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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1화 (1/156)

[연한]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

1화.

알버트 그레이는 누가 보아도 잘생긴 남자였다.

검은색과 은색이 오묘하게 겹쳐드는 회색 머리카락에 루비를 박아넣은 듯 붉은 눈동자는 완벽한 색채감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조각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목구비는 마치 아름다움이라는 글자를 형상화한 것 같았다.

누구든 그를 보면 자리에 멈춰 감탄했다.

하지만 신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를 능가할 만한 검술 실력. 몸 전체가 근육으로 만들어져 있다 해도 무방한 체구는 국민의 마음을 홀렸다.

누가 보아도 왕이 될 상이었다, 그는.

현왕인 로스투라투 그레이는 알버트를 싫어했다.

그는 알버트를 질투했다. 알버트 그레이가 왕자이긴 했지만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냐고?

현왕, 로스투라투 그레이는 고자였다.

모두에게 적나라하게 알려진 사실이라 숨길 것도 없었다. 해서 그는 알버트 그레이라는 적당한 왕족 혼혈 핏줄을 데려왔다.

알버트는 부모도 형제도 모두 죽어 없었고, 세력이랄 것도 마땅히 없었다.

그를 데려올 때만 해도, 로스투라투는 안심했다. 알버트가 자신보다 관심을 더 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몰랐던 것이다.

알버트 그레이가 그렇게 훌륭하게 자랄 줄.

로스투라투 그레이는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는 알버트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탑에 가두었다.

감금 마법이 걸린 탑 안, 알버트는 하녀 한 명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러나 하녀를 붙인 건 알버트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로스투라투 그레이는 알버트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가 불행하길 원했다.

그는 알버트를 원하는 욕망 넘치는 인물을 골라 하녀로 붙였다.

그러고는 하녀에게 마력이 담긴 지팡이까지 쥐여주었다.

하녀는 알버트를 철저히 농락했다. 그를 마법으로 통제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다.

예를 들자면, 키스나 포옹 같은 스킨십으로. 모든 건 로스투라투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알버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충실히 힘을 모았다. 우선 그는 하녀를 살살 구슬려 지팡이를 얻는 데 성공했다.

먼치킨 주인공답게 마력을 다룰 줄 알았던 알버트는 지팡이를 이용해 탑 바깥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소통했다.

그리고 조용히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감금된 지 1년째 되던 날, 알버트는 결국 탑을 나왔다. 그리고 복수를 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탑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이 뭔지 아는가.

뎅겅. 자신을 농락한 하녀의 목을 한 번에 베는 거였다.

하녀는 살려달라 찍소리도 못 하고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삼류 악당 캐릭터다운 허무한 죽음이었다.

***

그렇습니다. 하녀는 단칼에 죽었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걸 설명하고 있냐고?

알버트 그레이를 농락한 하녀, 로제 아티어스.

내가 그녀에게 빙의했기 때문이다.

내가 읽었던 책 속의 내용과 로제 아티어스의 과거가 점차 겹쳐졌다.

그녀가 이 탑에 온 첫날, 알버트에게 인사를 건네던 때부터-

…현재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까지.

입술 위에 머물던 낯선 이의 숨결이 멀어졌다.

나는 방금 전까지 내게 입을 맞추었던 남자를 응시했다.

짙은 눈썹 밑에 자리한 눈은 크고 이지적이었다. 누구라도 보면 정신을 빼앗길 것처럼 우아한 눈이었다.

하지만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마치 날 잡아먹을 것처럼 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신의 조각상이라는 말이 믿길 정도로 뚜렷한 이목구비라더니, 과연 그는 여태 내가 봐온 어떤 배우보다 잘생겼다.

그러니 멍하니 보게 되는 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불가항력이었다.

“로제,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귓가에 착 감겨드는 목소리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침묵이 흐르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러게요….

“이,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요.”

내 말에 알버트가 싱긋 웃었다. 마치 영업 사원처럼 영혼 없는 미소였다.

