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209화 (209/211)

검을 든 꽃 외전 3-1화

외전 3. 끝나지 않는 것

에키네시아와 유리엔의 첫째 아이는 히아신스 스타티스였다. 신에게 사랑받았던 아름다운 소년의 전설이 얽혀 있는 꽃에서 따온 이름처럼, 히아신스는 굉장한 미소년이었다.

희고 우아한 얼굴이나 은발은 아버지를 빼닮았다. 아젠카 시내에서라면 미아가 되더라도 창천기사단장의 아들인 것을 알아보고 데려다 줄 정도로 유리엔과 판박이였다. 다만 눈동자는 어머니를 닮아 선명한 보랏빛을 띠었다.

마스터를 넘어서는 제니스의 경지인 탓에 에키네시아는 세월이 비껴간 것처럼 스무 살 시절과 별달리 달라진 게 없었다. 열두 살의 히아신스는 상기된 뺨과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정말입니까, 어머니?”

“물론. 이제부터 이건 네 거란다, 히스.”

히스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내미는 것을 받아 들었다. 검집에 들어 있는 진검이었다. 조심스럽게 검을 뽑아본 소년은 새파랗게 날이 서 있는 칼날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지금까지는 목검이나 날이 서 있지 않은 가검만 써보았던 터라 보기만 해도 가슴 안쪽이 부풀어 올랐다.

에키는 검을 만지작거리는 장남을 보며 미소 지었다.

‘좀 더 일찍 줄 걸 그랬어.’

유리엔과 그녀는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검을 가르치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진검을 주는 부분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마검 탓에 다짜고짜 지옥 같은 실전에 내던져져 구르면서 검을 익혔던 에키는, 아이가 목검을 어느 정도 다루면 바로 진검을 주려 했었다. 그에 비해 정석대로 검을 익힌 유리엔은 아이가 다루기에 진검은 위험하니 좀 나이를 먹은 후에 주기를 원했다.

다칠까 봐 걱정된다는 유리엔의 약한 표정과, 일곱 살짜리 손자에게 진검이라니 무슨 짓이냐며 기겁하는 로아즈 공작 부부의 반응과, 결정적으로 히스가 진검을 쥐자마자 손을 베는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에키는 의견을 굽혔다.

결국 히아신스는 열두 살이 된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검을 받게 되었다.

“우와, 히스 형은 좋겠다. 너무너무 좋겠다. 부럽다아…….”

입을 댓발은 내밀며 투덜거리는 소년은 둘째인 리시안서스 스타티스였다. 리시안서스가 슬며시 어머니를 바라보더니, 그녀의 품에 안겨들며 애교 있게 졸랐다.

“엄마, 나도 진거엄……. 진검 갖고 싶어요!”

“내가 아니라 아빠를 설득해 보렴, 리시안.”

“아빠는 약속한 걸 해내기 전까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럼 해내야지.”

“눈을 가리고, 추를 단 목검으로 스타티스식 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치면서 바닥에 그어둔 원에서 벗어나지 말라니, 그게 말이 돼요? 그걸 어떻게 해요!”

“히스는 성공했잖아. 그리고 그것도 못 하면서 진검을 드는 건 엄마가 보기에도 위험해.”

“으으……. 그래도요오……. 절대 안 다칠게요. 네?”

리시안은 부러 울상을 지었다. 물기가 어린 하늘색 눈동자가 유리엔과 똑같아서 에키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우는 척해도 안 돼.”

“리시안, 넌 나보다 진도가 빠르잖아. 놀러 다닐 시간에 연습을 더 열심히 하면 금방 나보다 잘할 거다.”

히스가 반듯한 투로 말했다. 리시안은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형은 갈수록 아빠랑 똑같이 말해.”

첫째는 외모처럼 성격까지 유리엔을 닮아서 고지식하고 성실했다. 여러 분야에 재능이 있는 것도 닮아 있었다. 다만 검술 재능은 두 살 어린 리시안이 히스보다 더 뛰어났다. 하지만 재능이 앞서는데도 리시안은 훈련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탓에 형에 비하면 아직 부족했다.

히스는 검을 챙기며 빙긋 웃었다.

“나는 검을 좋아하지만, 기사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넌 기사가 되고 싶다며? 그런 네가 나보다 더 게으르게 훈련하면 안 되지. 아버지께서도 그리 생각하고 계시니 나처럼 말씀하시는 게 아니냐.”

“형이야말로 뭘 벌써 진로를 결정하고 그래? 형도 기사 할 수도 있지!”

“난 검술이 별로 맞지 않아. 취미와 호신용으로 삼으면 적당할 정도지. 그리고 공부가 더 재미있으니까.”

“으웩, 공부가 재밌어? 진짜 형 이상하다니까.”

