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나는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왕자님의 아름다우신 모습에 정신이 나가서요.”
다른 사람한테 이런 이유를 들이밀면 말도 안 된다 하겠지만, 상대는 알버트였다.
그의 미모에 홀렸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지라 그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
“없던 정신이 반나절하고 하루 만에 생기다니, 놀라운 일이구나.”
알버트가 신랄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히스테리 정도야 계약을 위해서라면 자애로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를 들었다 놨다 하던 같잖은 하녀가 갑자기 계약서를 들이미는 게 좋아 보일 리 없다.
겨우 하녀 따위에게 좌지우지되고 있는 상황에 알버트가 분노할 만도 했다.
나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제정신 탑재했으니 걱정 마세요.”
“제정신이라….”
지금이 더 미친 것 같은가…?
나는 그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한 채 헤헤 웃었다. 원래 곤란할 때는 웃는 게 최고랬다.
내게 물어보았자 더 이상 소득이 없을 거라는 걸 깨달은 건지, 한숨을 내쉰 알버트가 고개를 비스듬히 올렸다.
“여기서 내 마법을 쓰는 건 불가능하단다. 지팡이를 좀 더 살펴봐야겠지.”
“그럼 계약서 이행은 양심에 달린 건가요?”
내 양심은 말짱한데.
“내가 널 믿을 수 있다면 그렇겠지.”
그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흡사 공포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쫄았다는 걸 들킬 수는 없었다. 난 재빨리 되뇌었다.
클라이언트. 눈앞의 알버트는 내가 계약을 따내야 하는 클라이언트다.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가 갑의 입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이 계약을 해야 하는 건 알버트였다.
내가 그에게 굽히면서 들어가되, 내 입장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이 계약은 양쪽에게 이득이니, 나도 챙길 건 챙겨야 했다.
나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왕자님, 저는 보여드릴 수 있는 모든 걸 보여드렸어요. 계약서도 써왔고, 방도 옮겼고, 그리고 의심하시기에 키스까지 했어요.”
이래도 믿지 못한다면, 그의 손해인 것이다.
“제가 왕자님을 협박하던가요, 혹은 빌던가요? 저는 이 계약에서만큼은 왕자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동등한 위치라.”
알버트가 헛웃음을 지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하긴, 하녀가 동등한 위치 운운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 나는 말을 적당히 순화시켰다.
“물론 탑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굳이 동등한 위치라고 말한 이유는 제가 왕자님을 이용한다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서예요.”
“네 모든 행동이 계약을 위해서였다는 거니?”
“네. 저는 계약을 충실히 이행할 마음이 있어요. 왕자님께서 제가 원하는 것을 지켜주신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총 3가지였다.
첫 번째, 탑을 나간 후 내 목숨을 보장할 것.
두 번째,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고 풍족하게 살 만큼의 돈을 마련해 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그를 만지지 않는 만큼, 알버트도 내 허락 없이 내 몸을 만지지 말 것.
“저는 왕자님께서 모든 조항을 지켜주실 거라 믿어요.”
“나도 나를 믿는단다.”
알버트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는 살짝 눈을 치켜뜬 채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로제 너는 믿을 수 없구나. 네가 조항을 어긴다면 어찌할 테냐?”
나도 알버트가 날 완전히 믿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전장치를 준비했다.
나는 조항을 어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대답은 간단했다.
“목숨으로요.”
“목숨?”
“예, 목숨. 서로 이 정도는 걸어야지 제대로 하지 않겠어요?”
“진심이구나, 로제.”
“왕자님, 전 언제나 진심이었답니다.”
알버트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로제, 펜을 가져와.”
“넵.”
그가 자연스레 내게 일을 시켰다. 나는 상사 대하는 마음으로 넙죽 펜을 넘겼다.
계약을 할 수 있다는데 이런 잔심부름 따위가 대수일까.
그가 펜을 든 채 나를 응시했다.
“후회하지는 않겠느냐?”
“왜 후회할 거라 생각하시나요?”
“넌 나를 꽤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하하, 목숨 앞에선 성욕도 사라지는 법입니다.”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사삭. 종이 위를 가로지르는 잉크가 그의 이름을 새겼다.
나는 그 옆에 내 이름을 새겨 넣었다.