웃는 얼굴이 회사에 있던 내 모습과 똑 닮아 있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표정이 거의 없는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는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럼 이제 볼 수 있을까?”

“…네.”

그가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지팡이를 가져갔다.

나는 현재, 지팡이를 한 번 볼 수 있게 해주는 대가로 알버트에게 키스를 요구하던 중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죽을 무덤의 초석을 파고 있었단 얘기다.

…젠장.

빙의하자마자 사망 플래그가 생겨 버렸다!

***

나는 드디어 알버트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상황을 정리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 책에 빙의하기 전만 해도 나는 ‘유정인’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러다 출근길에 버스 사고를 당했고, 눈을 떠보니 책 속에 빙의한 상태였다.

매일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외치며 살아가던 내 취미는 웹소설 보기였다.

비싼 건 못 사도 내 행복을 위해 소설은 매일 결제했다.

내가 빙의한 이 소설도 그렇게 보게 된 작품들 중 하나였다.

엑스트라에게 고통받는 알버트의 모습은 안타까웠고, 그가 탑에서 나가 여주인공 서이나를 찾게 되었을 때는 흥미진진했다.

사고를 당하기 전 순간까지 뇌리에 남아 있었을 정도로.

그래서일까? 내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은?

하지만 새 삶을 얻게 된 것과 별개로 큰 문제가 있었다.

나는 죽을 운명의 엑스트라에 빙의했다.

로제 아티어스는 불우한 삶을 살았던 여인으로-엑스트라인 만큼 그녀의 삶이 제대로 묘사된 적은 없지만-, 알버트에게 첫눈에 반한 이후 그를 가지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로스투라투와 거래를 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탑 안에 알버트와 감금되는 데 성공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남자와 단둘이 남은 로제는 행복했겠지만 나, 유정인은 행복하지 않다.

이대로 로제처럼 살다간 죽고 말 것이다. 새 삶을 살기 시작하자마자 죽는 건 사양이었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알버트 그레이는 잘생겼다. 아니, 솔직히 잘생겼다는 말이 부족하다.

보기만 해도 상대를 홀릴 것 같은 외모는 확실히 누구라도 탐낼 만했다.

그런데 아무리 잘생겼다 해도 내 목숨이 달려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기에다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원래 이상형은 멀리 있어야 더 아름다운 법이다. 내 마음대로 환상을 덧씌우고, 상처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알버트와 처음이자 마지막일 키스 이후 나는 날짜를 확인했다.

로제의 기억은 잠에서 깨어나면 사라지는 꿈처럼 흐릿해지고 있었다.

나는 기억을 잽싸게 더듬어 알버트와 함께 살아야 할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이 미친 하녀는 알버트와 감금된 지 일주일 만에 키스를 따냈다.

그녀는 정말 알버트의 모든 것을 원했다.

거기까지 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아니, 알버트는 이미 키스를 하며 로제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했을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팠다.

오,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시련은 알버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탑. 하녀 로제도 알버트와 함께 갇힌 처지였다.

와이파이도, 인터넷도, 컴퓨터도 없는 이곳에서 1년을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문명인으로서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하지만 우는 것도 잠시, 나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탑의 구조를 다시 한번 살피는 일이었다.

탑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은 부엌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식량이 들어오는 문이 있었다.

여러 가지 그릇과 냄비, 팬 같은 요리 도구와 재료를 넣어둘 수 있는 창고도 있었고, 물론 불을 땔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둥그런 탑의 모양 때문에 계단은 벽을 따라 회오리형으로 굽이져 있었다.

부엌에서 나와 계단을 올라가면 하나뿐인 침실에 다다른다.

침실 옆에는 화장실 겸 욕실이 붙어 있었다.

그게 끝이다.

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방은 그 침실 하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탑이 커서 방이 하나이긴 해도 넓다는 점이었다.

천장도 높고 창문도 하나 있어서 답답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성의 벽은 따듯한 베이지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편안함을 주었다.