에키는 한참 어린 열두 살짜리 아들이 애어른마냥 웃는 얼굴로 열 살짜리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지켜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히아신스는 결코 검의 재능이 부족하지 않다. 보통의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면 객관적으로 천재에 가까웠다. 주위에 있는 아이들이 하나같이 기사나 기오사 오너의 아이들이라 대부분 검에 재능이 있고, 동생인 리시안이 그중에서도 탁월한 탓에 상대적으로 본인이 모자란다고 생각할 뿐이다.

에키나 유리엔은 몇 번이나 히스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었다. 히스는 똑똑한 아이라 쉽게 알아들었지만, 똑똑한 만큼 더 분명하게 말했다.

〈검도 좋아하지만, 공부를 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저는 검을 쥐는 것보다 학문을 익힐 때 더 뛰어난 성취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검을 놓을 생각은 없으나, 전 학문에 더 집중하고 싶습니다.〉

에키나 유리엔은 아이들에게 기사가 되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길을 가면 될 일이다. 그래서 히스의 선택을 지지해 주었다.

현재 히스는 검은 적당히 익히면서 제국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공부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히아신스 스타티스의 ‘적당히 익히는 검’은,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18세에 아젠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책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유리엔을 닮은 거겠지.’

리시안은 놀기 좋아해서 그렇지 검술 재능면에서는 압도적이었다. 자꾸 훈련하지 않고 놀러 다니는 것도 웬만한 건 다 너무 쉽게 해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유리엔은 둘째가 자신이 어릴 때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고 말했었다. 에키의 경우 어릴 때 검을 쥐어본 적이 없으므로 비교할 방법이 없었지만, 다른 아이들을 보면 리시안이 월등하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깝게는 히스와 비교해 보아도 그랬다.

리시안이 유리엔이 세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건 순전히 게으른 탓이었다. 또래들은 물론이고 나이가 위인 형을 상대로도 대련하면 압승인 데다 딱히 절박한 상황에 있는 것도 아니니 게을러질 만도 했다.

‘좀 자극이 되는 친구가 있으면 진지해지려나.’

에키는 첫째의 진검을 빌려달라고 조르는 둘째를 지켜보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진검이 욕심나면 열심히 하지 않을까 조금 기대했는데 영 글러 보였다.

문득 히스가 리시안의 정수리께를 응시했다.

“리시안, 너 머리색이……. 마법약의 효과가 끝나가나 보군.”

“으악”

리시안이 기겁하며 머리를 양손으로 덮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히스와 같은 은발이던 둘째의 머리카락은 서서히 분홍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리시안은 울상이 되어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씨이, 벌써 바뀌네. 니콜 이모한테 다시 부탁해야지.”

히스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너, 또 염색하려고?”

“형도 분홍 머리로 태어나면 염색하고 싶을걸.”

“어머니께 물려받은 머리카락이 창피하다는 거냐?”

“엄마는 여자니까 예쁘지만 난 남자라고! 남자가 분홍 머리가 뭐야!”

“머리카락 색이 성별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지?”

“몰라! 어쨌든 난 싫단 말이야! 엄마, 저 니콜 이모한테 다녀올게요!”

소년이 빽 소리를 지르고는 저택 쪽으로 달려갔다.

리시안서스는 잘 유전되지 않는 분홍 머리를 에키네시아로부터 물려받았다. 얼굴도 그녀와 닮아 예쁘장한 편이라 그 머리카락이 몹시 잘 어울렸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예쁘다, 귀엽다는 칭찬을 늘상 들었다. 리시안은 그런 칭찬들을 분명 좋아했었다.

그러던 리시안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긴 남자애니까 분홍 머리가 안 어울린다며 염색을 해달라고 졸라댔다. 아무래도 아이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알아보니 테레사와 디트리히의 장녀인 아나스타샤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히아신스만 보면 얼굴이 새빨개지곤 했는데, 리시안이 그걸로 자꾸 놀려댔다고 한다. 화가 난 아나스타샤가 ‘남자애한테는 안 어울리는 분홍 머리인 너보단 히스 오빠가 훨씬 멋지니까 당연하잖아!’라고 소리친 것이다.

리시안은 그 말에 충격을 받고 염색을 하겠다고 우겨댔다. 염색약은 어린아이가 쓰기에는 독하고 해로워서 안 된다고 하자 직접 다른 방법을 찾아내기까지 했다. 니콜을 졸라 마법으로 머리를 형과 같은 은발로 바꾼 것이다. 이럴 때만 영악한 녀석이었다.

소년은 마법이 풀릴 때쯤 되면 다시 니콜에게 찾아가 꼬박꼬박 염색을 하고 있었다. 에키는 니콜을 설득해 낸 아들의 의지를 높이 사서 굳이 말리진 않았다. 그녀는 달려가는 리시안의 등을 향해 외쳤다.

“혼자 가지 말고 던컨이랑 같이 가렴!”

“네에!”

대답 하나는 씩씩했다. 그새 완전히 분홍빛이 된 조그만 뒤통수가 곧 저택 안쪽으로 사라졌다. 에키는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장남을 돌아보았다.

“그럼, 히스, 우선 진검으로 검술을 펼쳐보자. 1식부터 시작해 보렴.”