LTE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양쪽의 이름이 새겨진 계약서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계약서는 서로 한 부씩 나눠 가졌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이제 내 노후와 목숨은 보장이다. 어디에 있든 내 밥그릇은 내가 챙긴다.
계약서를 품 안에 소중히 안은 나는 알버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탑에서 남은 시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왕자님. 후회하시지 않을 계약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잘 부탁한다, 로제.”
알버트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주위에 후광이 비쳤다. 혼자서만 CG 효과를 넣은 것처럼.
눈부셔! 잠시 눈을 찌푸린 나는 정신을 차린 후 근엄하게 말했다.
“그럼 저는 계약서를 제 방에 가져다 놓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따로 두도록 하지.”
다락방에 올라간 나는 책상 서랍 안에 계약서를 고이 넣어두었다.
인생 로또 예약 완료.
알버트는 내게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앞으로 잘해드려야 하는 클라이언트다.
알버트라면 탑에서 최대한 빨리 나가려 하겠지.
하지만 알버트가 아무리 천재라 해도,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는 탑 안에서 탈출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알버트와 나는 룸메이트 같은 사이인 것이다.
자취방을 구하기 전까지 룸메이트와 같이 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로의 생활 패턴이 전혀 달라 꽤 난항을 겪었었다.
그럼 알버트의 취향부터 알아야겠다.
본디 룸메이트는 서로 안 맞는 사이가 더 많은 법.
그와 완벽히 맞출 수는 없다 해도 서로 부딪치는 일은 적게 만드는 것이 좋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콩고물이 더 골고루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을 때 룸메이트끼리 가장 맞춰야 하는 건….
밑으로 내려온 나는 알버트 앞에 비장한 얼굴로 섰다.
책을 읽고 있던 알버트가 고개를 올렸다. 자신의 시간을 방해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어냐.”
나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미소 지었다.
“왕자님. 이제 긴히 상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어지?”
“뭐 좋아하시나요?”
“무엇을?”
“먹는 거요.”
사람은 자고로 먹기 위해 사는 법이다.
“참고로 전 매운 거, 단 거, 짠 거 좋아합니다.”
그리고 맵단짠은 내 인생이다!
***
내가 맵단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완벽한 중세가 아닌 작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고자인 왕에 의해 탑에 갇혀 살아야 했던 고독하고 잘난 왕 알버트 그레이.
상처 입은 야수 같은-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절대로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다독여 주고 트라우마를 치료해 줄 사람은 없었다.
모두 그의 겉모습만 보고 다가올 뿐이었다.
너무 아름다운 외모는 그에게 독이 되었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여자는 없어…!”
중2병 같은 대사와 함께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을 것 같던 알버트 그레이에게도 인연이란 존재했다.
바로 차원 이동자인 서이나!
한국에서 차원 이동한 그녀는 이곳이 중세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동양의 재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본래 이야기는 카타르시스를 위한 것! 때문에 이 소설의 작가는 설정 오류라는 걸 알고도 이런저런 재료들을 마구 집어넣었다.
덕분에 고춧가루나 된장, 고추장을 비롯해 떡 같은 한국의 재료들이 넘쳐난 것이다.
하지만 이 재료들은 주류가 아니었다. 사실 이 재료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고춧가루도 천대하는데 고추장이 왜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당시 웹소설을 읽던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용은 흥미진진해서 넘어갔다.
서이나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치킨, 떡볶이, 삼겹살 등을 비롯해 맛있는 음식을 뚝딱뚝딱 만들어내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에게 빠져 버렸다. 음식으로 세계 정복도 할 기세였다.
결국 그 소문에 알버트도 서이나를 만나러 왔다…, 까지가 내가 읽은 책의 이야기다.
그 뒤는 나도 모른다. 둘이서 이어지긴 했을 텐데.
다 읽었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다음 날도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잠이 더 중요했다.
바로 그다음 날 허무하게 죽고 책에 빙의할 줄 알았으면 더 읽었을 텐데,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마케팅팀 신입 사원으로 눈치 보며 살던 때와 지금이 이상하게 오버랩되었다.
상사가 두 명이나 생겨 버린 탓이다.
내가 주기적으로 보고서를 올리는 고자 왕과, 알버트 왕자.
나는 환기라도 할까 싶어 창문을 열었다.
탑 밖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인사도 할 겸 손을 흔들었다.