창문 옆에는 겨울을 나기 위한 벽난로도 마련되어 있었다. 벽난로는 작았지만 방 안을 덥히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벽난로에서 약간 떨어진 벽에는 침대가, 반대쪽 벽에는 책이 꽂힌 작은 책장과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에서 조금 걸어가면 다락방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있었다.

창고처럼 쓰이는 탑의 꼭대기 공간으로, 탑의 마지막 3층을 이루고 있었다.

지팡이를 가진 나는 모든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알버트는 2층의 침실만 다닐 수 있었다.

활동에 제한이 있는 알버트는 하녀가 무얼 요구하든지 따라야 했던 것이다. 분노를 불태울 만했다.

…내가 생각해도 죽일 만했다, 정말.

다락방에 쭈그려 앉아 있던 나는 숨을 내쉬었다.

진정하자.

책에 빙의해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나갈 수 있다고 했다.

누가?

내가.

…전생에서 사고로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 내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알버트는 왕자고, 왕이 될 사람이다.

그의 옆을 잘 지키기만 한다면, 나는 한탕 크게 해 먹을 수 있다.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같은 거지.

계약서를 쓰자.

그래서 탑에서 나간 후 내 삶과 노후를 보장받아야겠다. 빨리 나갈 수 있으면 더 좋고.

여기서 알버트랑 단둘이 있어봤자 뭐 하겠어. 지팡이를 주면서 협력하는 거다.

완벽한 계획이다.

생각을 했으면 실천으로 옮겨야지.

나는 다락방에서 내려왔다. 알버트는 침대 위에 고상하게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늘어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 넋을 잃은 것도 잠시, 나는 조심스레 그를 불러보았다.

“왕자님.”

알버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나를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에 나는 오히려 덜덜 떨었다.

하녀 로제는 몰랐겠지만, 나는 저 미소가 영업용이라는 것에 내 목숨을 걸 수 있다. 뭘 근거로? 사회생활 짬밥을 근거로.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잖아, 이 남자야.

“뭐지, 로제? 뭔가 더 필요한 거니?”

은근한 뜻을 담은 질문에 나는 단숨에 답했다.

“아뇨, 아뇨! 그런 거는 필요하지 않아요!”

아서라! 내 목숨이 달린 일인데!

알버트가 미간을 좁히더니 팔짱을 꼈다.

“방금 전의 대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구나, 로제. 나는 꽤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빴던 것은 아닌데요.”

아차, 속내가 나와 버렸다. 하지만 알버트는 키스를 잘했다. 그것도 남자주인공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저하가 원한 일이 아니잖아요. 저하가 원하지 않으신다면 할 필요 없어요.”

“내가 원하지 않으면 할 필요 없다고?”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지 알버트가 눈썹을 올렸다. 마치 천사가 강림한 것 같아 내 눈이 호강했다.

결국 내 입에서 주접이 튀어나왔다.

“와, 왕자님 진짜 아름다우시네요.”

“…로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니?”

자리에서 일어난 알버트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내 본분을 상기했다.

“죄송합니다. 이게 본론입니다.”

나는 그 앞에 방금 전에 적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왕자님과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나를 대가로?”

자꾸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잖아!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아뇨! 왕자님과의 스킨십 같은 건 전혀 안 바라요! 안 바랍니다!”

내 말이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듯 그가 미간을 좁혔다.

이윽고 알버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넌 날 좋아하잖니.”

귓가에 들리는 낮은 울림에 나는 몸서리쳤다.

맙소사, 저 왕자병 같은 멘트가 자연스러워 보이다니. 저 자신감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내쉬었다.

‘나는 로제가 아니라 유정인이고,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면 믿지 않을 것이 뻔하다.

게다가 이곳이 책 속이라거나, 빙의했다는 말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계약서를 썼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종이의 위력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왕자님, 이걸 봐주세요.”

알버트는 내 손에 들린 계약서를 펼쳤다.

그가 중얼거렸다.

“…로제 아티어스의 생사와 노후 보장을 위한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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