“네, 어머니.”

히스는 긴장한 얼굴로 검을 쥐었다. 소년이 막 검을 들어 올리는데 지루한지 대놓고 하품을 하고 있던 마검이 에키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주인아, 네 막내가 이쪽으로 오는데? 저기 봐.]

“응?”

연무장에 메이릴리가 들어왔다.

첫째처럼 유리엔으로부터 반짝이는 은발을, 에키네시아로부터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물려받은 일곱 살의 메이릴리는 스타티스의 막내딸이자 공주님이었다.

두 오빠나 저택의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창천기사단원들이나 다른 집의 언니 오빠들까지도 인형 같은 소녀를 몹시 귀여워했다. 로아즈 공작부부나 란셀리드도 메이릴리에게는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에키와 유리엔도 막내에게는 약했다. 히스나 리시안은 다섯 살부터 시작했던 훈련도 메이릴리는 운동 수준으로만 시킬 정도였다. 로아즈 공작부부가 손녀딸까지 벌써 검을 쥐게 할 셈이냐고 싸고 돈 탓도 있긴 했다.

은발을 커다란 리본으로 묶어 올리고 작은 손으로 장난감 같은 목검을 쥔 아이가 다가오자 히스는 얼른 검을 멈췄다. 혹시나 어린 여동생이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에키는 몸을 낮춰 딸을 안아주었다.

“메이, 낮잠 잘 시간 아니었니?”

“던컨이 히스 오빠가 오늘 진검을 받는다고 알려줬어요.”

“아, 그래서 구경하러 온 거니?”

“으응……. 아니요, 저도 진검이 갖고 싶어서요. 오빠가 한 거 해내면 저도 진짜 검 받는 거죠?”

“응? 메이, 넌 아직 제대로 검을 배운 적이…….”

“할 수 있어요! 봐주세요. 네?”

메이가 에키의 품에서 벗어나 목검을 고쳐 쥐었다. 자세히 보니 목검에 히아신스나 리시안이 쓰던 추가 달려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목검을 진검과 비슷한 무게로 만들어주는 추였다. 물론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진 크게 무겁지 않은 진검과 비슷한 무게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보통 아이 수준에서는 무거웠다. 일곱 살이면 똑바로 들고 있기도 힘겨울 무게다.

그러나 메이릴리는 쉽사리 그것을 들어 올렸다. 발그레한 뺨이나 가느다란 팔과 어울리지 않는, 예사롭지 않은 자세였다. 소녀는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감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타티스식 검술은 에키네시아가 뼈대를 잡고 유리엔이 다듬어 정리한 검술이었다. 에키가 실전에서 쌓은 경험과 익힌 기술, 마검의 주인이라 자연히 느끼게 되는 가장 효율적인 검로를 바탕으로, 유리엔이 보다 이해하기 쉽고 살기를 줄이는 형태로 매끄럽게 다듬었다.

사실은 아이들에게 검을 가르치려니 검술을 형식화할 필요가 생겨서 만든 것뿐인데, 만든 사람들이 제니스인 그들이다 보니 어지간한 전통 명문가 검술들을 다 씹어먹을 수준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쉽게 만든다고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지간히 재능이 있지 않으면 따라하기조차 힘든 검술이기도 했다.

디트리히는 ‘이걸 애한테 가르치려고 만든 거라고? 하여간 천재란 것들은 다 저 같은 줄 알지’라는 평을 남겼었다. 그러나 후일 디트리히는 히아신스나 리시안서스가 순조롭게 그 검술을 익히는 것을 보고는 그 평을 수정했다. ‘천재끼리 결혼했으니 천재들이 태어날 게 뻔한데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라고.

그 평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솔직히 유리엔이 놀라는 리시안서스의 진도를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던 에키네시아는 지금 이 순간 경악했다.

메이릴리는 눈을 감은 채로 깔끔하게 스타티스식 검술을 펼쳐냈다. 제대로 가르친 적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한 자세였다. 심지어 소녀가 연무장에 남긴 발자국은 그어놓지도 않은 금을 상정하고 움직인 것처럼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어제 겨우 저것을 성공했던 히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에키는 마검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주인아, 네 애들 중에서 얘가 제일 타고난 거 같은데?]

“……그러게.”

“엄마, 어때요? 나 잘했어요?”

마지막 기술을 끝낸 메이가 반짝 눈을 뜨고는 상기된 채 물었다. 힘들긴 힘들었는지 어깨가 눈에 띌 정도로 들썩이고 있었다. 에키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기 위해 얼굴을 한 차례 문지르고 쪼그려 앉으며 딸과 눈높이를 맞췄다.

“메이.”

“네, 엄마.”

“언제 이걸 배웠니? 아빠가 가르쳐줬어?”

“아뇨, 오빠들이 매일 연습하잖아요. 창문으로 맨날 지켜봤는 걸요.”

“……그걸 그냥 보고 따라한 거라고?”

“몇 번 해보니까 되던데……. 틀렸어요? 이상하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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