탑은 보초를 서는 병사들로 포위되어 있다. 그들이 차례대로 보초를 서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내게 물품을 조달한다.
물품을 조달받으며 나는 일주일 동안 내가 알버트에게 한 고문에 대한 보고서를 전달한다.
이번 주 보고서는 이미 로제가 써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내가 머리를 쓸 필요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보고서를 손에 쥔 나는 탑의 문을 열었다. 매주 월요일 오전 8시에만 열리는 문이었다.
나는 병사들에게 심각한 얼굴을 했다. 내 말을 믿게 하기 위해 진지한 태도는 필수였다.
이들은 고자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명을 따를 뿐 왕의 심복이라 보긴 어려운 이들이었다.
그리고 난 현재 그들을 설득하는 중이었다.
“왕자님을 괴롭히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적힌 모든 게 필요해요.”
“…대체 고문에 음식 재료가 왜 필요한 겁니까?”
“지팡이를 쓰는 것만이 고문은 아니잖아요? 의식주는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요소예요.”
내 말에 병사들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표독스럽게 눈을 부라렸다. 악녀가 나오는 로판만 몇십 권을 본 짬밥이 여기서 쓰였다.
“전 왕자님을 굶기고 그 후에 매운 음식을 줘 속을 고통스럽게 만들 거예요. 제게 더 의지하실 수 있도록…!”
최대한 사악해 보여야 해! 나는 깔깔 웃으며 그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니 여기 있는 걸 전부 가져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노, 노력해 보겠습니다.”
병사들은 다행히 설득에 약했다.
뭐 음식 재료 좀 추가하는 것 가지고 왕에게 보고하는 것도 이상할 테니 웬만하면 들어주겠지.
내 보고서를 든 채 서둘러 돌아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내가 적었던 건 떡볶이 재료였다.
아,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리지?
우선 병사들 포섭은 끝난 것 같다. 나는 부랴부랴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했던 국과 빵을 쟁반 위에 올린 나는 올라갈 준비를 했다. 부엌문을 닫고 위쪽으로 올라가는 둥근 계단에 발을 디뎠다.
계단 끝에는 2층이자 방으로 향하는 문이 또 있었다. 문을 열자 문 바로 옆 책상에 앉은 알버트가 보였다.
그는 한쪽 눈에 모노클을 쓴 채 지팡이를 살피고 있었다.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가늘게 뜨자 그의 긴 속눈썹이 팔랑였다.
지팡이의 윗부분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고개를 뻗자 알버트의 턱선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뿐인가? 완벽한 콧대와 그 밑에 자리한 입술까지.
1일 1 미남은 참 좋은 것 같다. 그게 알버트 같은 얼굴이면 더.
헤헤.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제야 날 발견한 알버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로제, 왜 그리 웃지?”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거잖아요.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에요?”
“…네가 먹는 걸 그리 좋아하는지 몰랐구나.”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은 완벽한 소확행이다.
알버트와 이야기도 나누고 있겠다, 아부하기 적당한 타이밍이다!
나는 슬쩍 말을 이었다.
“사실 그것과 별개로 웃은 이유가 또 있긴 해요.”
“뭐지?”
“왕자님의 미모에 감격해서입니다. 1 가구에 1 왕자님 보급이 시급해요.”
나는 주접을 마음껏 떨었다.
이렇게 닫힌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사람이 미칠 지경에 다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내 삶의 질을 높일 방법을 고민했다.
바로 알버트 덕질을 하기로 한 것이다.
알버트는 미모와 미성을 두루 갖춘 완벽한 남자로, 덕질 하고 응원하기에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 알버트, 하고 싶은 거 다 해!
내 시답잖은 말을 들은 알버트는 피식 웃었다. 어이없다는 것처럼.
모노클을 뺀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팔짱을 낀 그가 벽에 기대어 섰다. 나를 응시하는 눈빛이 탁했다.
“로제, 넌 내가 여전히 좋은 것 같구나.”
“하지만 제 사랑은 오로지 플라토닉이랍니다, 전 왕자님이 좋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왕자님의 사랑은 바라지 않거든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 있던가.”
조소하며 말하는 알버트에게 내가 아주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어디?”
덕질이요.
나는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하니 적당히 말을 바꿨다.
“바로 제 마음속에요.”
알버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무래도 그는 내 개그가 별로인 모양이다. 앞으로 자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