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211화 (211/211)

검을 든 꽃 외전 3-3화

* * *

며칠 후, 스타티스 저택에서는 작은 행사가 열렸다. 본래 유리엔이 막내딸의 검술을 확인하려던 자리였는데, 메이릴리가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 성공했다는 소문이 창천 내에 퍼지는 바람에 보러 온 사람이 늘었다.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와 디트리히 폰 프랑 알마리 부부, 그들의 딸 아나스타샤와 아들 알렉세이가 왔고, 바론 틸리어스의 장녀 레베카가 동생들을 데리고 왔다. 틸리어스 부부는 고향으로 휴가를 떠난 터라 없었다. 니콜 시즈튼 역시 참석했다.

분위기는 야유회에 가까웠다. 스타티스 저택 후원의 호숫가 나무그늘에 자리가 마련되고 주방장이 혼신을 다해 만든 간식과 음료가 날라졌다.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이들은 또래끼리 놀았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히아신스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유달리 어른스러운데다 그린 듯이 아름다운 외모 덕에 히아신스는 인기가 많았다. 리시안서스도 아이들 사이에 있었다.

그 자리에 없는 것은 준비 중인 메이릴리뿐이었다. 메이릴리는 풍성한 은발을 곱게 땋아 묶고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은 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집사 던컨이 준비가 끝난 꼬마 아가씨를 안내했다.

“더, 던컨.”

“네, 메이 아가씨.”

“누구누구 왔어? 디트리히 삼촌네랑, 레베카 언니랑도 다 온 거야?”

“네, 다 오셨습니다.”

“으으……. 니, 니콜 이모는? 니콜 이모도 왔어?”

“물론 오셨지요.”

“아빠랑 엄마도?”

“당연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던컨, 나 어떡해? 실수하면 어떡하지?”

인형처럼 오밀조밀한 얼굴이 울먹거렸다. 던컨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메이릴리를 내려다보았다. 이 어린 아가씨는 아직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천재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조그만 에키네시아 아가씨 같은 분이 자신감이 없다니…….’

얼굴도 재능도 누구 딸 아니랄까 봐 쏙 빼닮았는데 말이다. 특히 눈은 판박이 수준이었다. 첫째 히아신스는 눈동자 색은 어머니를 닮았어도 눈매는 유리엔을 닮은 것과 달리 메이릴리는 눈매까지 똑같았다. 오래도록 봐온 에키네시아 스타티스의 타오를 듯 선명한 눈과 똑같은 눈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니 웃음이 나오려 했다. 던컨은 웃음을 참으며 소녀를 달랬다.

“걱정 마십시오, 메이 아가씨. 잘하실 겁니다. 그리고 혹시 잘못하더라도 괜 찮습니다. 다들 아가씨를 아끼는 분들이 잖습니까.”

“실망하시면 어떡해.”

“메이 아가씨는 아직 일곱 살입니다. 잘못해도 아무도 실망하지 않아요.”

“……떨려서 심장이 쿵쿵 뛰어.”

“심호흡을 해보세요. 조금 나아질 겁니다.”

메이는 추가 달린 목검을 힘껏 움켜쥐고 후, 하, 소리를 내며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질끈 눈을 감고 후원으로 달렸다. 던컨은 소녀가 넘어질까 봐 언제든 받칠 태세로 뒤따랐다.

“메이!”

“메이, 어서 오렴.”

후원에 도착하자마자 에키와 유리엔이 다가왔다. 유리엔이 위태롭게 달려오는 소녀를 얼른 안아 올렸다. 아이들 틈에 있던 히스와 리시안도 빠져나와 다가왔다.

리시안은 복잡한 표정으로 메이를 올려다보았다. 여동생이 자신보다 빠르게 아빠의 시험을 해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자꾸 훈련을 빼먹는 자신의 버릇을 고치려고 다들 짠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근데 진짜면 어떡하지? 내가 메이를 지켜주려 했는데, 메이가 더 세지면…….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제일 잘한다고 다들 그랬는걸. 나도 아직 못 하는 건데!’

리시안이 일생일대의 고뇌에 빠져든 사이, 메이가 아빠의 품에서 내려왔다. 달달 떨면서 목검을 들어 올리는 소녀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메이는 바닥에 미리 그려둔 원 안으로 들어가 중앙에 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까맣게 어둠이 덮이자 금세 침착해졌다. 그녀는 자세를 잡았다. 자세를 잡는 순간 메이릴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떨림이 사라지고 수줍던 표정도 단단해졌다.

