 그러니 한번 소리 내어 말해주세요.”
소리 내어 말하면 나중에 자기도 잊어버리지는 않겠지.
이 대화가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누르던 알버트가 짧게 뱉었다.
“그래.”
알버트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강렬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나는 널 사랑하지 않을 거란다, 로제.”
낮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만족스러웠다.
“지팡이 살피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밥 드세요. 준비해 봤어요.”
식사를 준비했다는 말에 알버트가 책상에 앉았다. 나는 책상을 깔끔하게 닦고 수저를 내밀었다.
알버트가 국그릇과 숟가락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그에게 생소한 음식이긴 할 터였다.
“…이건 뭐지?”
“계란국이라고, 제가 좋아하는 국이라서 한번 준비해 봤어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이게 그렇게 인기랍니다. 왕자님의 건강을 생각하는 제 마음이 이 정도라는 거 알아주세요!”
거창한 설명을 늘어놓은 나는 민망한 마음에 헛기침을 했다.
빵과 함께 준비한 건 계란을 휘휘 저어 만드는 계란국.
로제의 머릿속에는 각종 요리의 레시피가 꽤 많았지만 난 한식을 더 선호했다.
사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늘 아침을 하는 게 너무 귀찮았다.
누구나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순간.
난 현대인의 귀차니즘을 이겨낼 수 없었다.
난 어쩔 수 없는 귀차니즘의 노예였다.
알버트가 계란국을 휘휘 젓더니 한술 떴다.
나는 알버트 앞에 앉아 계란국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도 되는 양 먹었다.
그리고 양심이 찔려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계란국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
알버트의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된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세 시간 동안 검술과 마력 운용을 연습한다.
검은 없고 이미지 트레이닝에 가깝지만 그는 그 시간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손가락만으로 몸을 지탱해 팔굽혀펴기를 하기도 하고, 물구나무서기를 하기도 한다.
어떻게든 몸을 땀에 흠뻑 젖게 만드는 것이 대단했다.
나는 보통 자정에 잠들어 8시쯤 깬다. 그 시간에 자는 게 익숙해져서 그렇다.
여기 컴퓨터나 휴대폰이 있었다면 더 늦게 잤을 테지만 슬프게도 여긴 탑 안이다.
남는 시간에는 보고서를 미리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내일 뭐 먹을까 고민도 하고, 알버트에게 조잘조잘 말을 걸기도 한다.
나와 알버트의 생활 패턴은 전혀 다르다. 회사 다닐 때 빼고 나는 일찍 일어난 적이 없다. 잠은 정말 중요하다.
물론 미남이 운동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일은 분명 힐링이 되어서, 가끔은 일찍 일어나 그를 구경하기도 한다.
보기 전에 알버트한테 허락을 받는다.
왕자님, 왕자님의 완벽한 몸을 감상하며 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도 되겠습니까, 라고.
그럼 알버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탑 안에서 내가 하는 운동이란 숨쉬기에 불과하니까.
평소 잠에서 깨면 다락방의 이불을 차곡차곡 개킨다. 다락에는 조그만 창이 있어 아침이면 햇빛이 들었다.
2층에 가면 세수를 하고 나오는 알버트와 마주친다.
내가 그에게 지팡이를 넘긴 이후 그는 화장실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부엌은 불가능했지만.
나는 알버트와 마주칠 때마다 싹싹하게 인사한다. 언젠가 그의 경계심이 풀어지길 바라면서.
“잘 주무셨나요, 잘생긴 왕자님!”
인사를 끝내고 나면 부엌으로 가서 아침 준비를 한다.
내가 음식을 이용해 왕자를 신종 고문한다는 소식을 전한 이후로 한식 식재료는 더 풍부해졌다.
보고서에 알버트가 음식을 먹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제대로 적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내 보고서 속의 알버트는 가상의 인물에 가까웠다.
식재료들을 열심히 주문한 김에 주메뉴를 한식으로 바꿨다. 갇혀 살면서 내가 원하는 음식이라도 먹고 싶었다.
밥은 내가 하니 알버트의 불평은 받지 않았다. 사실 알버트가 불평한 적이 없긴 했다.
으하암. 밀려오는 하품을 한 나는 국을 한 번 더 저었다.
오늘은 감자를 이용한 매콤 감자국에 쌀밥과 계란후라이, 그리고 배추겉절이였다.
감자국에서 김이 폴폴 났다. 간을 보니 적당히 딱 맞았다.
뜸을 들이던 냄비 뚜껑을 연 나는 안의 뽀얀 쌀밥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알버트 밥은 많이. 나는 적당히.
그러고는 다른 그릇을 꺼내 계란후라이를 옮겨 담았다. 알버트는 두 개, 나는 한 개.
아차, 잊을 뻔했네.
나는 보글보글 끓는 냄비 뚜껑을 열어 안에 있는 삶은 계란을 옮겨 담았다.
알버트는 운동을 많이 하니 단백질을 잘 챙겨야 한다.
내가 다이어트 식단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단백질 하면 또 삶은 계란이 최고랬다.
나는 삶은 계란 여섯 개를 그릇에 옮겨 담았다.
아침 준비가 끝났다.
“왕자님, 아침이에요!”
트레이를 든 나는 계단을 오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방에 가까워지자 손이 가벼워졌다.
“로제 네가 들기엔 너무 무거워 보이는구나. 일부러 이렇게 온 걸 테지.”
“들켰군요, 왕자님. 상냥한 왕자님이라면 받아주실 거라 믿었어요.”
헤헤 웃은 나는 트레이를 들어 옮기는 알버트의 뒤를 쫄래쫄래 따랐다.
그가 트레이를 내려놓자 나는 책상 위에 그릇을 하나씩 놓았다.
문 바로 옆에 있는 책상은 평소 그의 공부용으로 쓰다가 밥 먹을 때는 위를 치워 식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자신 앞에 놓인 그릇을 차례대로 살피던 알버트가 턱을 괴었다.
“네가 신종 고문이라 말하며 식재료를 가지고 왔던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구나.”
“…신종 고문이라 보기엔 제가 너무 잘 먹지 않나요?”
침묵하던 알버트가 물었다.
“진지하게 물으마, 로제. 네 눈앞에 달걀이 몇 개니.”
“여덟 개요.”
“내가 닭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쌀밥에 올려 먹을 계란 두 개와 오늘 아침 운동하신 왕자님의 근육을 위하여 단백질 보충용 삶은 계란 여섯 개. 누가 봐도 많은 양은 아닙니다.”
당당히 말했지만 아주 조금 찔렸다.
나는 얼른 쌀밥을 한 수저 펐다. 음, 맛있어. 고춧가루를 뿌려 칼칼한 감자국까지 한 수저 뜨니 살 것 같았다.
역시 한국인은 매운 걸 먹고 살아야 해.
“드세요, 왕자님. 매운 것도 괜찮으시다 해서 오늘은 매운 것으로 준비했어요.”
“넌 비정상적일 정도로 매운 걸 좋아하는구나.”
“사람의 취향은 모두 다른 법이죠. 그래도 오늘 회심의 감자국이에요. 맛있어요.”
알버트가 감자국을 한 수저 떴다.
나는 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심사위원 앞에 선 요리사가 이런 기분일까?
그가 감자국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