고작 일곱 살인데 제법 묵직한 분위기라 지켜보던 사람들이 낮게 감탄했다. 유리엔의 눈빛이 신중해졌고 리시안은 움찔 놀랐다. 에키는 미소를 띠다가 말고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잠깐 인상을 썼다. 바르데르기오사가 또 막내딸을 탐낸 탓이었다.

소녀가 눈을 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상의 적을 상대로 하나하나 공격을 펼쳐나가고, 적의 공격을 가정하여 반격과 방어를 해나간다.

스타티스식 검술은 에키네시아의 영향으로 빠르고 움직임이 많았으나, 유리엔의 영향으로 유려한 맛이 있었다. 어설프게 따라했다간 가볍고 정신없는 느낌이 들기 쉬웠다.

메이릴리는 완벽하진 못해도 어설프지는 않았다. 성인의 허리께에 올까 말까 한 작은 여자아이가 펼쳐내는 검이 벌써부터 절도가 있었다. 리시안은 자주 넘어지는 기술도 메이릴리는 등을 곧게 펴고 해냈다. 추를 단 목검의 무게가 상당할 텐데도 검끝이 별로 처지지도 않았다.

“……진짜 괴물이 따로 있었네. 애 맞아?”

디트리히가 얼빠진 투로 중얼거리다가 테레사가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 기술을 끝낸 메이릴리가 검을 거두고 눈을 떴다. 소녀는 발아래부터 보았다. 그녀의 발자국들은 바닥에 그어져 있던 원의 금조차 밟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메이의 얼굴에 뿌듯한 기색이 한가득 떠올랐다. 고개를 들고 굳어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붉어져서 약간 허둥거리다가 예법 선생님에게 배운 대로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히는 인사를 했다.

“가, 가, 감사합니다!”

바지 차림이라 어색했지만 그래도 앙증맞은 인사에 놀라 있던 사람들 사이에 미소가 번졌다. 박수소리를 들으며 소녀는 도망치듯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그제야 감탄이 오갔다. 검을 잘 모르는 니콜은 테레사와 디트리히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검을 익히고 있는 또래의 아이들은 넋이 나갔다. 특히 알렉세이는 반쯤 홀린 듯한 눈이었다. 이미 한 번 본 히아신스만이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얼굴로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키는 드레스 자락 사이로 파고드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메이가 품을 붉히더니 활짝 웃었다. 딸에게 마주 웃어준 에키가 결에 있는 유리엔을 돌아보았다.

“유리엔, 어때요?”

“메이가 목검을 쥐는 건 낭비라는 그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유리엔은 낮게 신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그대가 어릴 때 검을 쥘 기회가 있었다면 메이 같았을까.”

“글쎄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모르죠.”

[난 알아! 네가 쟤보다 더 잘했을 걸.]

마검이 냉큼 끼어들었다. 에키는 눈살을 찌푸린 채 속삭였다.

“나도 모르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검으로서의 감이야!]

“그래, 그래.”

그녀는 마검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곧 리시안이 충격받은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로 다가왔다. 소년은 메이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진지한 눈으로 여동생을 응시했다.

“메이, 나랑 대련해 볼래?”

“리시안.”

유리엔이 눈살을 찌푸리고 끼어드려는 것을, 에키가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메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대련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난 괜찮아. 혹시 하기 싫어?”

“아니, 해보고 싶어! 해봐도 돼요. 엄마?”

메이가 에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에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들떠서 목검을 쥐고 일어났다. 근처에 있던 던컨이 그녀의 목검에 달려 있던 추를 떼어내 주었다.

유리엔이 에키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대련이라니, 위험하지 않나? 아직 메이는…….”

“메이는 괜찮아요. 그리고 이건 리시안을 위한 거예요.”

“……리시안을 위해서라고?”

“메이가 이길 테니까요. 메이에게 지고 나면, 리시안도 검을 대할 때 좀 진지해지겠죠.”

“그럴 리가, 메이가 아무리 뛰어나다지만 리시안도…….”

“율, 저는 메이가 처음 검술을 보여준 이후 지금까지 매일 훈련을 봐주었어요. 그리고 리시안의 실력도, 훈련 상태도 잘 알죠. 최근엔 훈련 시간을 지킨 때보다 안 지켰을 때가 더 많잖아요.”

“어머니! 리시안이 메이와……!”

리시안과 메이가 목검을 들고 마주 선 것을 본 히스가 뒤늦게 당황하여 달려왔다. 에키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대며 눈짓했다. 그녀가 허락했다는 것을 눈치챈 히스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이들도 하나 둘 입을 다물고 잔디밭에서 갑자기 벌어진 아이들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대련은 길지 않았다. 배운 그대로 들어오는 리시안의 공격을 메이가 몇 차례 피하더니, 틈을 노려 목검을 겨누었다. 뭉툭한 목검의 끄트머리가 리시안의 가슴팍 앞에서 멈췄다.

“저…… 졌습니다.”

리시안이 더듬더듬 말했다. 뒤이어 경악과 뒤섞인 정적이 묵직하게 흘렀다.

“방금 보았나, 디트? 공격을 멈췄어. 말도 안 돼. 저 나이에 저게 된다고?”

테레사는 메이릴리의 승리 자체보다, 메이가 리시안을 치기 직전에 목검을 멈춘 것에 더 놀랐다.

“말이 되면 그게 천재겠어. 이해가 안 가는 수준이어야 천재지.”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하던 디트리히는 곁에 있던 아들 알렉세이를 돌아보고 흠칫 놀랐다. 금발의 소년은 아까보다 더 몽롱해진 눈으로 메이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홉 살짜리 아들이 생전 처음 보이는 표정을 보자마자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녀석, 반했구나…….’

첫사랑이 그 유리엔과 그 에키네시아의 막내딸에, 위로는 오빠가 둘이나 있는, 아젠카의 공주님이나 다름없는 메이릴리라니. 디트리히는 아들의 첫사랑이 험난할 것을 짐작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검을 거둔 메이는 리시안을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리시안은 빨갛게 낯을 붉힌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리시안 오빠, 화났어?”

“……아니.”

“그럼?”

“분해서.”

“분한 거랑 화난 거랑 달라?”

“조금 달라.”

“어떻게?”

“분한 거는, 다음엔 더 열심히 하겠다는 뜻이니까.”

조그맣게 답한 리시안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다음에 안 질 거야. 난 메이보다 강한 오빠가 될 거니까.”

“나는 리시안 오빠가 나보다 강하지 않아도 좋은데.”

“바보야, 너보다 강해져야 널 지켜주잖아!”

“괜찮아, 내가 오빠를 지켜주면 되잖아.”

“이 쪼끄만 게! 필요 없어, 내가 지킬 거야! 조금만 기다려!”

리시안이 씩씩거리며 외치더니 유리엔에게 냉큼 달려왔다. 소년은 급하게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 저 훈련! 훈련시켜 주세요!”

“리시…….”

“리시안, 손님들이 계신다. 아버지께 떼쓰지 마라.”

유리엔이 무어라 하기 전에 히스가 엄하게 말하며 동생을 잡아끌었다. 리시안은 히스에게 붙잡혀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끌려갔다. 메이도 오빠들을 따라 합류했다. 소녀는 또래인 바론의 막내딸과 무어라 속삭이다가 활짝 웃었다.

유리엔은 모여 있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옅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그대 말대로 되었군.”

“리시안은 상대가 될 만한 아이가 없었으니까요. 메이가 있으니 이제 진심으로 열심히 하겠죠. 메이도 열성적이니 서로에게 좋을 거예요.”

“그렇겠지. 함께 검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니.”

그가 에키를 돌아보며 답했다. 에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제가 당신에겐 축복인가요?”

“축복 이상이다.”

“만약 제가 검을 다룰 줄 몰랐다면…….”

“그랬다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잃었겠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일은.”

“……하긴, 만나지도 못하고 끝났겠네요. 우리.”

에키네시아가 세기의 천재가 아니었다면, 그저 마검의 희생자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유리엔과 그녀의 만남은 제대로 시작되지도 못했을 터다. 돌고 돌아 이어진 운명이었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 틈에 있는 세 아이들을 눈으로 좇으며 말을 이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표정이 모두 밝았다.

“그렇게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대가 그렇게 끝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전부, 그대가 이루어낸 삶이니.”

유리엔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에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녹을 듯한 눈으로 웃고 있는 남자. 그들의 위에서 그늘을 드리운 녹음이 흔들거렸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이 그와 그녀의 주위를 수놓았다. 아이들이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어쩐지 이 시간을, 이 순간을 카이로스기오사가 봤었을 것 같아요.”

“어째서?”

그녀는 대답 대신 웃으며 그의 입술을 훔쳤다. 스치는 듯한 접촉에 되레 더 부끄러워진 유리엔이 벌겋게 낯을 붉히고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에키네시아는 그제야 그의 귓가에 대답을 속삭였다.

지금, 정말로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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